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빔이 곧 나인 것을

 

텅빔이 곧 나인 것을

 

정으로 쪼고
끌로 파고
칼로 쪼개고
정신이 아뜩하여
딱 그 자리에서 죽는 줄만 알았지요
아픔 겨우 멈춘 어느날
정신차려 보니
껍질만 남기고 속은 텅비어 버렸더군요
싱싱한 수액 넘치던 속살 몽땅 잃고
더 살아 무엇하겠는지
산속 그 푸르고 싱싱하던 날
떠올라
울컥울컥 눈물 콧물 범벅이 되었더랍니다
커다랗게 입 벌린 시커먼 구렁 앞에
그대로 몸던져 버리고 싶었지요
그것으로도 끝나지 않은 고통의 질주
거친 페이퍼로 온몸을 긁어대니
그 쓰라림이
지옥의 불은 차라리 따사로울 지경

끝자락, 바닥, 나락, 구렁
뭐 그런 것의
가장 밑자리던가요
이상한 고요가
몸을 휘감기 시작하더군요
그러자
거칠고 거친 손이

껍질만 남은 제 몸을
차마 만질 수도 없다는 듯
성스러운 무엇에 닿는 듯
어루만지기 시작했지요
그리곤 제 몸에 가만히 귀를 대더군요
마치 멋진 선율에 휘감긴 듯
고요히 눈을 감고
몸을 일렁이지 않겠습니까

바로 그때
제 몸에 가득한 텅빔
그 선율이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마치 이때를 기다린 듯
솜씨 좋게
12줄 명주실을 팽팽히 걸어나갔습니다
12줄 걸기 위해
제 몸엔 다시 아픔이 찾아왔지만
이미 내 몸통 속 가득한
고요는
이제
깨트려질 수 없었습니다
아픔이 감돌수록
텅빈 공간은 익어갔고
서로 얽히는 법 없는 12줄은
각기 제 소리를 냈지요

12줄 제 울림 낼 때마다
아픔은 더욱 익어가고
제 속도 더 텅 비어가지요
끝없는 울림의 선에서
울림이 곧 나요
텅빔이 곧 나인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