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에릭 아빠스
(12세기 시토회 사부)
강론집
성 베네딕도 대축일 강론 Ⅰ
1. “지혜에 깊이 마음을 두는 사람, 정의를 추구하는 사람, 하느님의 현존을 마음에 두는 사람은 복됩니다.”(집회 14,22; 성인공통 성무 제3독서 후렴)
성 베네딕도를 칭송하기 위해 이와 같은 말씀이 때로 바쳐진 것은 얼마나 합당한 일입니까? 성인의 생애와 가르침을 아는 사람이면 누구나 쉽사리 이를 인정할 것입니다. 우리는 생활개선을 위해 이와 같은 말씀은 얼마나 효과적인지 용어 자체가 증명해 줍니다. 사실 우리 생활 가운데서 지혜, 정의, 하느님께 대한 경외와 그 상급인 행복보다 더 유익한 것이 없음을 이 말씀이 가르쳐 줍니다.
“지혜에 깊이 마음을 두는 사람은 복되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확실히 행복과 지혜는 그것을 깊이 마음에 두기만 하면 우리가 참아 견디게 하고 보존하여 줍니다. 지혜를 발견한 사람이 그 자리에서 즉시 복되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보존했을 때에만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지혜를 발견한 사람은 복되다”고 하는 성경말씀은 진실 된 말씀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이 구절에서 끝나지 않고, 이어서 다음 말씀을 첨가합니다. “지혜를 획득한 사람은 복되도다.”(잠언 3,13) 요컨대 이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지혜의 발견이 행복의 충분조건이라고 믿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지혜에 도달한 사람은 지혜와 함께 머물고, 지혜안에 머물 필요가 있으며, 거처와 식탁을 기꺼이 서로 나눌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정의를 추구하고 하느님의 현존을 의식하여 예지를 몸에 지니지 않으면 여러분은 수행할 수 없습니다. 솔로몬이 지혜를 발견한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외국 여인들을 조심하지 않은 것을 보면, 그는 예지를 충분히 몸에 지니지 않았음이 분명하고 설사 예지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그를 현명하게 행동하게 할 만큼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로 인해 그는 지혜를 잃었을 뿐만 아니라, 우상숭배에 빠져 몸을 망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1열왕 1,11-18).
마찬가지로 세상의 지혜로운 자들도 “세상이 창조된 이래 피조물을 통해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속성을 알 수 있었습니다.”(로마 1,20)라는 의미는 지혜를 발견하기는 했어도 유감스럽게도 예지를 몸에 지니지 않아서 “하느님을 알면서도 그분께 영광을 드리지 않고 부도덕한 일, 가장 파렴치한 일을 할 만큼 어리석어지고 둔해지고 어두워져 버린 것입니다(로마 1,21-22.28 참조).
정주하지 못함(불안정)의 위험
2. 마지막에 언급한 사람의 예를 통해 분명해진 것은 지혜를 찾기는 했으나 마음의 교만으로 그것을 쫓아버린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솔로몬처럼 육체의 꾐에 빠진 것이 분명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아주 작은 어려움에 부딪치자마자 경솔하게 그리고 영의 불안정함으로 인해 지혜를 떠납니다. 그들은 다만 일시적으로 믿을 뿐이고 시련이 닥치면 쉽게 굴복하고 맙니다. 왜 그들은 그토록 쉽게 물러섭니까? 그들이 자신을 지탱해 줄 뿌리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루카 8,13-14).
