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7년 7월의 말씀
공동체와 화해,
기억의 빈자리
자가를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서 체험한 후에야 사람은 진정한 의미에서 화해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화해하고 싶지 않은 사람은 없지만 화해하려는 몸짓을 시작하는 순간, 이미 온몸이 경직되는 것을 체험하는 것이 우리 인간들입니다. 인간의 자기중심성은 자신이 원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흐름에 역행하는 쪽으로 흐르기도 합니다. 역행하는 두 흐름이 부딪칠 경우, 그곳에는 별들의 전쟁의 우주쇼가 벌어지기도 하며, 그 때 입은 상처가 쉽게 아물지 않는 것은 흔히 보는 광경입니다. 물론 타인 안에서 뿐 아니라 우리 자신 안에서도… . 화해하고자 하는 열정이 커서 이리 저리 움직이기도 하지만, 아직 상대는 준비도 되지 않았는데 이쪽에서 성급히 굴면 오히려 상처를 더 크게 만들기도 합니다. 이 때 화해하고 싶은 마음은 여전히 자기중심적이지 다친 상대의 마음을 보듬고, 그 밑바닥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내 마음의 진정한 변화가 성급한 마음을 따라잡지 못한 것이지요. 그만큼 화해는 쉽지 않습니다.
이런 상처가 겹치고 겹치면 그 부위는 물크러지고 상하게 되어 자신마저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늪으로 변해버립니다. 화해하고자 하는 마음을 받아들여주지 않는다고 원망만 더 커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이 늪은 온갖 것을 빨아들이려 합니다. 상처받은 마음을 보상받고 싶은 것입니다. 이 보상심리가 작용하기 시작하면 화해는 점점 더 어려워지며, 자신만이 피해자로 일평생을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야말로 깊은 수렁 하나를 자신 안에 품고 살아가는 것이지요.
누가 이 깊은 수렁을 치유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크고 작은 상처들을 지닌 공동체 안의 화해는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겠습니까? 십자가로 표현되는 사랑, 자기희생의 사랑만이 이 수렁을 통과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화해할 수 없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화해를 향한 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외부로부터 오는 큰 사건으로 인해 깊은 상처를 받았을 때, 자기 희생의 사랑으로 함께 하는 이가 있다면 이 상처의 자리는 깊은 수렁이 아니라, 빈자리가 됩니다. 이런 마음의 빈자리는 자신의 내면에 숨구멍 같은 것이 되고, 타인을 품는 자리가 되기도 합니다.
이 자기희생의 사랑 없이는 자신과의 화해도 사실 참 어렵습니다. 자신의 약함을 본 사람 즉 얼마나 자기중심적인지를 꿰뚫어 본 사람만이 자기희생이 참된 길임을 제대로 알아듣습니다. 자신의 약함의 바닥을 본 사람만이 타인의 약함을 분노함이 없이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자신에게 상처를 입히는 사람조차 그 바닥에 무엇이 있는지 볼 수 있는 눈은 이 자기희생의 사랑뿐입니다.
공동체를 묶어주는 접착제 역할을 하는 것이 이 자기희생의 사랑입니다. 화해를 할 수 없는 마음의 수백 겹의 단층을 꿰뚫어 볼 수 있는 것도 이 자기희생의 사랑뿐입니다. 사랑을 가장한 왜곡과 집착의 어지러운 실타래 안에서도 고요히 사랑의 숨을 내쉴 수 있게 해주며, 손쉽게 실타래를 끊어버리고 해방을 외치게 하지 않습니다. 시간이 걸려도, 서로가 더 힘들어져도 화해의 여정 없이는 진정한 공동체를 이룰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진정한 화해를 이룬 공동체를 찾아 지구 열 바퀴를 돈다 해도 단 하나의 공동체도 찾을 수 없을지 모릅니다. 내가 몸담고 있는 곳도 그 이상에 닿지 못할지 모릅니다. 진정한 자기희생의 사랑은 여기서 드러납니다. 화해를 이루는 것 자체를 목적으로 삼지 않습니다. 그만큼 인간이 철저히 자기중심적임을 알기에, 그것을 강제로 이루는 것은 폭력일 수밖에 없음도 알기 때문입니다. 화해를 이루어가는 여정, 그 여정 속에 자신의 진짜 보물을 숨길 줄 아는 사람이 됩니다. 수도회의 온갖 영성과 카리스마를 꿰뚫고 있다 할지라도, 노동에 헌신하고 뛰어난 솜씨로 봉사해도, 규칙과 규율에 한 치의 어긋남이 없을지라도, 온갖 위기를 극복하고 공동체의 어려운 일들에 해결사 같은 능력을 발휘해도 진정한 화해를 이루는 삶을 살지 못한다면 그는 행복한 수도승일 수는 없습니다. 그이 안에는 기억의 빈자리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