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7년 8월의 말씀

공동체의 자유

한 몸 속의 빛과 어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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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의 빈자리가 생겨난 공동체, 숨구멍이 있는 공동체, 화해의 삶을 살아가려는 이가 많은 공동체, 화해가 어려워도 끝까지 그 길을 가기를 포기하지 않는 이가 많은 공동체 ! 우리가 가고자 하는 길입니다. 이런 공동체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자유는 화해와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과 화해하지 못해 자신에 묶여있고, 가족과 화해하지 못해 가족에 묶여있고, 이웃과 화해하지 못해 이웃에 묶여있고, 세상과 화해하지 못해 세상에 묶여있는 이를 우리는 자유인이라 부르는 일이 결코 없으니까요.

반대로 자신과 화해하여 자신에게 자유롭고 가족과 화해하여 가족과 자유롭고 이웃과 화해하여 이웃과 자유로운 이는 자신이 머무는 자리의 빈자리, 숨구멍과 같습니다. 악이 스며든다 하여 칼을 휘두르기보다 그 악마저 안을 수 있는 길, 머나먼 길을 찾기를 원하기에 악과 선으로 대립시키는 분열을 일으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악은 피할 길도 없음을 자유로운 이는 통찰하고 있습니다. 이 악을 피하면 저 악이 그 자리를 차지합니다.

이 작품은 제 개인의 견해로는 샤갈의 천재성이 가장 걸출하게 드러나는 그림이라고 생각합니다. 모세가 파라오와 여러 차례 맞장을 뜬 뒤 드디어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홍해바다를 건너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모세의 몸이 구름 기둥으로 반 나뉘어 있고 몸 위쪽은 이스라엘 백성 아래 쪽은 이집트 파라오의 군사들입니다. 성서에는 파라오의 군사들이 그 병거와 함께 홍해 바다에서 밀려오는 파도에 휩쓸려 전멸하는 것으로 나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승리의 노래를 부릅니다. 이미 예전부터 유대교 랍비들이 이 부분을 하늘에서 천사들이 파라오의 군대를 위해 울었다고 해석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샤갈처럼 모세의 한 몸 속에 이스라엘 백성과 이집트 백성이 함께 있었다고 한 이는 없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자유입니다. 이스라엘을 이스라엘로, 이집트를 이집트로 보되 한쪽만을 택하여 내 편으로 아끼고 다른 편을 틀린 것으로 단정하여 멀리하지 않고 자신 안에 함께 품는 일입니다. 이것은 공동체 삶을 살아가는 수도원에서는 참으로 현실적인 문제입니다. 틀림과 다름은 결코 인간이 결정적으로 판단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여기에는 사실 큰 내려놓음이 수반되기에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나와 가깝고 유사한 사람들을 내편으로 삼을 때 인간은 안심할 수 있고, 지지받는 느낌을 지닐 수 있으며, 그 그룹으로부터 오는 도움과 혜택도 큽니다. 그러나 이쪽 저쪽 모두를 품으려 할 때 어느 편에도 속할 수 없어 고독한 입장이 되기 쉽습니다. 사람들이 처음 모이면 며칠 지나지 않아 이런 편 가르기가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샤갈은 한 몸속에 이것과 저것, 이 사람들과 저 사람들을 품으라 하며,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의 근원도 그는 밝혀줍니다. 한 그림 속에 다른 장면을 그렸는데, 불타는 가시덤불에서 “나는 나다.”라는 야훼 하느님의 자기 드러냄 앞에 있는 모세를 동시에 그리고 있습니다. 자유의 원천은 이것입니다. 나는 나이지 어느 것에도 속하지 않는 유일한 분, 생명의 원천, 그분에게서만 우리는 이 자유의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 자유를 통찰하였다 하여도 우리 스스로는 이 자유를 얻을 힘이 없는 무력함을 현실 안에서 여실히 체험합니다. 세상에서 뛰어나다는 걸출한 위인들도 이 점에 있어서만은 자유롭지 않았음을 우리는 역사 안에서 봅니다. 그 자유를 수도공동체 안에서 살아가도록 수도자들은 불리움받았고, 이 자유가 있을 때만 인간은 참으로 동료 인간과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7년 7월의 말씀

공동체와 화해,

 

기억의 빈자리

 

“십

자가를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서 체험한 후에야 사람은 진정한 의미에서 화해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화해하고 싶지 않은 사람은 없지만 화해하려는 몸짓을 시작하는 순간, 이미 온몸이 경직되는 것을 체험하는 것이 우리 인간들입니다. 인간의 자기중심성은 자신이 원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흐름에 역행하는 쪽으로 흐르기도 합니다. 역행하는 두 흐름이 부딪칠 경우, 그곳에는 별들의 전쟁의 우주쇼가 벌어지기도 하며, 그 때 입은 상처가 쉽게 아물지 않는 것은 흔히 보는 광경입니다. 물론 타인 안에서 뿐 아니라 우리 자신 안에서도… . 화해하고자 하는 열정이 커서 이리 저리 움직이기도 하지만, 아직 상대는 준비도 되지 않았는데 이쪽에서 성급히 굴면 오히려 상처를 더 크게 만들기도 합니다. 이 때 화해하고 싶은 마음은 여전히 자기중심적이지 다친 상대의 마음을 보듬고, 그 밑바닥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내 마음의 진정한 변화가 성급한 마음을 따라잡지 못한 것이지요. 그만큼 화해는 쉽지 않습니다.

이런 상처가 겹치고 겹치면 그 부위는 물크러지고 상하게 되어 자신마저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늪으로 변해버립니다. 화해하고자 하는 마음을 받아들여주지 않는다고 원망만 더 커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이 늪은 온갖 것을 빨아들이려 합니다. 상처받은 마음을 보상받고 싶은 것입니다. 이 보상심리가 작용하기 시작하면 화해는 점점 더 어려워지며, 자신만이 피해자로 일평생을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야말로 깊은 수렁 하나를 자신 안에 품고 살아가는 것이지요.