그런데 그들이 머무르지 않고 어떻게 뿌리를 내리겠습니까? 어떤 식물이라도 심겨진 곳에 머무르지 않는다면 어떻게 뿌리를 내릴 수 있겠습니까? 주님의 집에 심겨진(시편 91,14) 의인 또한 한 곳에 머무르고(규칙 58,17) 정주하지 않으면 뿌리를 내릴 수 없고, 사랑 안에 기초를 두고 뿌리를 내릴 수 없습니다(에페 3,17). 만일 그가 뿌리내리지 못하면 그는 언제나 남아 있게 될(예레 17,8; 요한 15,16) 꽃을 피운다든가, 열매를 맺을 수 없게 됩니다. 그리고 그가 꽃을 피우고 초기에 희망을 주는 듯 보이더라도 그렇습니다. 예언자가 말합니다. “수확하기 전에 꽃철이 지나 열매는 아직 여물지 않았네.”(이사 18,5 참조) 다른 예언자는 “알곡이 생긴다하여도 낯선 자들이 그것을 집어삼켜 버리리라.”(호세 8,7)라고 말합니다.
한 장소에 머무름(정주함)
지혜안에 머무르기 위해, 뿌리를 내리고 알맞은 때에 열매를 맺기 위해 한 장소에 정주하는 것이 얼마나 절실히 필요한지 여러분은 알고 싶습니까? 여러분의 아버지 베네딕도에게 물어보십시오. 그분은 여러분에게 알려주실 것입니다. “모든 덕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 적합한 장소는 수도원의 봉쇄구역과 수도회 안에 정주(定住)하는 것입니다”(규칙 4,78). 불안정한 사람에 대해서 솔로몬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머무를 장소를 떠나, 떠도는 사람은 둥지를 잃고 떠도는 새와 같습니다.”(잠언 27,8) “제비도 제 둥지가 있어 그곳에 새끼들을 칩니다.”(시편 83,4). 그들은 둥지를 따뜻하게 하기 시작했고 그리고 그분께서 따뜻하게 해주십니다. 이미 새끼를 낳을 시기가 온 것입니다(이사 37,3 참조).
보십시오, 그런데 그들은 날아가 버렸고, 시작한 일을 완성하지 못했습니다. 누가 이렇게 행동한다면, 그가 왜, 무엇 때문에 어디로 도망치든 지간에 그는 힘들게 얻은 것에 대한 손실을 배상하든지, 처음 서약한 것을 깨뜨린(1티모 5,12) 구실을 찾아내든지 스스로 이에 대한 책임을 져야합니다. 불안정한 희망을 위해서 확실한 손실을 선택하는 것을 나는 슬기로운 처신이라고 간주하고 싶지 않습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의 진보는 내가 그들을 너무 성급하게 판단하지 않도록 자신에게 권고합니다.
인내의 필요성
3. 위에서 언급한 하찮고 쓸모없는 이유 때문에 지혜에서 멀어지는 것과 지혜를 사랑하기 때문에 불안해지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음이 분명합니다. 지혜를 배우기 위해서 지혜의 가르침에 인내로이 머물러야 하듯이, 성경 말씀대로 쉽게 인내심을 잃어버리는 사람은 그것을 버리는데도 주저함이 없습니다. 그들에게 무엇이 걸림돌이 되었는지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시련이 그들 위에 돌처럼 짓누릅니다.”(집회 6,22 참조) 그들은 “걸림돌과 부딪쳐 쓰러지게 하는 바위에 걸려 넘어진 것입니다”(로마 9,32-33 참조). 단련된 덕은 질책하고, 어리석은 자들을 교육하고, 영들을 식별합니다. 그들은 지혜의 힘 자체를 돌같이 냉혹한 것으로 해석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딱딱하다고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고) 한탄합니다, 즉 훈계, 외모, 말.
