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5년 2월의 말씀

2월소식지

 

한 사람 여기!

런 작품을 낳을 수 있는 작가의 마음은 어떤 것인가 생각해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그득해짐을 느낍니다. 금방이라도 몸을 일렁거리며 낮은 노래 가락이 흘러나올 것 같습니다. 실제 저 자세를 취해보면 마음이 한껏 가라앉으면서 눈이 감깁니다. 이 조각상의 모습이 먼저 안으로 들어와 버렸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삶 안의 다른 것들은 뒤로 사라지고 그곳에 있는 자신마저도 잊어버리게 되는 것 같습니다.

자신마저 잊으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자신을 잊어도 되는 것일까요? 잊을 수나 있는 것일까요?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자신을 잊어야 참 자신이 될 수 있습니다. 늘 자신을 의식하는 것은 건강하지 않다는 하나의 표지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 아기를 바라볼 때, 악기나 성악을 하는 사람들이 절정에 달할 때를 생각해보십시오. 자신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도 가장 자신다운 모습으로 자신이 아닌 상대 혹은 하고 있는 일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신을 잊은 집중은 그 자체로 사람의 가장 깊은 곳을 열어줍니다.

사람들은 이 자신을 잊은 집중이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자기 잊음은 생략해버리고 값싼 집중만을 얻고자 온갖 중독에 빠집니다. 인간은 본래 이렇게 창조되었지만 스스로의 자유로 자신의 모습을 잃는 죄를 범하였지요. 그래서 가장 자신다워지는, 자신을 잊는 집중은 엄청난 노력으로도 쉽지 않게 되어버렸고, 그것이 무엇인지 감을 잡기도 어려운 것이 되었습니다. 여러 종교 종파들이 이 집중을 수행의 목표(그리스도교 수도생활은 그렇지 않음)로 삼고 있는 것을 보더라도 인간이 얼마나 여기서 멀어져 있는지 알게 해줍니다.

사실 이 작품을 처음 접했을 때 이사야의 수난받는 야훼의 종이 저절로 떠올랐습니다. 그런 수난을 겪은 사람이 아니고서는 나올 수 없는 모습이라고 할까요. 그의 모습에는 왠지 삶이 철저히 무너진 어느 한 구석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야훼의 종처럼 그는 침뱉음을 당해도 조롱과 배신 속에서도 분노와 증오로 활활 타올라 자신을 소진하지 않고, 자신을 잊고 그것을 허락하신 하느님의 뜻 속으로 깊이 깊이 내려가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엄마에게 온전히 자신을 내맡기는 아기처럼 인생이라는 품이 곧 하느님의 품이 된 사람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온전히 열린 자세, 자기망각, 온전한 집중 이 세 가지가 하나가 된 하느님의 사람이 떠오릅니다. 자신의 고난과 수난에는 초연하다는 말이 어울리는 그런 모습이면서 상한 갈대 같고 꺼져가는 등불같은 백성과 이웃에게는 온마음이 기울어지는, 자신일랑 온전히 잊은 한 사람이 떠오릅니다. 한없이 고요해보이지만 저 고요함에서 일어서면 누구보다 삶의 한복판에서 움직일 그러한 사람, 가장 분주히 움직여도 저 고요의 한 자락은 반드시 끌고 가는 사람, 우리가 그리워하는 한 사람이 떠오릅니다.

 

한 사람 여기

 

고요함 그대로

세상 온갖 것에

사랑의 품인 듯 몸 맡긴 사람

한 사람 여기

절절함 그대로

군중의 성난 고함 한복판에서도

상한 갈대 그들을 한없이 연민하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