누가 이 깊은 수렁을 치유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크고 작은 상처들을 지닌 공동체 안의 화해는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겠습니까? 십자가로 표현되는 사랑, 자기희생의 사랑만이 이 수렁을 통과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화해할 수 없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화해를 향한 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외부로부터 오는 큰 사건으로 인해 깊은 상처를 받았을 때, 자기 희생의 사랑으로 함께 하는 이가 있다면 이 상처의 자리는 깊은 수렁이 아니라, 빈자리가 됩니다. 이런 마음의 빈자리는 자신의 내면에 숨구멍 같은 것이 되고, 타인을 품는 자리가 되기도 합니다.

이 자기희생의 사랑 없이는 자신과의 화해도 사실 참 어렵습니다. 자신의 약함을 본 사람 즉 얼마나 자기중심적인지를 꿰뚫어 본 사람만이 자기희생이 참된 길임을 제대로 알아듣습니다. 자신의 약함의 바닥을 본 사람만이 타인의 약함을 분노함이 없이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자신에게 상처를 입히는 사람조차 그 바닥에 무엇이 있는지 볼 수 있는 눈은 이 자기희생의 사랑뿐입니다.

공동체를 묶어주는 접착제 역할을 하는 것이 이 자기희생의 사랑입니다. 화해를 할 수 없는 마음의 수백 겹의 단층을 꿰뚫어 볼 수 있는 것도 이 자기희생의 사랑뿐입니다. 사랑을 가장한 왜곡과 집착의 어지러운 실타래 안에서도 고요히 사랑의 숨을 내쉴 수 있게 해주며, 손쉽게 실타래를 끊어버리고 해방을 외치게 하지 않습니다. 시간이 걸려도, 서로가 더 힘들어져도 화해의 여정 없이는 진정한 공동체를 이룰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진정한 화해를 이룬 공동체를 찾아 지구 열 바퀴를 돈다 해도 단 하나의 공동체도 찾을 수 없을지 모릅니다. 내가 몸담고 있는 곳도 그 이상에 닿지 못할지 모릅니다. 진정한 자기희생의 사랑은 여기서 드러납니다. 화해를 이루는 것 자체를 목적으로 삼지 않습니다. 그만큼 인간이 철저히 자기중심적임을 알기에, 그것을 강제로 이루는 것은 폭력일 수밖에 없음도 알기 때문입니다. 화해를 이루어가는 여정, 그 여정 속에 자신의 진짜 보물을 숨길 줄 아는 사람이 됩니다. 수도회의 온갖 영성과 카리스마를 꿰뚫고 있다 할지라도, 노동에 헌신하고 뛰어난 솜씨로 봉사해도, 규칙과 규율에 한 치의 어긋남이 없을지라도, 온갖 위기를 극복하고 공동체의 어려운 일들에 해결사 같은 능력을 발휘해도 진정한 화해를 이루는 삶을 살지 못한다면 그는 행복한 수도승일 수는 없습니다. 그이 안에는 기억의 빈자리가 있습니다.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7년 6월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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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와 십자가,

 

십자가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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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 역사의 가장 정점이 되는 자리는 한 마디로 표현하면 십자가의 자리입니다. 공동체가 외적 성장을 잘 이루어 사람은 넘쳐나고 영적, 학문적으로 공헌을 하는 그런 기회가 부여되는 순간이 공동체의 정점이 아닙니다. 공동체의 정점은 그 가장 아픈 자리, 약한 자리에서 십자가의 사랑이 확고히 설 때입니다. 아무리 외적으로 풍요로움이 넘치는 공동체일지라도 그 역사 안에 약함이 드러나는 시기가 있다는 것은 설명할 필요도 없으며, 그 시기에 약함을 무시하고 외적 성장만을 더 추구한다면 그 성장은 예수의 가치 안에서는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은 설명의 여지가 없을 것입니다.

그 아프고 약한 시기는 한 공동체를 두 가지 기로 앞에 서게 합니다. 하나는 십자가의 사랑이요, 다른 하나는 재앙에 가까운 기억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아프고 약할 때면 수도공동체 역시 일반 가정과 마찬가지로 나누어져야 할 짐이 많아지고, 긴장과 아픔, 슬픔, 분노, 미움, 원한 같은 것들이 공동체 공기를 이루게 되는 것은 인간이란 존재로서 피하지 못할 현실입니다. 수도공동체의 흐름 안에 이런 시기가 나타날 때, 십자가의 사랑 또한 드러나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참되게 사랑하고자 할 때 반드시 사랑의 흐름에 역행하는 힘과 마주 대면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리고 사랑 안에서조차 이기적인 인간의 치명적 약함이 있는 그대로 드러나는 때이기도 합니다. 사랑하고자 하는 사람도, 사랑을 회피하는 사람도 모두 발가벗게 될 수밖에 없는 진정한 평등의 순간이라고나 할까, 인간 존재의 가장 깊은 심연이 보고 싶지 않아도 우리 눈 앞에 펼쳐지는 고통이 동반되는 참된 은총의 시기입니다. 바로 이렇게 선인, 악인이 따로 구별되지 않는 자리가 진정한 자유의 자리입니다.

