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9년 4월의 말씀

가슴에 묻힌 씨가 꽃피리라 

“정

녕 하느님께서는 좋으시도다.”(시편 73)라고 시편 예언자는 노래합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 아름다운 고백은 신앙마저도 잃을 만큼 영혼 안에 고통이 일어나는 원인이 됩니다. 왜 “좋으신 하느님”께서 마음 깨끗한 이들, 올바른 이들이 죽음에까지 내몰리는 절망과 부조리를 보고만 계시는지 예언자는 몸부림치며 울부짖습니다. “정녕 나는 헛되이 마음을 깨끗이 보존하고 결백으로 내 두 손을 씻었단 말인가? 날마다 고통이나 당하고 아침마다 징벌이나 받으려고?” 수도원 길섶, 꼭 그 자리에 봄 풀꽃이 땅을 뚫고 올라옵니다. 그렇듯이 4월이면 “세월”이 흘러도 마르지 않는 깊은 강물같은 아픔이 출렁입니다. 자식을 가슴에 묻은 어머니, 아버지. 다가가 손이라도 잡으면 온 몸에서 눈물이 바람에 마주 선 꽃잎처럼 뚝뚝 떨어집니다. 하느님께서는 침묵하시지만 그 어떤 것도 무의미로 내버려두지는 않으십니다. 더 가난하고 아프고 더 돌봄이 필요한 이들의 마음 속 상처를 어루만지시며 그들을 홀로 버려두지 않으시고 한 사람, 한 사람을 부르십니다. “폭력을 옷 입은 이들” “교만한 이들”이 오히려 잘 사는 암울한 세상, 이에 굴복하지 않고 겨자씨만큼의 작은 희망을 붙잡고 함께 일어서게 하여 주십니다. 억울한 고통과 죽음 앞에 “저는 아니겠지요?”(마르 14,19)라며 외면하지 않고 책임을 나누고자 연대하는 선하고 마음 따뜻한 이들과 진리를 찾는 이들을 모아 주십니다. 그리하여 무죄한 이들의 희생은 하느님과 세상을 더 가깝게 이어주는 길이 됩니다. 그 길은 우리 주 예수님께서 먼저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목격한 세 여인은 성 금요일의 통곡과 어둠을 침묵의 가슴에 묻고, 주간 첫날 매우 이른 아침 해가 떠오를 무렵에 무덤으로 갔습니다(마르 16장). 무덤을 막았던 큰 돌이 이미 굴려져 있습니다. 무덤이 열렸습니다. 세 여인이 바라보는 곳은 절망의 깜깜한 무덤 안이 아닙니다. 전혀 다른 놀랍고도 새로운 빛의 세상이 열렸습니다. 눈부시고 두려워 아직은 보아도 알지 못하지만, 곧 믿고 알게 될 것입니다. “나는 갔다가 그대들에게 돌아옵니다. 내가 그대들을 다시 보게 되면 그대들 마음은 아무도 빼앗지 못할 기쁨으로 충만해질 것입니다.” 시편 예언자는 괴로움의 시간을 인내로 견디며 “하느님의 신비 속으로 파고” 들어갑니다. 마침내 깨달았습니다. “저를 위하여 누가 하늘에 계십니까? 당신과 함께라면 이 세상에서 바랄 것이 없습니다. 제 몸과 제 마음이 스러질지라도 제 마음의 반석, 제 몫은 영원히 하느님이십니다.”(시편 73). 주님께서는 이 행복에로 우리를 매일 초대하십니다. 당신을 만지게 하시고 우리 안으로 친히 들어오십니다. 주님, 당신께서 저희에게 희망하신 대로(pro spere) 이 땅에 당신 번영(prosperity)의 꽃을 피우소서. 저희가 주님의 향기가 되어, 영원에 이르는 생명의 신비를 이 세상에 퍼뜨릴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표지 사진 : 수정 수도원 성당 제대 꽃꽂이 윌리엄 아돌프 부기로 (1825- 1900) <무덤을 찾은 여인들>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9년 3월의 말씀