엄격함에 걸려 넘어지지 마라
그들은 “귀에 거슬린다”고 말합니다(요한 6,61). 말씀이 여러분의 귀에 거슬릴지 모르나, 그렇다고 그것이 진실이 아니라는 말입니까? 돌은 단단합니다. 그렇다고 그것이 소중하지 않다는 말입니까? 그런데 진리가 왜 당신에게 거슬립니까? 여러분의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이 아닙니까? 만일 여러분의 마음이 경건함으로 부드러워진다면 진리의 견고함이 거짓 허영보다 아첨의 기름보다 더 여러분 마음에 들것입니다. “이 말씀은 귀에 거슬립니다.”라고 그들은 말하는데, 이는 지혜의 시험이 그들에게 돌짐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것을 버리고 도망가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단지 이런 이유 때문에 그들은 그것을 거북하게 여겼고, 하느님께서는 그러나 그것을 고귀하게 여기시어, 그분 자신이 선택하신 돌을 내버렸던 것입니다(시편 117,22).
그리스도께서는 살아 있는 물, 바위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바위이십니다. 그러나 그분은 엄격함이 아니라 그분의 권능 때문에 바위이십니다. 그분은 바위이셨습니다. 그러나 변화가 가능한 바위이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은 믿는 이들의 부드럽고 겸손한 마음을 발견하여 그것을 촉촉하게 적실 수 있으면 언제라도 즉시 자신을 못으로, 물 솟는 샘으로 변화시키셨습니다(시편 113,8 참조).
그들은 엄하게 보이는 것을 만나자마자 그토록 빨리 떠났습니다(요한 6,67). 아마도 그들이 사도들과 함께 머물렀더라면 그들과 함께 영적바위에서 솟아나오는 샘에서 마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1코린 10,4). 그들은 샘솟는 생수를(요한 7,38), 십자가의 바위에서 물이 터져 나와 오늘도 모든 민족과 그들의 가축들이 마실 수 있게 되었을 것입니다(민수 20, 11). 그렇습니다. 그들은 바위에서 나오는 꿀을 빨아 먹게 될 것이고 차돌 바위에서 나오는 기름을 먹게 되었을 것입니다(신명 32,13).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4.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아버지께서 귀에 거슬리는 것처럼 들리는 말씀 속에 감추어진 이 신비를 그분의 자비를 통해서 너에게 알려주신 것이다(마태 16,17 참조). 열두 제자에게 그들도 떠나고 싶으냐고 물으셨을 때 당신은 결연한 대답을 하셨습니다. “당신께서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을 가지고 계신데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요한 6,68-69)라고. 지혜와 함께 머물도록 그리고 그의 식탁에 그의 식구들과 함께 성체성사의 빵과 지식의 음식으로 양육되도록, 생명과 빵과 지혜의 구원인 물을 마실 때까지 믿음에서 지식에로 진보하도록 그분을 선택하신 당신은 참으로 복되십니다.
나의 형제들이여, 여러분도 복됩니다. 여러분이 지혜의 가르침과 그리스도교적 철학의 학원에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만 여러분은 지혜안에서 견인할 때 복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에게 그분의 말씀이 너무 거슬린다고 느껴지더라도, 그분의 명령이 가혹하였거나 아니면 그분이 지나치게 여러분을 질책했기 때문에 그토록 거슬렸을지라도 “여러분 가운데에는 믿지 않는 악한 마음을 품고서 살아계신 하느님을 저버리는 사람이 없도록 조심 하십시오”(히브 3,12). 오히려 더욱 단호하게 사도처럼 말하십시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요한 6,69)
규율은 치료제
물론 규율 안에는 노고가 반영되고(시편 93,20 참조) 말씀 안에는 엄함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 당신을 두려워하는 사람에게는 당신 감미로움의 충만함이 크고, 그 안에 지혜가 감추어져 있음을 저희는 알고 있습니다. 당신은 그것을 당신께 희망을 걸고 있는 사람들에게 허락하십니다(시편 30,20). 그러나 나는 당신이 나를 죽이시더라도 변함없이 언제나 희망할 것입니다(욥 13,15 참조). 당신이 나를 채찍질하시고 잘라내시고 태워버리시더라도 더욱더 희망할 것입니다. 내안에 살아있는 모든 것을 당신이 죽여 버리시더라도, 더 이상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안에 사시게 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갈라 2,20).