샤갈의 하얀 십자가야말로 이런 상황을 가장 잘 설명해주는 뛰어난 작품입니다. 샤갈은 비텝스크라는 유대교 신비주의 하시디즘에 깊이 젖어있던 유대인 게토에서 성장하였고, 그의 작품들은 이 사실을 배경으로 해야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유대인이요,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지 않은 그가 그린 십자가가 어떤 그리스도교 화가보다 더 깊이 십자가와 공동체의 의미를 꿰뚫고 있습니다. 히틀러의 독일인 학살을 배경으로 한 그림으로 그 처절한 상황이 잘 묘사되어있습니다. 왼쪽 구석에는 무기를 든 사람들이 쳐들어오고 있고, 마을은 이미 불타오르는데 도망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실감나게 그려져 있습니다. 그 와중에도 모세오경 토라만은 가슴에 품고 안타깝게 십자가를 바라보는 이, 아기를 품에 안고 도망갈 엄두도 내지 못하는 아이 엄마, 무엇인가가 든 자루를 지고 허둥대는 이, 다윗의 별이 새겨진 불타는 집에서 하나라도 더 건지겠다고 무엇을 꺼내는 이, 배를 타고 도망가는 이들도 있으나, 몸부림치는 이들의 모습은 배조차 구원이 되지 못함을 처절하게 보여줍니다. 하늘에서는 그들의 선조들이 얼굴을 가린 채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습니다. 이 급박하고 절실한 상황 속에 두 개의 빛줄기가 그림을 관통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와 십자가를 비추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오른쪽 아래 두루마리에서 십자가를 향해 올라가는 빛입니다. 이 두루마리는 예언서, 이사야서이며 수난받는 야훼의 종을 샤갈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수난받는 하느님의 종, 예수는 이 끔찍한 상황 한가운데, 이 상황의 중심인양 십자가에 달려있습니다. 모든 것이 흔들려도 흔들리지 않는 중심, 고난이 깊어질수록 더 깊어지는 사랑, 그 십자가의 사랑으로 이 고난을 품고 있습니다. 그리고 두루마리에서 나온 빛은 십자가 위를 향해 걸쳐진 사다리로 이어집니다. 이 사다리는 십자가에 달린 이를 위한 것일 리는 없을 터이고, 분명 보고있는 우리가 오를 사다리입니다. 그 사다리는 수난받는 야훼의 종과 떼어서는 생각할 수 없음을 샤갈은 간파하고 있는 것이지요. 저 중심이 없이 모든 것은 혼돈일 뿐입니다.

모든 고통과 모든 기쁨을 아우르는 이 십자가를 포기하는 것은 공동체에 진짜 재앙이 되며, 공동체를 진정 공동체가 되게 하는 것은 이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이 십자가의 사랑에서 부활의 빛이 터져나오기 때문입니다.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7년 5월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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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와 역사,

 

기억의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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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개인의 역사는 기억의 자리입니다. 무엇이 그의 기억을 형성하는가 하는 것이 그 사람의 인격을 결정한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입니다. 이것은 한 공동체의 역사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첫 출발의 기억이요, 자신의 기원에 대해 선배들로부터 전달받은 공동의 기억일 것입니다. 이 기억은 또한 연결된 모든 것들과의 기억이기도 합니다. 부모, 자매, 친지는 물론 가까운 모든 이들, 주위 자연, 환경, 사회, 역사, 사건, 우주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모든 것들과 함께 엮어가며 생겨난 것에 대한 기억입니다. 중요한 것은 일어난 사건, 둘러싸고 있는 인물에 대한 정보나 지식이 아니라 어떻게 기억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공동체나 공동체를 이루는 구성원의 출발점은 말할 것도 없이 그리스도 예수입니다. 예수와의 만남과 체험, 역사가 없었다면 공동체는 시작될 수조차 없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교 공동체 탄생의 첫기억입니다. 그리고 이 공동체의 마지막 종착점 역시 이 그리스도이며, 그 사이를 메우는 기억도 이 그리스도와의 만남의 역사입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생명의 출발과 종착점 역시 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빼고 나면 이 공동체는 존재 이유조차 없어지고 맙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기억이 공동체 역사의 모든 기억을 새롭게 해석하게 해줍니다. 고난일 수도 있는 기억이 하느님의 사랑의 기억으로 변모되고, 공동체의 모든 약함과 모순도 배척할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한 부분으로 여겨지게 됩니다. 여기서부터 당연히 수도공동체의 정신과 생활형태, 그 통치체제를 형성하는 영성은 그리스도 중심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너무도 당연한 일이지만, 이를 구성하는 구성원들이 철두철미 그리스도화 되어있지 않기에 생겨납니다. 바로 이 차이에서 그리스도의 자비와 구원의 역사, 개인의 회심의 체험, 공동체의 역동성이 서로 얽히며, 한 공동체의 역사를 형성해갑니다. 이런 공동체는 첫째 하느님이시며 인간, 육이 되신 그리스도의 자기로부터 나옴, 둘째 하느님이신 그리스도의 자기 비움, 셋째 그리스도의 성부께로 돌아감의 세 가지 현실의 참여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리스도가 자신의 생명의 주인임을 체험하는 수도승은 자기중심의 거짓 프로그램에서 나와 가장 숨겨지고 가장 비천하고 가장 작은 것 안에서 이 생명의 주인을 발견합니다. 왜냐하면 공동체와 수도승의 존재 이유인 그분이 무한히 자신을 비우시어,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던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기억은 평범함 안에 숨은 온갖 역경과 고난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줍니다. 역경은 그리스도께로 가는 길에서 없을 수 없을 뿐 아니라, 그 길 자체라는 것입니다. 이 체험은 생명의 체험이요, 자비의 역사를 이루어 공동체가 자신의 삶과 역사에만 머물지 않고 자기 밖으로 나갈 수 있게 해줍니다. 이런 공동체의 삶 안에서는 평범함이 비범함으로 변모됩니다. 매일 똑같이 부르는 시편 찬미는 새로운 노래가 되고, 매일 입는 똑같은 옷은 기쁨의 옷이 되고, 매일 보는 때로 나를 싫어할 수도 있는 자매는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받는 유일무이한 그분의 딸이 됩니다. 이것은 꿈같은 이야기가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실제로 그러합니다. 그리스도의 정신, 그리스도의 육화, 자기비움, 죽음, 부활,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의 역사입니다. 이것이 약한 인간들이 모인 약한 공동체 안에 가능한 일인지 물음이 생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역설적이게도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곳에 답이 있습니다.