번갈아 일어남 찾아오심과 찾음

경을 펼치면 온통 인간을 찾으시는 하느님, 하느님을

하느님을 닮지 않은 방에서 빠져 나와

“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계명들로 큰 즐거움을 삼는 이! 그의 의로움은 길이 존속하리라. 올곧은 이들에게는 어둠 속에서 빛이 솟으리라. 그는 너그럽고 자비로우며 의롭다네. 정녕 그는 언제나 흔들리지 않고 의인은 영원한 기억으로 남으리라. 그는 나쁜 소식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 마음은 주님을 굳게 신뢰하네.”(시편 112). 시편 예언자의 이 노래에서 요셉 성인을 기억하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그는 침묵의 사람입니다.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은 채 보편적인 윤리, 도덕, 율법을 훌쩍 뛰어 넘은 사랑의 자리에 영원히 현존합니다. 마치 아브라함이 소돔을 내려다보는 주님 앞에 그대로 서 있듯이(창세 18,22), 낭패와 부조리한 현실을 맞닥뜨리는 우리 앞에 서 있습니다. 나의 판단, 세상의 가치, 내적 욕망을 어떻게 거슬러 저항해야 하는지,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 약자의 생명을 어떻게 보호해야 하는지를 배우라고 초대합니다. 요셉은 “남모르게”(마태 1,19) 마음을 정하였습니다. 어쩌면 의로운 그는 “더러운” 일에 연결되고 쉽지 않았나봅니다. 그러나 세상에 오시어 약한 것을 선택하시는 주님께서 요셉의 꿈에 당신 천사를 보내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전혀 다른 길, 낯선 길을 선택합니다. 외로웠을 것입니다. 호적 등록을 위해 본향 베들레헴에 갔었건만 아는 이는 하나도 없고 몸 누일 여관방조차 얻지 못했습니다(루카 2,1-7). 자기 자신을 넘어(metabasis) 타인의 영역으로 들어가 기꺼이 그들의 보호자가 되어 준 요셉을 하느님께서 친히 성령을 통하여 보호하십니다. “위험에서 너를 구하여 주시리라. 당신 깃으로 너를 덮으시어 네가 그분 날개 밑으로 피신하리라.”(시편 91). 꿈꾸는 능력을 지닌 요셉은 일몰, 밤의 시간에 하느님을 닮지 않은 방에서 빠져나와 하느님을 닮은 길을 걸어갑니다. 창조에 버금가는 능동적인 요셉의 숨은 응답이 없었다면 어머니 마리아와 아직 태중에 계신 우리 주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걱정하지 마라.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라는 주님의 말씀을 신뢰하였기에 자신에게 일어난 독특하며 유일한 일을 진리 뒤편으로 묻어버리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자신에게 요구하시는 소명을 알아듣고 그대로 행하였기에, 하느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위해 필요했던 마지막 “예”의 관문이 되었습니다. 경계를 정하여 소수자와 약자를 배척하며 심지어 혐오하는 이 시대야말로 “요셉”이 필요합니다. 타자를 보호하는 요셉의 자리에 우리가 들어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두렵고 떨리는 일입니다. 그러나 아침이 오면, 주님께서 당신의 천사를 보내시어 “두려워하지 마라.”고 인사를 건네시고, 주님 닮은 길을 따르도록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밤중과 새벽에는 아직도 제법 찬 기운이 남아 있습니다. 늦둥이 매화꽃잎이 허공에 기대어 향기를 뿜어 올리니 순간 하늘이 열리는 듯. 어머니 성모님의 마음에 기대어 함께 정성껏 기도 올립니다. “주 하느님, 저는 당신 뜻 즐겨 이루나이다. 당신 가르침 제 가슴 속에 새겨져 있나이다.”(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 화답송). 표지 사진 : 수정 수도원 큰 밭 매화 지거 쾨더(Sieger Köder, 1925~2015) <베들레헴으로 가는 길>

빈자리 3

  

빈자리 3

 자꾸 자꾸 얇아져자꾸 자꾸 비워져중심이 텅 빈 사람님 마음껏 거닐드넓은 광야껍질만 남은 것처럼 보여도찌르고 쑤실 자리별로 남지 않은 사람이제는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노라고백할 수밖에 없는 사람따뜻함과 설렘 가득한 고백

