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4년 12월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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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요셉 그 너른 그늘

 

브란트다운 통찰이 빛나는 그림 중 하나입니다. 얼핏 보면 그저 성탄을 그린 것 같지만 조용히 그림 앞에 머물면 렘브란트의 마음이 보여옵니다. 그 비밀을  한 번 엿봅시다. 우선 배경이 되는 상황부터 살펴보면 아마도 허겁지겁 달려온 목자들이 다녀가고, 이제 조용히 숨을 고르나 싶을 때 동방박사들이 경외감으로 가득 차 들어왔습니다. 그들의 말, 그들의 태도 속에 마리아와 요셉은 같이 압도되었겠지요. 일말의 의심이 남아있었을 요셉조차 그들의 태도에 함께 전이 되어 하느님을 찬미했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렇게 예상조차 못했던 상황도 다 지나가고 먼길, 묵을 집을 찾느라 애태움, 마굿간에서의 아기 탄생 등 그리고 이어진 갑작스런 방문들 뒤에 두 사람은 녹초가 되어 잠들어있습니다.
이 그림의 비밀은 천사입니다. 천사는 마리아가 아니라 요셉의 어깨 위에 다정하게 손을 올리고 무엇인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까요? 요셉은 처음 마리아의 임신을 알았을 때 마리아가 곤란하지 않도록 아무도 몰래 파혼을 하기로 마음먹습니다. 이스라엘 남성으로서 취할 수 있는 가장 관대하고 고귀한 행위라 할 수 있지 않겠는지요?  보통 남성이라면처녀의 집에 찾아가 난동을 부렸을 것이고, 아무도 그를 탓하지 않았을 것입 니다. 그리고 그 처녀는 돌에 맞아 죽었겠지요.  이것은  이스라엘의  건강한  청년이 할 수 있는 정당한 처사였습니다. 요셉은 이 보통의 처사를 훨씬 넘어서는 인품을  지녔기에,  그  와중에  마리아가  곤란하지  않도록  배려하기까지  합니다.
그런 그에게 꿈에 천사가 나타나 성령으로 잉태한 하느님의 아들임을 밝히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단순히 이 말을 받아들여 마리아를 아내로 맞이하고 이제 그 아기가 세상에 태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의 마음이 일사천리 꽝 도장 찍듯 모든 고뇌와 의심, 두려움이 한
번에 다 사라져버리지는 않았나봅니다. 여기에 오히려 요셉의 인물됨이 더 드러납니다. 그는 늘 마리아와 아기 예수 뒤에 머무는데, 건강한 남성으로서 이것이 쉬웠을 리 없을 것입니다. 이 아기가 하느님의 아들임을 진정으로 감지하고, 이스라엘이 그리도 고대하던 분이 자신의 품에 있음에 감사와 경외가득 찬 순간들도 맛보았을 것입니다. 높고 부유한 이가 아니라 작고 가난한 이를 찾아오신 하느님, 그 신비 앞에 압도당하는 체험도 했을  것입니다.  그래도, 그렇다 해도 한 인간으로서 자기성취의 욕구를 끊임없이 포기하며, 젊디 젊은 한 남성이 그림자처럼 오직 뒷바라지만 하는 것을 누가 감히 쉽다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요셉에게 천사는 늘 길동무가 되어주지 않았겠는지요? 마리아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남성으로서의 비참함마저도 그에게 예외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누구나  그러하듯  참힘은  인간에게서  오지 않습니다. 그런 그에게 천사는 참된 생명의 기쁨을, 자신의 아들의 부활로부터 샘솟는 기쁨을 미리 맛보게 해주지 않았겠는지요? 죽음으로부터 부활한 생명만이 모든 고뇌의 유일하고 참된 답이니까요.

요셉은 자면서도 지팡이를 자신에게서 떼어놓지 않습니다. 지팡이는 당시 길가는 순례자들의 무기였지요. 만일의 사태를 생각하는 그의 사려깊음이 다시 드러나는  장면입니다.  마리아는  아기를  감히  품에  안지도  못하고  두  손으로 둥그렇게 감싸고 있습니다. 마음 가장 깊은 곳을 움직이는 분, 그분이 자신의 아들, 이 둘 사이에 마리아의 신비가 있습니다.

 

 

 

 

시토회 수정의 성모 트라피스트 수녀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