이런 정신을 살아가고자 1098년 프랑스 시토에서 처음 시작된 시토회 첫 공동체는 전유럽에 1,000여개에 이를 만큼 널리 전파되었고, 13세기 전성기를 지나 쇠퇴의 길에서 끊임없는 쇄신운동이 일어났으며, 18세기 프랑스 트라프에서의 개혁이 가장 보편적으로 퍼지며, 트라피스트 수도회라는 별칭이 더 붙게 됩니다. 프랑스의 라발 여자수도원이 1899년 일본 하꼬다테에 천사의 성모 트라피스트 여자수도원을 세우고, 1987년 한국 마산 수정에 천사의 성모 수도원이 한국 수정 수녀원을 창립하였습니다.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7년 4월의 말씀

단잠

공동체의 탄생-사랑의 그늘 아래

수정창립 30주년을 향해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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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부러울 것 없는 단잠, 아기만이 뿜을 수 있는 단냄새가 폴폴 코를 간지럽힙니다. 아가의 단잠을 감싸는 머리 위 꽃그늘 엄마아빠 가족의 그늘 아래 아가의 단잠 꽃잠 꿀잠이 한없이 포근합니다. 아가 혼자이지만 부모의 사랑의 그늘, 가족을 둘러싼 여러 그물들이 얽힌 사랑의 그늘이 함께 느껴집니다.

한 공동체의 탄생도 아기의 탄생과 닮은 면이 많이 있습니다. 여러 시대에 걸쳐 있던 배아가 어떤 희생, 어떤 죽음으로 하나의 카리스마로 형성되어 가는 과정을 간단하게 보아왔습니다. 어떤 카리스마의 형성이 한 공동체의 탄생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카리스마라는 말이 현대에 와서 어떻게 사용되든, 성경 특히 바오로에게는 “하느님의 은사”였다는 것을 기억하면, 하나의 카리스마에 따라 형성된 공동체는 그 자체로 하느님의 은사입니다. 살아가는 이들에게 선물이요, 세상을 향해서도 선물입니다.

시토회 공동체는 1098년 프랑스 시토라는 곳에서 첫걸음을 시작하였습니다. 클루니개혁을 통해 고조된 교회 안의 신선한 바람이 시토라는 곳으로 방향을 잡기 시작한 것이지요. 봉건체제의 그늘 아래, 왕과 귀족, 영주들의 교회를 향한 오랜

지배의 고리를 끊고 원장선거 및 공동체 운영의 자유를 획득하자 수도회의 정신은 비약적으로 활발해지고, 성장의 기운을 타고 나아가던 11세기 유럽전체의 움직임과 더불어 새사람들이 물밀듯이 밀려듭니다. 이 활발한 움직임, 세속권력으로부터의 눈에 보이는 자유만이 아닌, 진정한 내적 자유를 향한 움직임이 영적쇄신운동으로 형성된 것이 이 시대의 한 특징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구원, 복음, 가난, 사랑이 이 운동을 이해하는 열쇠가 되는 말임을 생각할 때 당시의 쇄신운동이 얼마나 활기찼을까를 미루어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시토회는 초기에 “새수도회”라 불렸는데, 이 운동의 가장 첨단에 서있던 탓에 아직 기성의 흐름에 몸담고 있던 이들에게는 새롭고 심지어 기이하게 보이기까지 했던 모양입니다. 당시 수도회들의 일반적인 흐름은 수도승들은 손노동을 하지 않고 전례기도에만 전념하며, 장엄한 전례를 위해 물질과 시간을 아낌없이 투자하여 화려하고 엄숙한 전례가 끊임없이 이어졌습니다. 수도회의 위상도 높아져, 세상과 관련이 커지고 수도승적 고요함과 세상과의 분리가 희미해지는 경향이 생겨났습니다. 시토회는 전례, 건물, 생활의 소박함과 단순함을 회복시키고, 기성수도회들이 당연히 여기던 십분의 일세도 포기하고, 세상과는 원래 그러하였던 거리를 유지하되 세상을 위해 존재하는 기도의 몫은 깊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한 극단에서 다른 극단으로 치닫는 일 없이, 침묵과 대화, 노동과 기도, 순명과 자유, 세상과 거리둠과 세상과의 만남 사이에 좀처럼 보기 드문 균형을 이룹니다. 수도회 통치체제 면에서도 지나친 중앙집권을 피하고 각 공동체의 자립을 보장하되, 세계 곳곳에 흩어진 1,000개의 공동체들의 카리스마의 일치를 위해 총회, 시찰, 모원장 제도를 수립함으로써 유기적인 몸의 균형을 잡습니다.