복녀 마리아 가브리엘라 사게두 Maria Gabriela Sagheddu

Maria Gabriela Sagheddu복녀 마리아 가브리엘라 사게두

Cistercian Witnesses of Our Time

Maria Paula Santachi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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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 차 —————— 네 가지 신新기록유년기활동적인 청년기큰 사랑의 발견하느님의 집그리스도교 일치를 위한 봉헌약속의 대가대축일의 종소리성덕의 광휘연대표   네 가지 신新기록 마리아 가브리엘라 수녀의 시복식이 성벽 밖 성 바오로 대성당에서 1983년 1월 25일 거행되었다. 이방인의 사도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이며 일치기도주간 마지막 날이었다. 시복식 강론에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은 스포츠계에서 사용하는 언어로 힘을 실어 말씀하셨다. “나는 특히 이것을 오늘 젊은이들에게 특별한 방법으로 선포할 수 있게 된 것과 사도께서 교회 신자들에게 권고하신 말씀 ‘여러분도 힘껏 달려서 상을 받도록 하십시오.’(1코린 9,24)를 자신의 모토로 삼고 경기의 레이스 위에서처럼 열정적으로 살았던 젊은 트라피스트 수녀에게 첫 번째로 복녀라는 타이틀을 주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마리아 가브리엘라 수녀는 아주 짧은 몇 년 사이에 거룩함의 스타디온에서 모든 위대한 참피언들이 부러워하는 신기록을 획득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실제로 역사적인 관점에서만 보아도 가브리엘라는 ‘가톨릭 여성 운동’ 구성원 중에서 나온 첫 번째 복녀이며, 사르디니아(Sardinia) 출신 남녀 청소년들 가운데서 나온 첫 번째 복녀이며, 남녀 트라피스트 수도자들 가운데서 교회일치를 위해서 일한 첫 번째 복자입니다. 이것들은 위대한 사부 성 베네딕도께서 유산으로 주신 하느님을 섬기는 학원이 가져다 준 네 가지 신기록입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학원에서 배운 영적 생활의 이 방법은 15세기가 지난 오늘 우리에게도 대단히 가치 있는 일입니다, 만일 사랑의 정신으로 현명하게 그 가르침을 받아들여 성덕의 모범으로 삼기만 한다면.”복녀 마리아 가브리엘라는 누구인가?그녀는 사르디니아 소녀였다. 로마 근교 그로타페라타(Grottaferrata)의 트라피스트 수도원에서 1939년 25살로 귀천한 수도자였다. 많은 젊은 남녀가 그러했듯이 마리아도 하느님께 애정을 다해 그녀의 전생애를 바치라는 절대적인 부르심을 들었다. 그래서 그녀는 가난하고 세상에서 숨겨진 수도원에 입회하여 3년 반 동안 기도와 고행으로 살았고, 결국 폐결핵으로 그녀의 강건한 육신이 무너져 그로 인해 귀천하였다. 오직 하나, 그녀가 자유로이 처리할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생명이었고, 그녀는 분열된 그리스도교의 참회를 위해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가시적인 일치를 위해서 바치기로 했다. 그녀의 극히 짧은 생애동안 어떤 자기연민도 없이 완전한 자기 증여의 삶, 후회 없는 삶을 살았다. 결코 뒤를 돌아봄도 없었고, 자신 안에 매이지도 않았다. 외부에서 볼 때 그녀의 생애는 시시한 것처럼 보인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방법으로 1930년 초반, 그리스도인 일치 운동을 그녀가 알기를 원하셨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는 그의 회칙 “Ut unum sint(하나 되게 하소서) 1995년 5월 25일)”에서 가브리엘라를 그리스도교 일치 운동의 영적 모범으로 선포하셨다.유년기마리아 사게두는 1914년 3월 7일, 제일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때 태어났으며 1939년 4월 23일 제이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기 직전에 귀천했다. 그녀의 고향은 도르갈리(Dorgali), 사르디니아섬 동쪽에 위치한 누오로(Nuoro) 지방의 큰 촌락이었다. 윤택한 가정, 사르디니아 혈통의 전통 있는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들은 토지를 많이 소유하고 있었고 가축을 사육하면서 겸허하고 평화로운 생활을 했다. 마리아는 팔남매 중 다섯 번째였다. 형제들 가운데서 네 명은 그들이 아직 어렸을 때 죽었다. 마리아는 총명했고 용모도 아름다웠으며 쾌활하고 자만심이 강한 소녀로 성장했다.1919년 아버지의 사망과 함께 가족의 생활은 경제적으로 유지하기 어려운 전환기를 맞게 되었다. 모든 것은 점점 더 어려워졌다. 그러나 쾌활하고 신심 깊은 미망인은 매일 미사에 참여하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거지들을 배고프게 돌려보낸 적이 없었다. 그녀는 용감하게 일가족의 주도권을 가지고 어려움을 헤쳐 나갔다. 아버지와의 사별과 작은 형제들의 죽음은 분명히 마리아에게 고통이었을 것이다. 사르드니아 주민의 멘탈리티의 고유성이라고 할 수 있는 신중함은 누구보다 민감한 작은 마리아를 침묵 속에서 살게 했고 그것은 어려운 시기를 극복하는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마리아는 감수성이 예민한데다 많은 애정을 필요로 하는 시기에 있었다. 그녀는 고집이 세고 결코 만족할 줄 몰랐으며 어머니에게조차 마음을 열지 않았다. 어떤 때는 무례하다고 느낄 정도로 말대답을 서슴지 않고 했다. 인형과 노는 것은 관심 밖의 일이었다. 어머니가 머리를 빗겨줄라치면 소리소리 질렀다. 흥미 있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그것은 교구에서 시복조사를 할 때 그녀의 사촌이 한 이야기이다. 그 때 마리아는 네 살이거나 다섯 살이었다. 얼마나 고집이 센 아이였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스토리다. 한 번은 외양간에서 일하고 있던 그녀의 어머니가 마리아에게 벗긴 감자 껍질 쓰레기를 버려달라고 바구니를 주었다. 