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7년 6월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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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와 십자가,

 

십자가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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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 역사의 가장 정점이 되는 자리는 한 마디로 표현하면 십자가의 자리입니다. 공동체가 외적 성장을 잘 이루어 사람은 넘쳐나고 영적, 학문적으로 공헌을 하는 그런 기회가 부여되는 순간이 공동체의 정점이 아닙니다. 공동체의 정점은 그 가장 아픈 자리, 약한 자리에서 십자가의 사랑이 확고히 설 때입니다. 아무리 외적으로 풍요로움이 넘치는 공동체일지라도 그 역사 안에 약함이 드러나는 시기가 있다는 것은 설명할 필요도 없으며, 그 시기에 약함을 무시하고 외적 성장만을 더 추구한다면 그 성장은 예수의 가치 안에서는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은 설명의 여지가 없을 것입니다.

그 아프고 약한 시기는 한 공동체를 두 가지 기로 앞에 서게 합니다. 하나는 십자가의 사랑이요, 다른 하나는 재앙에 가까운 기억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아프고 약할 때면 수도공동체 역시 일반 가정과 마찬가지로 나누어져야 할 짐이 많아지고, 긴장과 아픔, 슬픔, 분노, 미움, 원한 같은 것들이 공동체 공기를 이루게 되는 것은 인간이란 존재로서 피하지 못할 현실입니다. 수도공동체의 흐름 안에 이런 시기가 나타날 때, 십자가의 사랑 또한 드러나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참되게 사랑하고자 할 때 반드시 사랑의 흐름에 역행하는 힘과 마주 대면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리고 사랑 안에서조차 이기적인 인간의 치명적 약함이 있는 그대로 드러나는 때이기도 합니다. 사랑하고자 하는 사람도, 사랑을 회피하는 사람도 모두 발가벗게 될 수밖에 없는 진정한 평등의 순간이라고나 할까, 인간 존재의 가장 깊은 심연이 보고 싶지 않아도 우리 눈 앞에 펼쳐지는 고통이 동반되는 참된 은총의 시기입니다. 바로 이렇게 선인, 악인이 따로 구별되지 않는 자리가 진정한 자유의 자리입니다.

샤갈의 하얀 십자가야말로 이런 상황을 가장 잘 설명해주는 뛰어난 작품입니다. 샤갈은 비텝스크라는 유대교 신비주의 하시디즘에 깊이 젖어있던 유대인 게토에서 성장하였고, 그의 작품들은 이 사실을 배경으로 해야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유대인이요,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지 않은 그가 그린 십자가가 어떤 그리스도교 화가보다 더 깊이 십자가와 공동체의 의미를 꿰뚫고 있습니다. 히틀러의 독일인 학살을 배경으로 한 그림으로 그 처절한 상황이 잘 묘사되어있습니다. 왼쪽 구석에는 무기를 든 사람들이 쳐들어오고 있고, 마을은 이미 불타오르는데 도망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실감나게 그려져 있습니다. 그 와중에도 모세오경 토라만은 가슴에 품고 안타깝게 십자가를 바라보는 이, 아기를 품에 안고 도망갈 엄두도 내지 못하는 아이 엄마, 무엇인가가 든 자루를 지고 허둥대는 이, 다윗의 별이 새겨진 불타는 집에서 하나라도 더 건지겠다고 무엇을 꺼내는 이, 배를 타고 도망가는 이들도 있으나, 몸부림치는 이들의 모습은 배조차 구원이 되지 못함을 처절하게 보여줍니다. 하늘에서는 그들의 선조들이 얼굴을 가린 채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습니다. 이 급박하고 절실한 상황 속에 두 개의 빛줄기가 그림을 관통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와 십자가를 비추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오른쪽 아래 두루마리에서 십자가를 향해 올라가는 빛입니다. 이 두루마리는 예언서, 이사야서이며 수난받는 야훼의 종을 샤갈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수난받는 하느님의 종, 예수는 이 끔찍한 상황 한가운데, 이 상황의 중심인양 십자가에 달려있습니다. 모든 것이 흔들려도 흔들리지 않는 중심, 고난이 깊어질수록 더 깊어지는 사랑, 그 십자가의 사랑으로 이 고난을 품고 있습니다. 그리고 두루마리에서 나온 빛은 십자가 위를 향해 걸쳐진 사다리로 이어집니다. 이 사다리는 십자가에 달린 이를 위한 것일 리는 없을 터이고, 분명 보고있는 우리가 오를 사다리입니다. 그 사다리는 수난받는 야훼의 종과 떼어서는 생각할 수 없음을 샤갈은 간파하고 있는 것이지요. 저 중심이 없이 모든 것은 혼돈일 뿐입니다.

모든 고통과 모든 기쁨을 아우르는 이 십자가를 포기하는 것은 공동체에 진짜 재앙이 되며, 공동체를 진정 공동체가 되게 하는 것은 이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이 십자가의 사랑에서 부활의 빛이 터져나오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