이러한 제도는 평범한 사람도 열렬히 오직 하느님만을 찾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생활양식을 형성해준다는 것이 참으로 중요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앞으로 올 세대에 관상봉쇄수도원만이 아니라, 활동수도회를 위해서도 가장 바람직한 통치체제를 남겨줍니다. 이 통치체제의 유일한 목적은 그리스도 중심, 즉 하느님의 선물로서의 공동체입니다. 오직 하느님 찾기만을 목적으로 하는 이 공동체의 생활양식은 그에 합당하게 기도, 독서, 노동으로만 이루어진 단순함으로 관통되어있습니다.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7년 3월의 말씀

3월 시선의 바깥

공동체와 카리스마,

성령

“아

아포토시스(Apoptosis), 세포 스스로 죽는다는 의미를 지닌 말입니다. 인간은 하나의 세포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100조 개에 이르는 수많은 세포로 이루어져 있고, 이 세포들이 일정한 시기가 되면 죽어 새로운 세포들에게 자리를 내줌으로써, 세포 하나에게는 죽음이지만 수많은 세포로 이루어진 생명체에는 역설적으로 생명을 유지하는 더 좋은 조건이 됩니다. 그런데 세포가 때가 다되어 제기능을 다 하지 못하면서도 계속해서 자리를 차지하여 새 세포들이 기능을 하지 못할 때 이것을 암세포라 합니다. 이렇게 세포가 스스로 죽지 않으면 인간 자신의 생명이 위태롭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의 죽음이 있어야 다른 생명이 탄생하게 된다고 바꾸어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시선의 바깥”이라는 묘한 제목이 붙은 이 그림, 죽어가는 배추의 몸에서 새로운 생명이 탄생했습니다. 호박꽃과 이미 열매까지 열리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새생명, 새 세상이 열리고 있습니다. 한 수도회의 카리스마 역시 이 역동적 흐름 속에 있습니다. 시토회라는 수도회의 카리스마를 거꾸로 짚어나가면, 시토회➡클루니(베네딕도 수도회)➡베네딕도➡초기 사막수도승으로로 이어집니다. 화살표 사이에는 물론 죽음과 새생명의 탄생이 바다 파도처럼 끊어짐이 없이 서로 겹치며 이어집니다. 화살표를 거꾸로 거슬러 초기 수도생활로 가보면, 예수 그리스도 사후 맹렬히 퍼져가던 그리스도교와 그 맹렬함을 따라잡기라도 하듯 로마의 탄압이 무섭게 내리쳤고, 수많은 이들이 순교를 하며 피로 맺은 열매인 믿음을 세대에서 세대로 전해주었습니다. 그런데 313년 그리스도교가 로마황제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인정을 받게 되고 더 나아가 국교가 되면서 박해받는 교회에서 특혜받는 교회로 바뀌게 되자, 교회는 세상의 물결이 넘실넘실 넘어와 그리스도교 정신의 핵심만을 살아가던 박해받던 시기의 맑음과 뜨거움이 혼탁함과 미지근함으로 바뀌어감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됩니다. 그러자 그 뜨거움에 목마른 이들이 사막에서 시작되고 있던 수도생활로 몰려갑니다. 그러니 수도생활의 정신에는 순교의 정신이 빼도 박도 못하게 강하게 각인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앞 세대는 순교로 죽어갔지만 그 정신은 수도생활로 이어지면서 새로운 형태의 삶이 탄생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막에서의 은수생활이 활짝 꽃을 피워 절정에 이를 무렵, 공동체 생활을 하는 수도회인 아우구스티노와 바실리오, 파코미오 수도생활이 생겨납니다. 이 은수생활과 공동체생활의 두 흐름은 마치 두 개의 강물처럼 서로 섞임이 없이 도도히 흐르다가 5세기 베네딕도 성인에 이르러 하나의 흐름으로 합쳐져 큰강을 이루게 됩니다. 즉 성인은 자신이 쓴 수도규칙 속에서 전해받은 은수와 공동생활이라는 양립할 수 없을 것 같은 이 두 전통을 받아들입니다. 침묵과 공동생활, 순명과 자유, 절제와 나눔, 노동과 기도생활 등이 하나의 생활 형태 안에 공존함으로써 예수의 정신과 가치를 한 울타리 안에 형제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균형잡힌 수도생활을 세웠고, 이 생활과 수도규칙은 이후 서방 수도생활의 근간이 되고 베네딕도는 수도승, 서양의 아버지라고 불립니다. 역사의 복잡함 안에서 베네딕도회는 사라지고, 부침을 거듭하던 수도생활은 10세기 클루니에 이르러 제후, 귀족들로부터의 끈을 끊고 새로운 그리스도교적 자유를 토대로 힘차게 발전합니다. 고대로마에서 중세유럽에로의 이전에서 피할 수 없었던 봉건제도의 틀 안에서 그리스도교는 봉건의 옷을 입고 있을 수밖에 없었는데, 11세기 시토회는 수도회로부터 이 옷을 벗겨내고 베네딕도성인이 세운 원래 모습의 수도생활을 다시 회복합니다. 母공동체가 세운 子수도원으로부터 세금을 받고, 법제정은 오직 모공동체에만 귀속된 당시의 틀을 과감히 깨고 오직 사랑의 법으로만 통치하는 새로운 카리스마가 탄생하고, 가난과 사랑이라는 그 시대의 언어를 앞 세대의 성취 위에 세워갑니다. 클루니 개혁이 없는 시토가 있을 수 없고, 베네딕도 없이 클루니는 존재할 수도 없으며, 베네딕도는 거의 온전히 사막 은수생활과 공동체생활의 전통으로부터 시작합니다. 하나의 죽음, 하나의 탄생 그 신비의 연속!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7년 2월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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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의 배아-영원을 향하여

수정창립 30주년을 향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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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어떤 예술, 문학, 기술, 심지어 종교도 저 혼자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은 없습니다. 한 인간 개인도 그러합니다. 한 사람이 이 세상에 첫 울음을 터트릴 때 그 엄마, 아빠 그리고 그 엄마 아빠의 엄마 아빠 그리고…그리고 수도 없이 올라간 그 세대들의 흐름 속에 그 아기가 태어난 것입니다. 한 아이의 성격과 인간됨에는 그 수많은 세대의 면면한 흐름이 녹아들어있습니다. 그러나 또한 그 흐름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바로 그 아이만의 독특함이 있습니다. 세세대대로 이어진 흐름과 그 사람만의 독특함이 잘 어우러져 빚어진 한 사람의 삶은 자신과 주위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 시대 더 나아가 시대를 넘어서까지 한 흐름을 다시 형성할 수도 있습니다. 수많은 작은 흐름들을 형성하는 풍요롭고 큰 흐름을….