마리아는 가기 싫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래도 마지못해 가기는 갔지만, 약 반 시간 후 그 껍질을 앞치마에 도로 싸가지고 와서는 어머니 발치에다 내동댕이쳤다는 스토리다.이 작은 소녀 마리아가 일곱 살이 되었을 때 한 번은 꿈을 꾸었다. 그녀는 어떤 교회 안에 있었다. 예수님께서 제단에서 내려오시더니 양팔을 벌리고 그녀에게 다가오시자 그녀는 자기는 그럴만한 가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울부짖으며 ‘아니오! 아니오! 나는 죄인이예요!’하며 도망쳤다. 성모 마리아께서 작은 소녀를 끌어안으려고 따라갔으나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 그리고 잠에서 깨어났다.그녀의 어머니는 딸을 교육시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는지를 기억하면서도 아주 현명하게 이렇게 설명했다. “마리아가 어렸을 때는 집에서 제멋대로 하고 싶어 했고 거만하고 모든 것을 휘어잡으려는 것처럼 보였어요. 그런데 그녀에게 분별력이 형성되면서 품행도 단정해지고 유순하고 겸손한 아이로 변화되어가기 시작했어요.”활동적인 청년기그러나 온유와 겸손에로의 길은 아직 먼 길이었다. 기민하고 총명한 마리아는 학교에서 최고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수학은 학급에서도 수석이었다. 간혹 선생님이  틀리거나 잘못할 경우에도 주저함 없이 대항했다. 마리아는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가 있으면 그녀의 방에 틀어박혀 세 시간이고 네 시간이고 문제의 해답을 찾을 때까지 작업했다. 학교 친구들은 그녀를 좋아했다. 그녀는 그들을 돕기 위해서 자기 숙제를 복사해 주기도 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그녀는 집안을 돕기 위해서 학업을 계속할 수 없게 되었다. 이것은 마리아처럼 지적인 사람에게 말할 수 없는 슬픔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한 번도 그런 내색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늘 신중하고 책임감이 남달랐다. 집안 형편은 가난했으나 큰 문제는 없었다. 이런 상황을 단순하게 받아들였다. 무엇이든지 가족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거리를 찾아서 했다. 집안 살림의 잡다한 일들, 세탁할 물을 시냇가에서 길어 와서 세탁을 한다든지 밤중에 일어나 빵을 굽는다든지 원산지를 찾아가서 아마와 과일을 모아들이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짧은 기간이지만 어떤 집 가정부로 일하기도 했다. 마리아는 언제나 좋은 친구가 되어주었고, 이웃들의 필요에 따라 아픈 이들을 돌보는 일에도 정성을 기울였다. 증인들은 하나같이 그녀가 지닌 천부적인 풍요로움과 다양한 면들을 여러 각도에서 묘사했다. 분명히 그녀는 강한 개성을 가졌다. 그러나 주제넘지 않았고 야심이 없었다. 판단력은 바르고 성실했으며 객관성을 지녔고, 정의에 대한 뛰어난 감각을 가졌다. 안정되고 균형 잡힌 인품이었다. 순결에 있어서는 엄격하리만큼 사려 깊었다. 또한 불경한 그림을 아름답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아연실색하여, 불경하다는 말을 해주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나 뛰어난 판단력과 정신력의 소유자였던 그녀는 자신이 비판받았을 때는 고집스러움과 다투기를  잘하는 성격 때문에 불평하면서 마지못해 순명했다. 인내심이 없고 격동적인데다가 만족을 몰랐다. 그녀의 친구 막달레나가 입은 새 브라우스를 혹평했을 때 그녀의 어머니는 딸에게 “마리아가 그것을 좋아하리라고 기대하지 마라.” 라고 말해줄 정도였다.청년기에 들어가면서 그녀의 완고하고 분노로 폭발하는 면도 점차 변해갔다. 서서히 사려 깊고 감수성이 예민한 처녀로 변화했으나 타고난 내성적인 성격으로 인해서 그리 쉽게 마음을 열지는 않았다. 춤을 추러 간다든지 파티에 가는 것도 그다지 원하지 않았다. 그녀의 유일한 기분전환은 카드놀이, 복권을 뽑는 일, 아니면 그의 사촌이 교구 도서관에서 빌려다주는 소설책을 읽는 것이 고작이었다. 마리아는 카드놀이를 할 때 자신이 속이거나 다른 사람이 그런 일을 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물론 그녀는 늘 이기기를 원했다. 소설을 읽을 때는 타고난 건전한 판단력으로 식별했고 센티멘탈리즘이나 로맨틱한 백일몽에 빠지는 일도 없었다. 그러나 독서삼매에 빠져 있을 때는 교회에 가서 일요일 저녁기도 바치는 것을 거절하기도 했다. 그녀의 어머니가 같이 가자고 물었을 때 그녀는 그것이 필요하지 않으니 어머니나 가라고 대답했다. 신심 깊은 어머니에게 이것은 상당히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마리아는 종교적인 신심예절에는 곧잘 빠졌다. 일요일에 미사참례하는 것으로 한정지었던 것 같다. 가톨릭 운동에 가입하라고 몇 번이나 권했지만 “가톨릭 운동은 존중하지만!”이라고 대답할 뿐이었다. 어머니는 이런 그녀의 태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마리아는 약속한 것은 꼭 지켜야하는데 자신은 그것을 하기에 합당치 않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고.그녀는 아름다운 처녀로 성장해갔다. 날씬한 체형과 총명하게 빛나는 눈, 그 지방의 관습에 어울리는 헤어스타일, 왕관처럼 머리위로 틀어 올린 풍만한 검은 머리채, 부지런했으며, 말수가 적고 정숙했으며 사치스럽거나 무절제하지 않았다. 그녀의 고집스런 성격은 특히 집안에서 가족들에게 드러냈다. 그 지방의 청년들이 마리아와 결혼하고 싶어 했던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마리아는 첫 청혼을 거절했다. 두 번째 청혼은 조금 망설이는 것 같았으나 결국 그것도 거절했다. 이 일은 그녀의 어머니를 대단히 언짢게 해드렸던 것 같다.큰 사랑의 발견1932년, 그녀가 사랑하던 여동생 요한나 안토니아가 사망했다. 마리아보다 한 살 적은 17세였다. 이 동생의 죽음이 젊은 처녀인 마리아에게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 오지 않았을까? 아마 그랬을지도 모른다,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녀의 회심은 청년기를 통과하면서 이미 그녀 안에서 서서히 시작되었음을 볼 수 있다. 