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4년 11월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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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평범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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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 얀 프로스트의 “구두쇠와 죽음”이라는 그림입니다. 왼쪽 고리대금업자가 손으로 장부를 가리키며 돈이 모자란다고 따지나 봅니다. 오른 쪽 사람은 젊은 가장일 듯 한데 얼굴에 근심이 가득합니다. 돈을 갚지 못할 때 일어날 온갖 일들이 그의 속을 마구 긁어놓는 듯 양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습니다. 굶주림, 추위, 집에서 쫓겨남, 어린 아이들의 배고파 보채는 소리가 벌써 귀에 쟁쟁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그는 손가락을 높이 치켜들고 우선 이 정도로 봐달라고 사정을 해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고리대금업자에게 그의 말이 도무지 먹혀들어 갈 것 같지는 않습니다. 고리대금업자 뒤 선반에는 저당 잡힌 물건들이 자리를 잡고 있고, 그의 팔 밑에는 이자를 두둑이 보탠 돈자루들이 채권증서와 함께 깔려있습니다. 아마도 돈자루 하나마다 이 젊은이와 같은, 아니면 더 비참한 사연들이 담겨있겠지요. 그에게는 이 젊은 사람도 돈자루 뒤에 가려 보이지 않는 듯합니다. 이상하게도 이 구두쇠의 눈길은 젊은이를 비켜 엉뚱한 곳을 바라보고 있는데, 어찌 보면 무심한 듯,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 태평스런 표정입니다. 이 구두쇠의 얼굴을 사악하게 묘사하지 않은 것이 처음에는 조금 이상했는데, 그림을 자꾸 보다보니 15세기 화가가 보고 있는 것이 어쩌면 20세기 현대와 그리도 같은지 새삼 놀라게 됩니다. 사람의 생명마저 앗을 수 있는 부조리가 있는 곳에 진을 친 사람들은 자신들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결코 하지않는다는 것입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부자와 라자로에 대해 이야기할 때도 상황은 이와 똑같습니다. 부자는 나쁜 짓을 한 것이 아니라, 그저 눈과 귀를 막고 있었을 뿐입니다. 날마다 잔치를 열고 맛있는 음식과 좋은 옷들이 넘쳐나도, 문 앞에서 매일 보는 거지의 처량함이 전혀 그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지요. 이 구두쇠처럼전혀 엉뚱한 곳을 바라봅니다. 나와는 아무 상관도 없다는 듯이…. 이 구두쇠의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외모는 현대의 악의 구조 속에 있는 이들을 절로 생각게 합니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체계적, 조직적으로 노동자나 하청업자들에게 불리한 일을 저지르는 기업주들의 평범한 얼굴이 절로 떠오를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구두쇠와 젊은이 사이에 어떤 존재, 죽음의 사신이 서있습니다. 물론 이 두 사람의 눈에는 그 존재가 보이지 않습니다. 이것으로는 당신이 갚아야 할 것에 비하면 어림 반 푼어치도 안된다고 무심한 듯 응답하는 그에게 죽음의 사신은 증서를 가리키며“너의 생명에 대한 계산은 어찌 될 것 같으냐?”고 묻는 듯합니다. 모든 것이 명백해지는 날, 그 날이 오기 전 이미 어떤 빛이 구두쇠와 죽음의 사신을 환히 너무도 환히 비추고 있습니다. 이 빛은 창문을 통해 들어온 빛일 수는 없으니, 빛은 앞에서 오는데 창문은 그들 뒤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 빛은 생명을 주는 생명자체이지만 이를 거절하는 이에게는 심판이 될 수밖에 없는 빛이기도 합니다. 그는 자신의 생명이 거두어지는 죽음의 순간 앞에서도 돈 계산에만 몰두해있습니다. 알몸으로 와서 알몸으로 돌아가야 하건만 그는 알몸이 될 수가 없습니다. 아마 죽음이 왔음을 알아채는 순간에도 그는 자신의 손에서 보물들을 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 악이 평범하듯, 죽음도 평범하게 옵니다. 두 평범 사이, 줄다리기 포기하고 한쪽만을 잡은 그는, 잘 달려온 인생의 마지막 순간, 자신이 잡은 것의 끝자락에서 추락할 수밖에 없을지 모릅니다.

마지막 순간에라도 그가 다른 한 쪽을 잡을 수 있기를 ….

 

 

 

 

 

시토회 수정의 성모 트라피스트 수녀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