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6년 3월의 말씀

3월 소식지

어머니를 그리다 그 너머

상을 깡그리 뒤엎어주는 어떤 것을 만나는 것은 만나기 힘든 은총의 기회입니다. “어머니를 그리다”라는 책의 첫 장을 넘길 때 제 안에는 화가들이 그린 엄마와 아기의 따뜻하고 포근하며 밝은 화면이 깔려있었던가 봅니다. 궁금함을 참지 못해 우선 그림들만 대충 대충 넘겨보았는데, 삼분의 일도 채 넘기기 전에 저의 예상은 마치 얇은 유리처럼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습니다. 15C부터 20C에 걸쳐 40명의 화가들이 그린 어머니를 담고 있는데, 그중 35명이 회색, 검정색의 무채색의 옷을 입은 어머니를 그리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상당수는 당시의 상복차림입니다. 정신이 잠시 멍해지는 느낌마저 들었습니다. 며칠을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가 어느 순간, 내가 엄마를 그린다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엄마가 밝은 색 옷을 입지 않았던 것도 아닌데, 도저히 밝은 색 옷을 입은 엄마를 그릴수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엄마의 살아낸 삶, 그 고난, 인내, 눈물들이 단지 따뜻함으로 그려질 수는 없는 것이지요. 엄마의 사랑은 따뜻함 그보다 훨씬 더 폭넓은 것이니까요. 무채색을 쓴 화가들의 마음이 조금씩 아프게, 고맙게, 뭉클하게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화가들에게 엄마의 일생 중 그 사랑이 가장 크게 와닿았던 순간은 아마도 형제나 자매 혹은 아버지의 죽음 앞에 선 엄마의 모습에서였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화가들과 엄마의 관계는 깊은 신뢰로 이어져있었고, 화가들이 주위의 인정을 받지 못할 때조차 자신의 아이가 성공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격려해주는 모습들이 자주 눈에 뜨였습니다. 화가라는 쉽지 않은 길, 일생 자신을 투신하고서도 인정조차 받지 못할 수도 있는 길에서 엄마라는 존재의 신뢰와 믿음은 화가들에게 배의 닻과도 같은 것이 아니었겠는지요. 40명이나 되는 화가를 다루다보니 아쉽게도 깊이 있는 조사를 바탕으로 한 글은 아니지만 자세히 볼수록 그림 자체가 말해주는 것들이 참 많았습니다. 색채의 화가인 샤갈은 거의 무채색 톤의 화면에 검은 앞치마를 두르고 화덕에서 일하는 엄마의 모습을 아주 단순한 필치로 그립니다. 15C 화가 뒤러는 목에 불거진 핏줄, 뼈가 드러날 정도로 앙상한 얼굴을 그대로 그리며, 제임스 앙소르라는 화가는 임종한 직후의 모습을 그려냅니다. 놀라우리만치 솔직하고 적나라합니다. 그림들을 하나 하나 보고 있자면 그 엄마의 성격까지도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결코 만만치 않은 성향들을 지녔을 화가 못지않게 엄마들의 눈빛이나 입매 또한 다부져보입니다. 엄마와 아들, 엄마와 딸 사이라 할지라도 없을 수 없는 생의 한 편 드라마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사랑으로도 결코 메꿀 수 없는 인간 존재의 심연, 그 바닥이 서로 만나며 일으켰을 물보라, 밀물, 쓰나미 속에서 부모와 자식을 넘어 한 인간으로 느꼈을 동료애 같은 것이 슬쩍 얼굴을 내밀기도 합니다. 부모의 약함과 잘못을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것을 그대로 물려받음을 익히 알고 있지요.

우리가 나온 모태, 그 약함과 죄를 그대로 물려받는 아담 이래 누구도 면제받을 수 없는 원죄마저 이 그림들은 이야기해주고 있습니다. 엄마를 잇고 아이를 잇고 또 그의 아이를 있는 이 원죄의 줄기, 그 앞에 한 번 서보는 것, 인생의 어떤 순간에는 반드시 마주서야 할 일입니다. 이것 없이 삶을 참으로 진실되게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진리의 삶, 참된 가치의 삶, 우리 엄마들조차 살아내지 못한 삶에로 초대하기 위해 우리를 위해 목숨을 내놓으신 예수 그리스도, 참생명의 주인, 그분의 모습 또한 그림들 속에 얼비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