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6년 5월의 말씀

rmfla

 

성령의 바람

상적인 사고의 틀 안에서 천사는 선한 존재로 인간 편이고, 악마는 인간을 유혹하거나 해를 끼치는 나쁜 존재로 자리잡고 있다고 해도 딴지를 걸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네덜란드 출신인 모리스 코리넬리스 에셔라는 화가는 이런 기본적으로 통하는 사고에 제동을 걸어옵니다. 선과 악, 현실과 가상의 세계, 3차원을 넘어서는 세계, 무한반복 되는 고리인 뫼비우스의 띠 등 일단 “어! 이게 뭐지?”라는 의문을 가지게 만드는 그림을 그립니다. 사실 현실에 대해 숙고하는 사람이라면, 선한 사람이라 여겨오던 사람에게서 이해할 수 없는 나쁜 면에 접해 자신의 삶의 한 순간이 무너질 수도 있는 면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아우슈비츠의 잔인한 군인들이 가정에서는 한없이 좋은 아버지였다는 사실은 이런 면에서 인간존재, 인간현실의 깊은 심연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구도의 길을 걷는 수도승들에게도 자기기만이라는 문제는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우리 시대의 큰 스승 성철 스님의 임종게(스님들이 죽음 직전에 남기는 깨달음의 시)로 “평생 남녀의 무리를 속여 죄업이 하늘을 넘는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 글에서 성철 스님이 남모르는 큰죄를 지은 것을 임종 직전에 양심고백이라도 한 것인 양 떠들었다고 하는데 이는 스스로 자신과 인간의 심연을 모른다는 사실을 폭로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즉 에셔의 그림이나 성철 스님의 임종게는 선과 악, 내 편 네 편으로 갈린 이원론의 세계 안을 휘저어놓습니다. 선과 악, 죽음과 생명 등 서로 대립하는 짝들이 서로 파괴적이 아닌 공존하는 관계라는 사실입니다. 그림을 보면 박쥐 얼굴을 한 악마와 하얀 천사가 한 치의 틈도 없이 서로 맞물려 돌아갑니다. 원 밖으로 갈수록 천사와 악마 사이는 점점 줄어들어 원의 테두리에 닿으면 천사와 악마는 하나를 이룹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은 선인에게나 악인에게나 골고루 비와 햇살을 내린다.”고 하셨고, 자신 안의 검은 것을 보지 못하고 외면적인 선을 자랑하는 위선을 꾸짖으셨지, 선함이나 악함 자체를 칭찬하거나 야단치는 것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심지어 예수를 향해 ‘선하신 선생님’이라는 사람에게 “하느님 한 분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다.”라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욥기에서 하느님은 욥을 시험하겠다는 사탄의 제안을 받아들이십니다. 즉 사탄 역시 하느님 손 안에 있는 것이지 하느님 바깥의 어떤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선과 악이 마치 제각각의 힘인 양 이원론적으로 쪼개놓고 있는 이들을 보면, 내 편은 선하고 너희는 악하다는 지독하게 자기중심적인 이론에 바탕하고 있음을 쉽게 관찰할 수 있습니다. 세상을 파괴하는 모든 전쟁의 바탕에는 상대방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는 이원론이 깔려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인간을 그렇게 집단으로 죽일 수 있겠습니까? 사회정의는 정말로 필요하고 현대 사회의 일그러진 모습 안에는 더욱 그렇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상대방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고 잔인하게 몰아낸다면, 우리가 절실히 경험하듯 악순환이 반복 또 반복될 뿐입니다.

이렇게 선과 악으로 쪼개진 우리네 세상에 성령은 바람으로 오십니다. 어떤 좁은 틈도 스륵 불어갈 수 있는 바람, 흑과 백, 선과 악의 명백한 세계 안으로 불어들어와 이쪽은 저쪽으로 저쪽은 이쪽으로 왔다갔다하게 됩니다. 선과 악이라는 우리가 만든 틀에 스스로 갇힌 인간을 해방시킵니다. 성령은 사랑이시고, 사랑은 해방하는 힘입니다. 자신으로부터 해방시켜 타인 안에 머물게 하고, 욕심으로 가득 찬 마음을 비워, 여리고 작은 것들이 들어갈 수 있도록 바람이 불어옵니다. 이 바람이 심연에 닿으면 자신 안에 있는 심연, 악, 죽음, 검음을 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성철 스님만이 아니라 많은 성인들은 “저는 죄인입니다.”라고 가슴을 쳤다는 것도 결코 과장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성령의 바람 속에서 복된 죄인! 죄인들이 모인 세상에 선인, 악인의 구별이 생겨날 리 없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