많은 증인들은 마리아가 18살이었을 때 사랑이신 분을 만났으며, 그분 자신을 위해서 그녀를 기다리고 계셨던 하느님을 만났다고 하나같이 말하였다. 그의 어머니가 묘사한 거친 기질이 눈에 띄게 달라졌다. “사람을 그리스도 신자로 만드는 것은 윤리적인 선택이나 고결한 이상이 아니라 어떤 사건이나 인격체와의 만남이다. 이 만남이 인생에 새로운 전망을 열어주고 결정적인 방향제시를 해준다.”(교황 베네딕도 16세의 회칙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마리아는 이 만남이 어떻게 일어났는지에 대해 언급한 적이 없다. 언급할 필요가 없었다. 하느님과의 관계는 가장 중대한 일이며 인간 존재 안에 실재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가장 신비스럽고 감동적인 모험이지만 마리아의 경우, 이것은 하느님과 마리아의 비밀이었다. 어쨌든지 결과는 명백히 드러났다. 그녀가 가톨릭 액션에 가입한 것이다. 자발적으로 가톨릭 교리를 가르쳤고, 긴 시간을 성당에서 기도하게 되었고, 다른 사람과 점잖고 예의바르게 교제할 줄도 알게 된 것이다. 성소에 대한 생각도 차차 분명해졌다. 마리아는 기다렸다. 아주 단순한 논리 때문이었다. 그녀의 생각에 일단 수도원에 들어가면 성인이 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결점을 없애버린 후에야 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놀라운 의지로 수개월 사이에 그녀의 성급함, 화를 잘 내는 성향, 다투기 좋아하는 성벽, 자신 안에 있는 부정적인 것들을 고쳐나갔다. 실제로 마리아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은총의 힘으로 이 작업을 해왔던 것이다.마리아는 보좌신부인 동 바실리오 멜로니(Don Basillio Meloni)의 조언을 청했다. 동 멜로니는 트라피스트 수도원에 입회할 것을 제안했다. 그녀는 신부에게 “당신이 원하시는 곳으로 저를 보내주십시오.”라고 승낙하는 대답을 했다. 이 일에 대해서 그녀는 어머니에게 미리 말씀드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동 멜로니께서 어머니에게 알려드릴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미리 알리지 않았다는 호된 질책과 소동이 한바탕 일어나기는 했지만 가족들은 마리아의 소명을 받아들이고 기뻐했으나 그녀의 오빠 살바도르만은 크게 반대했다. 그는 교회에도 나가지 않았고, 여동생이 수도원에 들어간다는 것은 가족에게 불명예스러운 일로 간주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동생에게 나누어주게 될 유산을 여행비자금 형태로 500리라 마련해 주었다. 마리아는 행복한 마음으로 집을 떠나면서 어머니에게 “어머니, 왜 우십니까? 어머니께서 우시면, 어머니는 수녀 딸을 가질 자격이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떠나거라. 하느님께서 너를 축복해 주시기를.”라고 말했다.이렇게 헤어진 어머니와 딸은 이 지상에서 다시 만나지 못했다.하느님의 집1935년 9월 30일, 성녀 소화 데레사의 기일을 기념하는 날, 마리아 사게두는 그로타페라타(Grottaferrata) 트라피스트 수도원에 입회하여 자신을 봉헌하였다. 그녀는 21살이었다. 마리아와 대원장이 만나게 되었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서 참으로 깊은 인상을 받았으며, 그것을 오래 간직하였다. 대원장은 그 날 그녀와의 만남에 대해 회상록에 기록하였다. “마리아는 단순하고 품위가 있었다. 그녀의 큰 눈은 순수함으로 그윽했고, 하느님의 집과 수도생활의 신비 앞에 경탄하고 있었다.” 이렇게 대원장은 자신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새 딸의 비범한 기억력, 총명함, 깊은 지성, 평온하고 균형 잡힌 태도를 알아보았다. 원장은 마리아를 가대 수도자로 받아들였다, 마리아는 라틴어도 모르고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진 것도 아니었으며 그녀에게 지참금을 대줄만한 은인을 찾는 수완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이때부터 마리아는 그녀의 이름에 가브리엘라라는 이름을 더 받았다. 하느님께서 당신 것으로 삼고자 선택해 주셨음에 무한한 감사를 느끼며 완전히 자신을 봉헌했다. 동시에 그녀는 두려움을 느꼈다. 그녀의 유일한 걱정거리는 자기 자신 때문이 아니라 가족과 집을 더 사랑하기 때문에 혹시나 수도원에서 내보내지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었다. “만일 이들이 나를 내보낸다면, 나는 밤을 틈타서 모험을 할 것이다. 나는 봉쇄구역의 수비가 느슨한 날, 담을 뛰어넘어서라도 다시 돌아올 것이다.”그녀는 수도원적 금욕생활을 사랑과 기쁨으로 받아들였다. 그 안에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긍정적인 장점들을 발전시키면서 성장해갔다. 그녀는 점점 더 온화하고 분별력 있고 겸손한 사람으로 변모되어 갔다.수도생활 첫 해, 그녀가 어머니에게 쓴 편지를 읽어보면 그녀가 얼마나 수도생활의 소명 안으로 깊이 성장해 들어가고 있으며 온화함과 감사하는 마음, 기쁨이 더해가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수련장이 이 젊은 수련자에 대해서 기록한 것은 그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가브리엘라 수녀는 수도생활에 대한 아주 높은 이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하느님과 더 신속하게 합일을 이루는데 도움이 되는 것은 어떤 것이라도 할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믿음과 희망에 크게 진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건조함 속에서 살아야할 운명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녀의 사랑과 자비심은 온 공동체로 하여금 그녀에게 호감을 가지게 하였습니다. 마리아 가브리엘라는 면담 때 ‘나는 나의 의지를 포기하는 프로그램 외에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라고 자신에 대해서 말했습니다.”