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7년 4월의 말씀

단잠

공동체의 탄생-사랑의 그늘 아래

수정창립 30주년을 향해 4

“세

세상 부러울 것 없는 단잠, 아기만이 뿜을 수 있는 단냄새가 폴폴 코를 간지럽힙니다. 아가의 단잠을 감싸는 머리 위 꽃그늘 엄마아빠 가족의 그늘 아래 아가의 단잠 꽃잠 꿀잠이 한없이 포근합니다. 아가 혼자이지만 부모의 사랑의 그늘, 가족을 둘러싼 여러 그물들이 얽힌 사랑의 그늘이 함께 느껴집니다.

한 공동체의 탄생도 아기의 탄생과 닮은 면이 많이 있습니다. 여러 시대에 걸쳐 있던 배아가 어떤 희생, 어떤 죽음으로 하나의 카리스마로 형성되어 가는 과정을 간단하게 보아왔습니다. 어떤 카리스마의 형성이 한 공동체의 탄생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카리스마라는 말이 현대에 와서 어떻게 사용되든, 성경 특히 바오로에게는 “하느님의 은사”였다는 것을 기억하면, 하나의 카리스마에 따라 형성된 공동체는 그 자체로 하느님의 은사입니다. 살아가는 이들에게 선물이요, 세상을 향해서도 선물입니다.

시토회 공동체는 1098년 프랑스 시토라는 곳에서 첫걸음을 시작하였습니다. 클루니개혁을 통해 고조된 교회 안의 신선한 바람이 시토라는 곳으로 방향을 잡기 시작한 것이지요. 봉건체제의 그늘 아래, 왕과 귀족, 영주들의 교회를 향한 오랜

지배의 고리를 끊고 원장선거 및 공동체 운영의 자유를 획득하자 수도회의 정신은 비약적으로 활발해지고, 성장의 기운을 타고 나아가던 11세기 유럽전체의 움직임과 더불어 새사람들이 물밀듯이 밀려듭니다. 이 활발한 움직임, 세속권력으로부터의 눈에 보이는 자유만이 아닌, 진정한 내적 자유를 향한 움직임이 영적쇄신운동으로 형성된 것이 이 시대의 한 특징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구원, 복음, 가난, 사랑이 이 운동을 이해하는 열쇠가 되는 말임을 생각할 때 당시의 쇄신운동이 얼마나 활기찼을까를 미루어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시토회는 초기에 “새수도회”라 불렸는데, 이 운동의 가장 첨단에 서있던 탓에 아직 기성의 흐름에 몸담고 있던 이들에게는 새롭고 심지어 기이하게 보이기까지 했던 모양입니다. 당시 수도회들의 일반적인 흐름은 수도승들은 손노동을 하지 않고 전례기도에만 전념하며, 장엄한 전례를 위해 물질과 시간을 아낌없이 투자하여 화려하고 엄숙한 전례가 끊임없이 이어졌습니다. 수도회의 위상도 높아져, 세상과 관련이 커지고 수도승적 고요함과 세상과의 분리가 희미해지는 경향이 생겨났습니다. 시토회는 전례, 건물, 생활의 소박함과 단순함을 회복시키고, 기성수도회들이 당연히 여기던 십분의 일세도 포기하고, 세상과는 원래 그러하였던 거리를 유지하되 세상을 위해 존재하는 기도의 몫은 깊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한 극단에서 다른 극단으로 치닫는 일 없이, 침묵과 대화, 노동과 기도, 순명과 자유, 세상과 거리둠과 세상과의 만남 사이에 좀처럼 보기 드문 균형을 이룹니다. 수도회 통치체제 면에서도 지나친 중앙집권을 피하고 각 공동체의 자립을 보장하되, 세계 곳곳에 흩어진 1,000개의 공동체들의 카리스마의 일치를 위해 총회, 시찰, 모원장 제도를 수립함으로써 유기적인 몸의 균형을 잡습니다.

이러한 제도는 평범한 사람도 열렬히 오직 하느님만을 찾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생활양식을 형성해준다는 것이 참으로 중요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앞으로 올 세대에 관상봉쇄수도원만이 아니라, 활동수도회를 위해서도 가장 바람직한 통치체제를 남겨줍니다. 이 통치체제의 유일한 목적은 그리스도 중심, 즉 하느님의 선물로서의 공동체입니다. 오직 하느님 찾기만을 목적으로 하는 이 공동체의 생활양식은 그에 합당하게 기도, 독서, 노동으로만 이루어진 단순함으로 관통되어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