우리는 절대로 당신에게서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이 우리를 살리실 것이기 때문입니다(시편 79,19). 당신이 우리를 죽이시더라도! 당신께서 우리를 때리시더라도 그 상처를 싸매주시고, 고쳐주실 것입니다(호세 6,2; 욥 5,18). 지혜안에 정주하며, 충실한 사람, 인내롭게 고통을 참고 충실함 안에서 죽기까지 순명하는 사람(필리 2,8), 권력자가 자주 그를 덮치더라도 자신의 자리를 떠나지 않는 사람은 참으로 복됩니다. 그는 규율의 치료제가 큰 잘못도 막을 수 있음(코헬 10,4)을 알기 때문입니다.
걱정하지 마라.
5. 내 생각에 지혜에, 지혜안에 머무르라고 하는 것은 여러분이 작은 교란에도 쉽게 불안해하거나 방해 받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장엄한 시편노래, 기도, 신적독서, 매일의 힘든 노동이나 침묵의 규율을 지킬 때 방해받지 않게 하려는 것을 뜻합니다. 왜냐하면 지혜는 맡겨진 일을 다 마쳤을 때 부르기 때문입니다. 성인은 이렇게 환호합니다. “제가 당신께 노래할 때 제 입술이 기뻐 뛰고”(시편 70,23), “당신께서는 동녘(matutini)과 서녘(vespere)을 기쁨으로 채우십니다.”(시편 64,9 참조). 기도에 확실히 이 말이 해당되는데, 어쩌면 여러분은 매일 기도할 때 시작보다는 끝이 낫다는(코헬 7,8) 체험을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은 경험으로 기도는 끊임없이 해야 한다는 주님의 충고 말씀이 믿을만하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아주 빈번하게 이것을 엄명하셨고, 많은 예를 들어 권고하셨습니다(루카 18,1-18). 독서에 게으르고, 읽은 것에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거나 책을 읽지도 않고, 책을 손에서 놓아버린다면 여러분 안에서 그것들이 언제 열매를 맺는다고 생각합니까? 당신이 끊임없이 면학을 통해서 친숙해지지 않고 성경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언제 그것이 당신에게 계시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까? ‘누가’ 말씀에 대한 사랑을 ‘가지고 있으면’, ‘그는’ “사실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지지 않은 자는 그가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던 것’ 마저도 그의 게으름 때문에 빼앗길 것입니다.”(마태 13,12 참조) 손노동에서도 여러분은 충분히 경험하지 않았습니까? 여러분이 받을 위로는 마치 일꾼이 한 데나리온을 노동이 끝날 때까지 보류되었다가 일이 끝나야 받는 것과 같지 않습니까?(마태 20,10).
침묵에 대해서라면 예언자의 약속이 이미 알려져 있습니다. “침묵과 희망 속에 너희의 힘이 있다”(이사 30,15 참조)고 그는 말합니다. 만일 당신이 침묵 속에서, 예레미아가 높이 평가하는 침묵 속에서 정의를 실천한다면, 침묵 속에서 주님의 구원을 잠자코 기다린다면(애가 3,26), 침묵 가운데서 은밀한 방법으로, 옥좌에서 전능한 말씀(지혜 18,15)이 당신에게 주어질 것이며, 침묵 속에서 흐르는 실로아의 물(이사 8,6)이 환영받는 흐름으로 평온하고 조용한 마음의 골짜기를 적실 것입니다. 이것을 당신은 한 번 뿐만 아니라 아주 자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다만 당신의 침묵은 정의에서 자라나야 합니다(이사 32,17). 달리 말해서 당신은 성경말씀 안에 머무르고 정의에 대해 숙고해야 하며, 모든 것을 보고 계시는 하느님을 항상 마음 안에 기억해야만 합니다.
정의를 깊이 생각하라.
