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7년 5월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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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와 역사,

 

기억의 자리

“한

한 개인의 역사는 기억의 자리입니다. 무엇이 그의 기억을 형성하는가 하는 것이 그 사람의 인격을 결정한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입니다. 이것은 한 공동체의 역사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첫 출발의 기억이요, 자신의 기원에 대해 선배들로부터 전달받은 공동의 기억일 것입니다. 이 기억은 또한 연결된 모든 것들과의 기억이기도 합니다. 부모, 자매, 친지는 물론 가까운 모든 이들, 주위 자연, 환경, 사회, 역사, 사건, 우주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모든 것들과 함께 엮어가며 생겨난 것에 대한 기억입니다. 중요한 것은 일어난 사건, 둘러싸고 있는 인물에 대한 정보나 지식이 아니라 어떻게 기억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공동체나 공동체를 이루는 구성원의 출발점은 말할 것도 없이 그리스도 예수입니다. 예수와의 만남과 체험, 역사가 없었다면 공동체는 시작될 수조차 없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교 공동체 탄생의 첫기억입니다. 그리고 이 공동체의 마지막 종착점 역시 이 그리스도이며, 그 사이를 메우는 기억도 이 그리스도와의 만남의 역사입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생명의 출발과 종착점 역시 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빼고 나면 이 공동체는 존재 이유조차 없어지고 맙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기억이 공동체 역사의 모든 기억을 새롭게 해석하게 해줍니다. 고난일 수도 있는 기억이 하느님의 사랑의 기억으로 변모되고, 공동체의 모든 약함과 모순도 배척할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한 부분으로 여겨지게 됩니다. 여기서부터 당연히 수도공동체의 정신과 생활형태, 그 통치체제를 형성하는 영성은 그리스도 중심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너무도 당연한 일이지만, 이를 구성하는 구성원들이 철두철미 그리스도화 되어있지 않기에 생겨납니다. 바로 이 차이에서 그리스도의 자비와 구원의 역사, 개인의 회심의 체험, 공동체의 역동성이 서로 얽히며, 한 공동체의 역사를 형성해갑니다. 이런 공동체는 첫째 하느님이시며 인간, 육이 되신 그리스도의 자기로부터 나옴, 둘째 하느님이신 그리스도의 자기 비움, 셋째 그리스도의 성부께로 돌아감의 세 가지 현실의 참여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리스도가 자신의 생명의 주인임을 체험하는 수도승은 자기중심의 거짓 프로그램에서 나와 가장 숨겨지고 가장 비천하고 가장 작은 것 안에서 이 생명의 주인을 발견합니다. 왜냐하면 공동체와 수도승의 존재 이유인 그분이 무한히 자신을 비우시어,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던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기억은 평범함 안에 숨은 온갖 역경과 고난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줍니다. 역경은 그리스도께로 가는 길에서 없을 수 없을 뿐 아니라, 그 길 자체라는 것입니다. 이 체험은 생명의 체험이요, 자비의 역사를 이루어 공동체가 자신의 삶과 역사에만 머물지 않고 자기 밖으로 나갈 수 있게 해줍니다. 이런 공동체의 삶 안에서는 평범함이 비범함으로 변모됩니다. 매일 똑같이 부르는 시편 찬미는 새로운 노래가 되고, 매일 입는 똑같은 옷은 기쁨의 옷이 되고, 매일 보는 때로 나를 싫어할 수도 있는 자매는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받는 유일무이한 그분의 딸이 됩니다. 이것은 꿈같은 이야기가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실제로 그러합니다. 그리스도의 정신, 그리스도의 육화, 자기비움, 죽음, 부활,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의 역사입니다. 이것이 약한 인간들이 모인 약한 공동체 안에 가능한 일인지 물음이 생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역설적이게도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곳에 답이 있습니다.

이런 정신을 살아가고자 1098년 프랑스 시토에서 처음 시작된 시토회 첫 공동체는 전유럽에 1,000여개에 이를 만큼 널리 전파되었고, 13세기 전성기를 지나 쇠퇴의 길에서 끊임없는 쇄신운동이 일어났으며, 18세기 프랑스 트라프에서의 개혁이 가장 보편적으로 퍼지며, 트라피스트 수도회라는 별칭이 더 붙게 됩니다. 프랑스의 라발 여자수도원이 1899년 일본 하꼬다테에 천사의 성모 트라피스트 여자수도원을 세우고, 1987년 한국 마산 수정에 천사의 성모 수도원이 한국 수정 수녀원을 창립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