마리아 가브리엘라는 1937년 10월 31일에 서원했는데 이 날은 특별히 그리스도왕 대축일을 성대하게 거행했던 해였다. 이 날 그녀는 “저는 단순한 마음으로 모든 것을 기쁘게 당신께 바칩니다.” 라고 기도했다. 이 기도는 아주 단순하고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열렬한 기도였다. 그 다음 날, 그녀는 어머니에게 편지를 썼다. “이제 하느님의 집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 저에게 확실해졌습니다. 저는 말할 수 없이 행복합니다.” 그 후 그녀 자신의 봉헌은 더욱 완전한 것이 되었다. 이미 그녀의 성격은 균형 잡혀가고 있었고, 하느님께로부터 어린이와 같은 마음을 지닌 사람, 마음이 가난한 사람에게 약속하신 하느님의 나라와 지혜를 받았다. 이것은 십자가의 지혜이다. “이제 저는 서원자입니다, 주님! 무엇이든지 당신이  뜻하시는 대로 하십시오. 제가 죽기를 원하신다면, 병을 앓게 되거나, 폐결핵에 걸리는 것까지도 -저의 가족 중에는 이런 병에 걸렸던 사람이 없습니다만-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 저는 각오하고 있습니다.”그리스도교 일치를 위한 봉헌그 후 마리아 가브리엘라 수녀는 초자연적 영감을 받아 그리스도교 일치를 위해서 자기 자신과 자기 생명을 바치게 된다. 좀 더 상세하게 그 배경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1937년 1월, 트라피스트 수도원에 처음으로 그리스도교 일치를 위한 기도주간에 관한 소책자가 송달되었다. 일치의 위대한 사도이신 리용의 파울 쿠투리에(Paul Couturier) 신부가 보낸 것이었다. 그는 수녀들에게 끊임없는 희망에 찬 기도를 요청했다. 그의 유일한 목표는 “하느님이 원하셨던, 그리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으로 그리스도교의 일치가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수도원장은 신부의 소책자를 공동체에게 낭독해 주었다. 최연장자였던 마더 임마꿀라타가 즉시 원장 앞으로 나가 전에 없던 반짝이는 눈빛으로 말하는 것이었다. “이 부르심은 저를 위한 것입니다. 당신이 허락만 해주신다면 남은 여생을 희생으로 바치겠습니다.” 그녀의 봉헌은 받아들여졌으며 일 개월 후, 마더 임마꿀라타는 중풍으로 쓰러졌다. 5일 동안 병고를 겪은 후 귀천했다.수도원장은 최연장 수녀의 이 귀천에 대해서 다른 수녀들에게도 알렸고, 쿠투리에  신부에게도 상세히 보고했다. 쿠투리에 신부는 그의 영국인 친구, 네쉬돔 수도원의 수련장에게 마더 피아의 편지를 보내어 이 사실을 알렸다. 이렇게 해서 성공회 수도자와 그로타페라타 수도원 간의 오랜 형제적 영적 우정이 시작된 것이다.1938년 1월, ‘교회 일치의 기도 주간’에 새로운 소책자가 보내졌고, 기도 요청이 들어왔다. 그 안에는 성공회, 프로테스탄트, 가톨릭교회에서 자신의 생명을 봉헌한 사람들이 기록되어 있었다. 트라피스트 수도원에서 두 명의 봉헌자가 기록되어 있었는데 한 사람은 1937년 4월 일본 트라피스트 수도원에서 귀천한 수도승이었고, 다른 사람은 분명히 이탈리아 수도원의 마더 임마꿀라타였다.그 때 마리아 가브리엘라 수녀는 조용히 그분의 발자취를 따르며 발걸음을 내딛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였다. “저의 생명을 바칠 수 있게 해주십시오, 만일 그것이 어떤 가치가 있다고 여기신다면. 저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저는 결코 한 번도 어떤 것이었던 적이 없습니다. 당신께서는 청하면 들어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후 그녀는 주님께서 이 청원을 들어주시어 그녀에게 원하시는 것처럼 느꼈다. 이 일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할 때마저도 주님께서는 그것을 원하시는 것 같았다. 수도원장에게 그녀가 말했다. “제가 자신을 봉헌한 그 날부터 줄곧 저의 몸상태가 좋지 않았습니다. 매일 원인도 모를 통증이 있었고 왠지 상태가 좋지 않아 희생을 바쳐야만 했습니다.”15개월 동안 그녀는 하느님의 사랑으로부터 버려진 것 같은 영혼의 고통을 체험한다.“주님, 제가 오늘 죽는다 해도 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겠습니다.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주님께 연옥에 오래 머물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라고 제안하는 사람들에게 마리아는 대답했다. “저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주님 앞에 나아가 무슨 말을 하게 된다면 저는 이렇게 말씀 드리겠습니다:당신이 원하시는 곳에 저를 두십시오. 만일 제가 지옥에서 당신께 영광을 드릴 수 있다면 저는 그곳으로 가겠습니다. 무엇이든지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저는 오직 주님의 자비에 저의 약함을 맡겨드리겠습니다.’라고.”그리스도교의 일치를 위해서 그녀의 생명을 봉헌한다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마리아 가브리엘라 수녀는 그리스도인의 분열에 관해서, 차이 때문에 자주 서로 대립하고 있는 것에 관해서 모르고 있었다. 그녀 세대에 이런 일이 일어난 것도 아니고, 이런 진부한 일들이 보편적으로 일어난 것도 아니었다. 예를 들면 프로테스탄트는 성모님을 존경하지 않는다든지, 그리스 정교회는 교황을 인정하지 않는다든지 등등. 마리아 가브리엘라가 태어나 살던 곳에서 그녀는 타종교에 속한 사람들을 보았거나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다. 그녀는 오직 주님만을 열렬히 사랑했다. 만일 주님께서 하느님의 흩어진 자녀들을 한데 모으기 위해서(요한 11,52) 돌아가셨다면, 그것은 그녀에게도 그분의 십자가 희생을 나눠지라는 사랑의 명령임으로, 그것만이 유일하게 필요한 것이었다. 마리아의 순수한 영혼에게는 오직 수도원장이 가진 교회 일치에 대한 열정과 이미 다른 사람들이 교회 일치를 위해서 생명을 봉헌했다는 사실만으로  ‘제가 여기 있습니다.’라는 대답을 하기에 충분했다. 그녀는 걱정과 염려의 마음을 제켜놓고 자신을 완전히 사랑하는 분께 바치려는 결심을 굳혔다. “이것이 제가 가야 할 길입니다. 