6. “이 일에 관심을 기울이고 이 일에 전념하십시오. 그리하여 그대가 더욱 나아지는 모습이 모든 사람에게 드러나도록 하십시오.”(1티모 4,15) 만일 당신이 잠자리에서 죄를 꾸미면(시편 35,5), 악인이 꾀는 악행, 마음의 상상력이 주는 환상이나 철학의 허무맹랑한 문구나 환자의 허황된 꿈과 같은 거짓이론, 그 때 당신 침묵은 정의의 결과라기보다는 불의의 예식에 불과하지 않겠습니까?(이사 32,17). 당신이 지혜에 머무르기를 원한다면, 정의에 대해 깊이 생각하려고 노력하십시오. 당신이 지혜를 원한다면 정의를 간직하십시오. 그러면 주님께서는 당신에게 지혜를 베푸실 것입니다.
모든 것을 보고 계시는 하느님을 생각하라.
그러나 만일 해로운 생각과 함께 폭력이 당신을 덮치면, 대장부답게 충실한 파수꾼을 두어 무엇보다도 당신의 마음을 지키도록 하십시오(잠언 4,23). 나는 지금 아무 것도 소홀히 여기지 않고 아무도 시험해보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는 하느님 두려우심에 대해 말하려 합니다. 가끔 하느님 두려움은(경외함) 빛의 천사에게도 이와 같이 묻습니다. “너는 우리 편이냐? 적의 편이냐?”(여호 5,13). 그는 사방을 둘러보고 매 순간 모든 것을 보고 계시는 하느님을 의식하고 있습니다.
경외함은 사람의 자녀들의 마음을 끊임없이 보고 심판합니다. “그는 생각 안에(insensu) 전능하신 하느님을 모시고 있습니다.”(집회 14,22 참조) 누가 하느님의 두려우심을 생각하지 않고, 자신 위에 떨어질 심판과 엄위로우신 존엄의 무게를 느끼지 못한다면(sentit), 그는 완전히 제정신이 아니거나(sine sensu), 그것에 대한 마음이 전혀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더욱 강조해서 말한다면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내려다보십니다. 즉 그분은 모든 것, 과거의 일 뿐만 아니라 미래까지도 현재에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과거를 돌아보거나 미래를 앞당길 필요가 없으시며, 그분은 단순하시기 때문에 모든 것을 동시에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영원은 모든 시간 가운데 한 점에 불과합니다. 그분을 위해서 움직임 없는 원의 단순함과 시간의 사이클은 항상 균일하게 균형 잡힌 현존입니다. 이 영원한 눈, 한 번도 정지한 적이 없었고, 모든 것을 보고 판단하시는 이 눈은 항상 하느님 두려우심을 잊지 않게 합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용의주도하게 주의를 기울이게 합니다. 나쁜 일 뿐만 아니라 나쁜 생각에서 돌아서라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우리에게 정의를 숙고하라고 가르치고 지혜를 붙잡고, 그 안에 머무르라 하십니다.
지혜의 찬송
사람은 이렇게 처음에는 심판과 벌이 두려워 경계하던 것을 점차로 정의를 숙려하고 사랑으로 양육되고, 결국 안식에 다다르게 되며 지혜와 함께 살고, 그의 포옹을 즐깁니다. 지혜는 사랑을 쏟아부어줌으로써 두려움만 몰아내는 것이 아니라 감미로움을 주기 때문에 권태와 싫증도 쫓아냅니다. 지혜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은(지혜 8,3) “집에 들어가면 지혜와 함께 편히 쉬리니 그와 함께 지내는데 마음 쓰라릴 일 없고, 그와 함께 사는데 괴로울 일도 없으며, 기쁨과 즐거움만 있기 때문입니다.”(지혜 8,16)라는 말씀을 증언합니다.
영원히 살아계시며 다스리시는 하느님의 지혜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본성에 참여하시려고, 우리에게 이 기쁨을 나누어주시려고 자신을 낮추시어 내려오셨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