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HELM VON SAINT-THIERRY
샹 티에르의 윌리엄
MEDITATIVE GEBETE
묵상 기도
목차
들어가는 말
윌리엄의 생애와 공헌
첫 번째 묵상 : 하느님이 예정하신 일의 신비
두 번째 묵상 : 타는 열정과 고통스러운 하느님 갈망
세 번째 묵상 : 하느님을 보고 싶어 하는 깊은 갈망
네 번째 묵상 : 하느님을 만나고 그분과 이야기하기 위해서 피신함
다섯 번째 묵상 : 예수님께서 어떻게 기도하셨고 우리를 회심 시키시는가
여섯 번째 묵상 : 내가 보니 하늘의 문이 열려 있고 하느님의 숨은 권능이 드러났 다.
일곱 번째 묵상 : 당신 앞에는 흐뭇한 기쁨이 있나이다.
여덟 번째 묵상 : 하느님께서는 함께 친한 우정을 나누시려고 부르신다.
아홉 번째 묵상 : 당신 앞에 감추어져 드러나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열 번째 묵상 : 하느님의 선하심, 호의에 대한 묵상은 그분 사랑 체험에 우리를 인도한다.
열한 번째 묵상 : 착한 목자의 근심 걱정과 두려움.
열두 번째 묵상 : 주님, 저는 당신의 사랑을 사랑합니다.
열세 번째 묵상 : 주님, 저에게 당신의 완전한 사랑을 주소서, 당신 없이 저는 멸 망하고 맙니다.
들어가는 말
윌리엄의 생애와 공헌
윌리엄은 1075년 류티히에서 태어났다. 그곳에서 학업을 시작하여 라임스에서 마쳤다. 어렸을 때부터 그는 성서와 교부학 외에도 고대 저술가들이 저작한 저술들의 진가를 알게 되어 그 가치를 높이 평가하였다. 1113년 그는 라임스 근교에 있는 샹트 니케이스 베네딕도 수도원에 입회하였다. 아마 1119년-1120년 사이에 그는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를 만났고, 그 때부터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베르나르도의 영향을 받아 시토회의 수도승적 이상(理想)에 매료되었다.
1121년 빌헬름은 샹트 티에르의 오래된 베네딕도 수도원의 아빠스로 선출되었고, 1135년 그가 그곳을 체념하기까지 그곳에서 지냈다. 이미 1124년 빌헬름은 클레르보 수도원에 입회할 수 있도록 승낙해 달라는 청을 베르나르도에게 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빠스로서의 그의 책임을 숙고하라는 권고와 함께 그의 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윌리엄은 아빠스로 재임하는 첫 해에 로마서와 아가서에 관한 교부들의 초록을 발췌하여 저술하였다. 또한 그는 “육신과 영혼의 본질” 이라는 주제로 사부들과 고대 저술가들의 인간학을 집필하였다. 그러나 그 때 당시 그의 가장 중요한 저서는 “하느님 관상에 관한 논문” 과 “사랑의 본질과 존엄성에 관한 논문” 이었다. (이 두 저서는 독일어로 번역되어 “하느님 관상 - 하느님 사랑” 이라는 명제로 1961년 요한네스 출판사에서 출판되었다. 1981년 “신앙의 거울” 이라는 저서와 함께 같은 출판사에서 재판되었다.)
1135년 윌리엄은 베르나르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베네딕도 수도회의 아빠스직을 사임한 후 시니(Signy)수도원의 수련소로 들어갔다.
“묵상 기도” 의 12편의 상당부분은 그가 아직 베네딕도 수도원의 아빠스로 재임하고 있을 때 쓴 것으로써 하느님의 뜻을 식별하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려는 그의 내적 싸움을 잘 드러내 보여주는 감동적인 증거라 할 수 있다.
열세 번째 묵상은 시토회 수도승이 된 후 쓴 것 같고 “신앙의 거울”은 주로 삼위일체에 관해 다룬 것이다.
윌리엄은 베르나르도와 우정을 맺고 있던 관계로 당시 교회를 혼란스럽게 하고, 수도회를 분열시키려는 움직임을 논박하는 논쟁에 그와 함께 참석하였다. 베르나르도가 병상에 누워있을 때 그도 같은 병실에 누워있게 되었는데 그 때 그들이 서로 나눈 담화는 아가의 성숙한 열매이며, 유례에 없는 순수한 영적 해석이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마지막장까지 가지 못하고 3장 1절에서 중단된 채 영영 마무리 짓지 못하였다.
이어서 그는 수도승생활의 이상적인 모델인 살아 있는 그의 친구 베르나르도의 자서전을 썼다(파울 진취에 의해서 독일어로 번역되었고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도의 생애”라는 이름으로 파트모스 출판사에서 1962년 출판되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베르나르도가 저자라고 생각해 왔던 유명한 저서 “황금 서간”은 윌리엄의 고귀한 유산이다. 이는 그가 1114년에 방문하여 깊은 인상을 받았던 몬-듀 카르트우센에 보낸 서간이었다. 윌리엄은 이 저서 안에서 그가 1144년-1146년까지 몬- 듀(하느님의 산(山) 수도원의 수도승들에게 쓴 개인적인 편지를 그리스도교적인 수도승 생활의 이상을 다룬 그의 논문과 연관시킨 것 같다.
윌리엄은 1148년 아니면 1149년에 이니 수도원에서 귀천하였다.
샹-티에르의 윌리엄은 그의 저서 안에서 위대한 신학자로, 무엇보다도 탁월한 영적 스승이며 신비가로 드러난다. 그의 영성은 신앙의 신비 안에 튼튼한 기초를 두고 있고 특히 삼위일체 신비 안에서 그러하다. 그의 신학은 지성을 중심으로 하는 교과서적인 신학이 아니라 실천적인 영성을 목표로 한다. 그는 “수도승 영성”의 유명한 대표자라고 할 수 있다. 그에게 있어 교의로 알려진 진리는 사색거리가 아니라 오히려 믿고, 기도하는 소재이었다. 그의 신학은 영적 생활에 도움이 되기를 원한 것이었다. 그는 분명히 명민한 통찰력을 가진 사람이었고 그러나 그보다 더 그는 큰사랑의 사람이었다.
그는 지성보다는 마음에 더 많이 신뢰한 사람이었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은 지성에 의지하여 얻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중재하여 준다고 믿었다. 그는 라틴어의 sapientia (sapere=음미하다) 즉 지혜를 사랑한 사람이었다.
그는 성서를 달관했고 라틴어뿐만 아니라 그리스어로 교부들의 저서를 읽을 수 있어 정통한 사람이었다. 그의 저서는 서방과 동방 신학을 성공적으로 통합한 것으로서 중세기의 성격을 많이 띠고 있으면서도 그의 생명력 넘치는 특색으로 인해 현대의 독자들에게도 많은 감동을 주고 있다.
Pr. Thomas Kurent O. Cist
(† 19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