저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희생을 보았고, 저 역시 그렇게 하겠습니다. 제가 집에 있을 때 어떤 영웅들의 자서전에서 영웅적인 서약을 따르는 내용의 책을 읽으면 저 역시 그렇게 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성격이었습니다. 예수님, 제가 여기 있지 않습니까, 지체 없이 따르겠습니다.”마리아의 유일한 희망은 사르디니아의 여성들이 그렇듯이, 남편과 가족을 깊이 사랑하고, 열정을 다하고, 관대함과 구체적인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이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고통을 겪는다면, 그는 고통 받고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수련기 동안 저는 오직 사랑, 사랑, 더 더, 항상 더 사랑하고 싶은 마음뿐이었습니다. 사랑을 사는 사람만이 사랑에 죽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생명이 끝날 때 얻을 수 있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이기 때문입니다.”죽기 얼마 전, 수도원장이 그녀를 질책했을 때, 그녀로부터 받은 강한 인상이 기억난다. 마리아가 성무일도 전례봉사자로서 선창을 해야 했다. 그녀가 초대송을 불렀다. 자신에게는 음악적 소질이 전혀 없다고 믿고 있던 그녀는 자기가 노래를 틀리게 불렀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마더 피아가 아무리 격려의 말을 해주어도 믿지 않고 부인하는 것이었다. 이 일은 수도원장에게 결국 이런 말을 하게끔 만들었다. “좋습니다. 그렇게 생각하십시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예수님을 슬프게 해드리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그녀의 반응이다. “오, 예수님을 슬프게 해드린다고요? 그것은 참으로 끔찍한 일입니다. 당신은 작업분배를 하셔야 하니까, 당신이 다시 저에게 돌아오실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당신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 그런데 저는 해야 할 의무를 다했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예수님을 슬프게 해드리겠습니까? 오, 아닙니다. …”약속의 대가代價“저는 자신을 예수님께 완전히 바쳤습니다. 저의 약속을 철회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물론 저는 약한 사람입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만, 저의 약함과 고통의 원인을 아시는 주님께서 저를 용서해주시리라고 확신합니다.”(병원에서 마더 피아에게 보낸 편지 1938년 4월 28일).“이곳에서의 처음 며칠은 굉장히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어제 저녁, 제 마음에 큰 힘이 생겨남을 느꼈습니다. 저는 다시 한 번 하느님의 뜻에 저를 완전히 넘겨드렸습니다. 그분의 영광을 위해서 희생을 바치고, 저의 병으로 인해서 자매들이 위험에 처하는 일이 없도록 고통을 기꺼이 받겠습니다. 저의 희생이 얼마나 철저하고 완전한 것이 될지 모르지만 저는 당신을 안심시켜 드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저는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을 위해서, 저의 기대와 갈망, 좋은 것과 언짢은 것들 안에서 저의 의지를 포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처음 며칠간 여기서 저는 제 자신에 대해서 확신을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저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크고 위대한 희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완전한 희생물로 바치는 것이 위대함을 배웠습니다. 저를 위해서 기도해주십시오. 저를 포함하여 다른 모든 사람들이 나날이 더욱 더 십자가의 위대한 은총을 알게 되기를 … 주님께서는 벌거벗겨진 채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저를 끌어안으십니다. 하느님의 뜻이 온전히 제 안에서 이루어지도록 고통을 감내하는 것 외에 다른 위로는 없습니다.”(병원에서 마더 피아에게 보낸 편지. 1938년 5월 3일)“ … 사랑하는 어머니! 원장님을 통해서 받은 어머니의 편지를 읽고 매우 기뻤습니다. 당신의 마음이 저의 마지막 희생을 보시면서도 그것을 거부하지 않으시리라 믿습니다. 사실 인간의 본성은 위로를 받거나 눈물을 흘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처음 며칠을 지내고 나니 모든 것을 예수님의 성심 안으로 던져버릴 수 있었습니다. 이 성심은 타는 불길처럼 모든 것을 태워버립니다. 제 건강 회복에 관해서 어머니께 헛된 희망을 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지만 나아지기는커녕 이전보다 악화되는 것 같습니다. 어머니께서 저 때문에 걱정하신다거나 저의 쾌유를 위해 기도하시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오직 주님께서 그분의 큰 영광을 위해서 하실 수 있는 것을 제 안에서 하시라고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예수님의 사랑을 위해서 무엇인가 희생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기뻐하고 있습니다. 진짜 혼인잔치가 머지않았다는 것을 의식할 때마다 저의 기쁨은 더욱 커집니다. 당신도 아시다시피 주님께서는 항상 특별한 은총을 저에게 주고 싶어 하셨습니다. 지금 그분은 저에게 이 병과 함께 모든 것을, 최상의 은혜를 주고 계십니다. 저는 주님의 손 안에 완전히 저를 맡겨드렸고, 이렇게 최상의 은총도 받아 누리고 있습니다. 저의 신랑을 온 마음으로 사랑하며 또 사랑하면 할수록 더 사랑하고 싶어집니다. 그분을 사랑하지 않고 모욕하고 심장을 꿰뚫은 그 사람들이 못다 한 사랑까지도 제가 모두 사랑해 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원하는 것을 전부 통틀어 한 마디로 말씀드린다면 오직 하나, 사랑하는 것입니다.”