이처럼 수도생활도 그러합니다. 수도생활이 가톨릭의 아주 독특한 면 중의 하나이지만, 당연히 가톨릭의 전유물은 아닙니다. 수도생활은 그리스도교가 생기기 전 이미 여러 가지 형태로 존재하고 있었고, 그리스도교의 수도생활은 유일하고 독특한 면을 지니고 있지만, 이미 있었던 여러 삶의 형태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고 받아들입니다. 즉 수도생활은 인간 존재의 심연에 어떤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인간의 보편적인 한 현상이라 볼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인간 각자는 어떤 의미에서 모두 수도자이다.”라고 했는데 이는 참으로 지당한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세상의 수도생활이라 불릴 수 있는 모든 것이 지닌 공통점을 한 번 살펴보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 아닐 것입니다. 세 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첫째는 세상으로부터의 분리로, 수도생활을 지향하는 모든 사람은 현재의 이 세상과 일시적이든 영구적이든 일종의 분리를 추구합니다. 분리됨으로써 이 세상이 지향하는 가치들을 포기하고 새로운 가치, 참으로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가치로 새롭게 거듭나기에 온몸, 온생을 바칩니다. 둘째는 금욕수행으로 독신, 가난, 단식, 절제 등 내적 깨어있음을 지향하는 요소들 또한 공통적으로 모든 수도생활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셋째는 신비적 갈망으로 절대자에 대한 깊은 의식과 이 절대자와의 통교에 대한 갈망. 이것이 수도승 생활의 가장 깊은 토대이며 이것은 위의 두 가지 요소를 움직이는 힘입니다.

여기서 1월 소식지에서 나눴던 모든 것이 나오는 사랑의 근원, 모태와 연결이 됩니다. 신비적 갈망은 바로 이곳을 향합니다. 인간 존재와 모든 수도공동체들은 여기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근원을 향한 갈망, 목마름은 어느 세대에도 끊어지는 일 없이 세상이라는 강의 밑바닥을 흘러왔습니다. 세상의 흐름과 세상의 가치에 매몰되어, 존재의 출발지와 목적지를 잊어버린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나 세상과의 분리, 금욕, 신비적 갈망이 자신 안에 불꽃으로 타오르고 있음을 적든 크든 느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 존재의 심연에는 유일한 사랑의 근원을 향한 상승의 움직임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를 잡아당겨내려 물처럼 바닥으로 스며들게 하는 힘도 작용합니다. 그 힘의 엄청남은 마치 사랑의 모태를 향한 힘을 눌러 찌그러트릴 것 같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 힘이 아무리 막강할지라도 존재의 심연에 심어진 배아만은 결코 건드리지 못합니다. 사람으로 생겨먹은 존재 안에서 이것을 없애버릴 수 있는 존재는 없습니다. 심지어 하느님조차도…. 그 배아는 역사의 흐름 안에서 적당한 토양, 수분, 햇빛을 만나면 발아하여 수많은 이들이 그 근원을 향해 갈 수 있는 그런 카리스마를 형성합니다. 한 죽음이 다른 생명을 낳는 그 흐름 안에서 앞세대가 쌓은 영양분을 먹고, 앞세대를 이어받으면서도 앞세대를 넘어 또 하나의 새로운 길을 여는 카리스마가 수많은 이를 불러모읍니다. 그림 속 터진 홍시처럼 감은 죽고 새싹이 돋아납니다.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7년 1월의 말씀

공동체의 근원 - 사랑의 품

공동체의 근원 – 사랑의 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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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배고픈데 누군가 내 손에 쥐어준 따뜻한 밥 한 그릇 같은 그림입니다. 자꾸 보고 싶고, 한 명 한 명의 절묘한 표정을 읽고 있노라면 나도 저 장면 속에 들어가고 싶어집니다. 명절에 오랜만에 만난 사촌, 육촌들이 키재기를 하는데, 어른들이 더 신이 났습니다. 아이의 관심, 꿈이 어른의 관심이 되는 사랑과 꿈이 가득한 그림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사람, 모든 가정, 모든 공동체는 사랑이라는 모태, 근원에서 나왔습니다. 불행의 바닥을 치는, 사랑이라는 말 따위 사치라고 외칠 그런 아픈 출생도 사랑에서 비롯되었음을 믿는 이들이 많을수록 세상은 넉넉하고 사람 살만한 곳이 될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모태, 근원에서 나오지 않은 것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이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이, 한 사람도 남김이 없이 모든 이 안에서 사랑이 식어버린다면 아마 우주의 모든 별들은 열과 빛을 잃고 우주 전체가 싸늘한 암흑으로 변해버릴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여전히 신비요, 베일에 싸인 우주도 태어난 곳이 있음을 현대 과학은 미약하게나마 감지하고 있습니다. 우주가 태어난 곳이 있다면 그 우주의 꽃, 정점인 인간이 태어난 곳이 있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 아니겠는지요. 한 명 한 명의 인간은 그저 우연히 어쩌다 태어난 목숨이 아니라, 사랑의 근원에서 영원으로부터 작정하신 그런 열렬함에서 세상에 존재합니다. 엄마, 아빠가 자신의 아기를 열렬히 원하는 그런 마음과 조금은 닮은 구석이 있지 않을까요. 우리가 존재하기를 원하는 그런 사랑의 근원이 있어 우리는 그곳으로부터 엄마 아빠를 통해 이 세상으로 오게 된 것이지요. 한 공동체 역시 인간 개인과 마찬가지로 어떤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영원한 하느님 사랑의 계획안에서 태어납니다. 역사를 통해 공동체의 탄생과 성장, 그 역할을 공부해보면 이 사실을 손에 잡힐 듯 분명히 느낄 수 있습니다.