(1939년 6월 6일 어머니께 보낸 편지)죽기 전날 저녁“가능하다면 영성체를! 가능하다면 …”“더 오래 살 것 같지 않아요. …”“일치를 위해서 남은 생명을 봉헌하시겠습니까?”“예!”마리아 가브리엘라는 죽는 마지막 날까지 은세공주수도자, 그리고 은둔자로 신앙의 암흑 속에서 살았다.“지나간 일들을 생각해 보면, 내 삶의 모든 날들은 내가 원하는 것을 포기하는 순간순간의 반복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분께 사랑한다고 말할 때조차 마음속에는 아무 느낌도 없었습니다. … 우리에게는 특별한 은사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 우리가 똑같은 곳에 도달하게 되리라는 확신입니다. … 최후의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는 어둠속에 머물러야 합니다.”대축일 종소리죽기 직전, 마리아 가브리엘라 수녀는 작은 종이쪽지에 연필로 겨우 읽을 수 있는 기도문을 적었다. “주 예수님, 저의 형제시여, 저의 정배시여. 전 세계에서 바쳐지는 모든 미사성제 안에서 카리스와 호스티아 안에서 당신과 결합하여 봉헌할 수 있게 하여 주시기를 간청합니다. 제가 당신의 큰 영광을 위한 번제물이 되게 하여 주십시오. 엄위하신 당신 대전에 바쳐드리고 싶습니다. 예수님, 제가 당신께 영광이 되게 하여주시고, 당신은 영원히 제 안에서 영광 받으소서!”그녀는 수도원장에게 말했다. “주님께서 오시어 저를 파스카의 어린양처럼 데려가실 것입니다.”부활 제 3주일 복음에서 착한 목자께서 양들을 한 우리 안으로 모으시면서 ‘모두 하나 되기를 원하시고’ 그들을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신 것처럼 마리아 가브리엘라는 숨을 거두었다. 그녀의 나이 25살 1개월이었다. 그녀의 마지막 행위와 마지막 말은 그녀의 전 생애를 통틀어 표현한 말이다: 감사, 용서, 일치를 위해서 생명을 봉헌한 변함없는 ‘예’였다.1939년 4월 23일 17시 30분, 수녀원에서 마리아 가브리엘라 수녀의 임종을 알리는 종을 연타로 치려할 때, 근교의 성당에서 착한 목자 주일 제1저녁기도 아니면 성체강복을 알리는 종을 치는 바람에 두 종이 함께 어우러져 울려 퍼져서 대축일의 종소리가 되었다.성덕의 광휘관은 닫혔고, 이 작은 수녀의 이야기는 잊혀져갔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다른 계획을 가지고 계셨다. 이 선택받은 영혼에게 매력을 느끼고 경청하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지난 날, 가난과 속죄의 냄새로 가득하던 수도원이 아니라, 이제는 좋은 향기를 느낄 수 있게 된 것이다. 마리아 가브리엘라 수녀의 귀천 후 일어나는 현상들에 대해서 수도원장은 우려되는 면을 생각하여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고 세심함과 엄격한 명령으로 거듭 제재하고 숨기려 했으나 소용없는 일이었다. …마리아 가브리엘라 수녀의 전기가 소책자로 발행되자 순식간에 다른 여섯 가지의 책자도 출판되었다.다른 종파 형제들이 방문하기 시작했고 ‘작은 수녀’의 명성은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처음에 시복식조사를 거부했던 수도원 사제는 후에 그 조사를 위한 열렬한 지지자, 첫 청원인이 되어주었다. 그로타페라타의 작은 트라피스트 수도원은 새 지원자들을 모두 받아들이기에 너무 좁아서 확장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래서 빅토르키아노로 이전하였다. 그 후 여섯 개의 새 공동체를 창립하기에 이르렀다. 시복식이 있은 후, 마리아 가브리엘라의 유해는 수도원에 근접한 예배소에 안치했으며 가톨릭교회에 속한 사람들만이 아니라 타종교에 속한 이들도 그곳에 기도하러 올 수 있도록 하였다.1995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회칙 “Ut unum sint(하나되게 하소서)”가 공포되었다. 그 회칙 27번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일치를 위한 기도는 그리스도교가 분열된 상황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의 깊은 친교와 대화는 주님께 드리는 기도를 통해 유지되어야 하고, 그것은 일치와 관계가 없을 수 없습니다. 사실 오직 이 길을 통해서만 일치는 우리 생활의 일부가 되고, 교회 안에서 우리의 의무를 다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이 의무를 다한 한 모델, 엄률 시토 수도회의 수도자 마리아 가브리엘라를 가톨릭교회의 신자 여러분에게 추천하며 그녀가 일치의 모델이었음을 다시 한 번 선언합니다. 나는 그녀를 1983년 1월 25일에 복자로 선언하였습니다. 마리아 가브리엘라 수녀는 세상으로부터의 이탈과 요한복음 17장에 따라 기도와 관상 안에서 충실한 삶을 살았으며, 자신의 생명을 온전히 그리스도교 일치를 위해서 바쳤습니다.이것이야말로 모든 기도의 초석입니다. 성령 안에서 성자를 통해서 성부께 자신을 남김없이, 조건없이 바치는 것. 마리아 가브리엘라 수녀의 모범은 그리스도교의 일치를 위하여 기도할 때 특정한 시간, 장소, 환경에 제한 받지 않음을 가르쳐주었고, 그것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아버지께 드리는 그리스도의 기도는 언제나 어디서나 모든 사람의 모범이 됩니다.”연대기 ——————1914년 3월 17일  사르디니아의 도르갈리에서 출생3월 22일  성녀 카타리나 대성당에서 세례1924년 3월 29일  첫영성체1931년 5월 31일  견진1932년-1933년    여동생 요한나 안토니아의 사망 후 완전한 회심1935년 9월 30일  그로타페라타의 트라피스트 수도원에 도착1935년 10월 5일  지원자로 수도원 입회1936년 4월 13일  수련착복1937년 10월 31일  첫 서원1938년 4월 18일 – 5월 29일  로마에 있는 성 요한 병원에 40일간 입원1939년 4월 23일  그로타페라타 수도원 병동에서 사망1983년 1월 25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시복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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