올해 10월19일에 수정 공동체 탄생 30주년을 맞게 됩니다. 10월까지 열 달 동안 공동체의 탄생과 성장이라는 흐름을 여러 주제 아래 함께 나누어 볼까 합니다. 공동체와 가정 그리고 사회 단체들의 삶은 여러 면에서 닮은 점이 많습니다. 봉쇄공동체 생활은 세상 어떤 곳보다 더 밀도 깊은 인간관계가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면이 있으므로 저희 삶의 여정이 다른 많은 분들과도 공감할 수 있는 교집합이 있으리라 믿습니다. 이혼에 직면한 분들과 대화를 나누어 보면, “결혼도 안한 수녀님이 저희 생활을 어떻게 그렇게 잘 아세요?”라는 질문들을 하시는데, 그만큼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곳에는 각 생활형태에 따라 다른 면도 많지만 공통점이 더 많기 때문일 것입니다.

각 지역, 각 나라에 퍼져있는 여러 공동체들을 품고 있는 하나의 카리스마를 살아가는 수도회 역시 이 사랑의 품에서 나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수도회들은 오히려 사랑의 품 안의 어떤 요소를 더 선명하게 드러낼 줄 수 있고 그것이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매력이 됩니다. 한 수도회, 한 공동체, 한 가정, 한 개인이 자신이 태어난 곳에 대한 분명한 인식과 따뜻한 기억, 태어남에 대한 분명한 사명의식이 있을 때 그 삶은 하나의 빛이 될 수 있습니다. 그 사랑의 품을 닮아 사람을 품는 품이 넓습니다.

그리고 태어난 곳을 안다는 것은 돌아가야 할 곳, 최종 목적지를 안다는 것으로 연결됩니다. 그 사랑의 품, 삼위일체 하느님, 하느님의 친교, 하느님의 비움, 하느님의 가족이심 안으로 우리 삶이 향하고 있음을 알 때 우리가 돌아가야 할 곳에 어울리는 맑음과 단순함을 지향하며, 세상 고귀한 것들을 포기하더라도 그 모습을 얻으려 할 것입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 한 개인, 공동체들은 바로 자신의 근원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사랑의 품에서 나와 사랑의 품으로 돌아감을 아는 사람, 공동체 세상의 빛입니다.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6년 12월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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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구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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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 김이 오르는 양푼이 한복판에 있고 그 주위로 일곱 사람이 그려져 있는 그림입니다만, 시장 전체의 시끌벅적한 느낌이 화면 가득 배어나옵니다. 1980년대만 하더라도 굳이 시골까지 가지 않더라도 큰 시장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었습니다. 왼쪽에서 두 번째 할머니는 가져온 물건을 다 팔았는지 커다란 바구니 속이 텅 비었고, 국수 한 그릇을 다 먹어 손에 들고있는 그릇은 이미 비어있습니다. 가져온 물건을 다 팔아 맘이 넉넉한지 통 자리를 뜰 생각이 없고, 국수 말아주는 할머니와 두런두런 이야기가 한참입니다. 국수 마는 할머니는 “그려 그려 인생 그런 것이여”라는 표정으로 십년지기라도 되는 양 이야기 삼매경에 빠져있습니다. 입고 있는 옷들이 비슷하듯 서로 나누는 인생살이도 아마 비슷할 것이고, 이야기 구절구절마다 자신의 이야기인 듯 고개가 끄덕여질 것 같은 분위기가 전해져옵니다. 오른쪽에 두 사람은 국수 그릇까지 삼킬 듯 먹는 데만 열중하는 것 같지만 후루룩 국물까지 다 마시고 나면 슬쩍 이야기 속으로 끼어들 것 같습니다. 뒤편에 쪼그리고 앉아 담배를 태우는 할아버지와 등에는 짐을 진 채로 걱정이라도 있는 듯 저 먼곳을 바라보는 할머니는 부부사이인 듯한데, 할아버지가 담배 한 대를 다 태우기를 기다려 곧 일어설 것 같은 자세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사소한 것들이 어울려 그려내는 시장의 한 모퉁이 풍경, 가난하고 힘겨운 노동으로 매일을 보내는 고단한 백성들의 모습 안에 볼 수 있는 사람다움과 인간에 대한 자연스런 관심이 한복판 양푼이 속 김처럼 따뜻함을 피워내는 그림입니다. 가진 것 많고 자랑할 것 많고 빼앗길 것 많아 지키기에 급급한 이들 사이에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는 풍경입니다. 가난함이 곧 인간답지 못하고 추하고 저속한 것이라 사기를 치고 사람을 다치게 하더라도 내려가고 싶지 않은 곳으로만 보는 이들의 마음 속에는 결코 깃들 수 없는 정경입니다.

심지어 가난함의 특권이라고까지 표현한다면 가난한 이들에 대한 모독이 될까요? 지금의 시대에선 그럴 것입니다. 하지만 이천 년 전 예수님은 아예 공개적으로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니”라고 선포하셨습니다. 그 하느님 나라는 분명 이 지상의 나라는 아니지만, 이미 이 지상에서도 그 맛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 눈앞에 있는 그림처럼….

이 그림을 처음으로 만났을 때 아기 예수님이 누워있는 구유의 영상이 떠올랐습니다. 이만큼 아름다운 구유도 찾기 어렵지 않을까요! 이천 년 전에는 목동들이 마굿간으로 찾아갔지만, 이제는 아기예수님이 먼저 이들을 찾아와 이분들의 품에 안기는 상상을 해봅니다. 서로 얼마나 어울리는지! 얼마나 닮았는지! 얼마나 잘 통하는지! 가난한 마음, 가난한 옷, 가난한 음식, 가난한 자리. 이런 곳에서 가장 큰 관심은 사람입니다. 너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 되고, 작은 것에도 서로 관심을 가지니 이렇게 따뜻한 풍경이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저 풍경 속에 나 잘난 사람 한 명만 있어도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져버리겠지요. 저 구유 속에 함께 들어가고 싶다면 우리도 작고 가난하고 낮아짐을 싫어하지 않고, 그렇게 되기를 진정으로 바라는 마음, 살같은 마음으로 변모되어야 합니다. 저이들처럼 타인에게 어떤 울타리도 없이 처음 만나도 가족들의 온갖 근심거리까지 툭 털어놓을 수 있는 열린 마음이어야 합니다. 우리 마음도 아기 예수님 담는 구유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도 아기예수님을 닮은 가난한 사람으로 다시 태어날 것입니다.

작고 여리게 작고 여려서

밤하늘 별빛보다 여리게 작고작은 이들만

오신 아기 알아채는 아기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6년 11월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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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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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아, 하느님을 찬미하여라.”라고 노래 부르고 싶게 만드는 그림입니다. 너어-허어허 너어-허어-허 너화 넘자 너어-허 만가 소리가 구불구불 배어나옵니다. 삭막한 겨울풍경, 푸른빛을 낼만한 것이라곤 소나무밖에 없는데 그 소나무마저 거의 검푸른 색입니다. 가을걷이 끝난 비탈 밭에는 마른 줄기 하나 남지 않았고, 바싹 마른 풀잎과 대지, 삭막한 바람마저도 멎어버린 초겨울의 풍경이 이상하게도 스산하질 않습니다.

구불거리는 밭길, 활처럼 휜 바닷가, 맨 앞 엄마 젖무덤 같은 무덤 두 개, 작디 작아도 동영상처럼 움직일 것 같은 상여행렬. 굽이굽이 돌아가 떠나가는 마지막 길을 이 모든 것들이 함께 배웅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니 모든 것이 더불어 마지막 길 위에 있는 것 같습니다. 마지막 길도 함께라면 덜 적막하겠지요. 마지막 길이 철두철미 고립무원, 소외, 절대적 분리가 아님을 아는 이는 죽음도 새롭게 볼 수 있습니다. 이 그림 속에도 역시 죽음으로 인한 애잔한 슬픔이 저 밭길처럼 구불구불 흐릅니다. 하지만 슬픔과 설움, 고통이 이 그림을 짓누르고 있지는 않습니다. 마지막 길인 줄 알면서도 저 길따라 함께 가보고 싶은 생각마저 들게 합니다. 봄여름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되면 산천초목이 저렇게 삭아버리듯 우리 몸도 사그라드는 것이 자연의 한 부분임을 그 단순한 진리가 맹렬한 두려움으로 휘감기는 일없이 자연처럼 단순하게 당연하게 다가옵니다.

묘하게도 이 그림 속에는 죽음의 허무가 아니라 그리움이 출렁거립니다. 고요함과 움직임이 서로 부딪치는 일 없이 함께 너울거립니다. 옅은 황금빛으로 조용히 일렁거리는 바다는 마치 이 세상을 넘어 다른 세상을 비춰주고 있는 듯합니다. 번쩍이거나 짙지 않되 다른 빛이 함부로 넘어갈 수 없으면서도 차츰 차츰 갈색 대지를 물들일 것 같습니다. 하늘나라, 천국, 저 세상, 저승 등으로 묘사하는 죽음 너머 세상은 결코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무시하고 잊고 영원히 살기라도 할 것 같이 맹렬하게 이 지상의 부와 명예를 쌓으며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 우리 앞에 저 고요히 빛나는 바다는 말을 걸어옵니다. 이곳이 세상의 끝은 아니라고….

그림 맨앞에 있는 엄마젖 같은 무덤은 죽음이 곧 생명으로 이어짐을 말없이 한구석에서 이야기해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죽음이, 죽음의 문화가, 죽음의 정신이 승리하고 있는 세상, 젊다기보다 어린 가수들의 비디오에는 폭력, 살인, 퇴폐적인 성이 찬양되고 어린 학생들은 그것을 보고 정신이 나가도록 매료됩니다.

공공연히 죽음의 정신을 숭상하는 이 시대에 참된 죽음의 의미가 새롭게 인식될 필요성이 절박하게 느껴집니다. 죽음과 죽음을 부르는 폭력은 결코 그 자체로 추구되어서는 안되며 그것은 인간성을 파괴합니다. 진짜 죽음은 그렇게 간단하게 찬양될 것이 아님은 조금만 눈돌리면 우리 주위에도 알아볼 표징들은 얼마든지 널려있습니다. 가족의 죽음으로 삶이 바닥에 이른 이들, 감기처럼 흔한 암의 불확실함 앞에 떠는 사람들, 사업 몰락으로 가정이 파탄나고 시설로 보내진 아이들. 한 학교에서 300명이 넘는 아이들이 한꺼번에 사라지고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어버린 세월호 부모들. 이런 가슴저리는 표징도 거짓 죽음의 문화에 젖어든 이들의 굳은 가슴에 실금조차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죽음의 문화 한복판에도 아기 예수님은 태어나십니다. 그 속에서 성장하고 기쁜 소식 전하고 수난받고 죽음을 당하시고 부활하십니다. 그분만이 인간의 참생명이니까요

 

님의 탄생 우리의 생명

님의 죽음 우리의 생명

무엇을 두려워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