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8년 6월의 말씀

 

베드로는 울었다

 

“우

리는 사는 동안 여러 가지 이유로 – 기뻐서, 슬퍼서, 억울하고 분해서, 부끄러워서 …… – 울게 됩니다. 울음 때문에 기도하게 되고, 기도하다가 울기도 합니다. 성 베네딕도는 규칙서에서 “지난 날의 자기 잘못을 눈물과 탄식으로 매일 기도 중에 하느님께 고백”하며 기도하라고 합니다. 보석을 감정하듯 눈물을 감정한다면 어떤 눈물 방울이 가장 빛나고 아름다울까요? 무슨 사연들이 있어 눈물을 흘리게 될지라도, 우는 “나” 때문에 마음 아파하시고 함께 우시는 우리 주님의 눈물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없을 것입니다.

“나는 그 사람을 모르네.”라며 주님을 배신했던 그 밤, 베드로는 “슬피 울며” 주저앉았습니다. 차라리 땅이 입을 벌려 자신을 삼켜 버린다면 치욕에서 벗어날 수도 있으련만. 그러나 하느님의 크시고 놀라우신 자비는 이러한 “세상의 슬픔”(2코린 7,10)에 매몰되도록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세 번째 배신의 말이 베드로의 입에서 채 끝나기도 전에 예수님께서는 “몸을 돌려 베드로를 바라보시며” 당신 눈물의 씨를 베드로 마음 땅에 뿌리셨습니다. 그 씨는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열매를 맺게 될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믿고 있습니다.

베드로여, 기억하고 일어나십시오. 그대를 바라보시던 자비의 눈길, 높은 산에서 “일어나라. 그리고 두려워하지 마라.”고 하시며 어루만져주시던 그 손길을 다시 느끼십시오. 그대의 배신, 실패, 좌절에 대한 아픈 기억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희망”(1베드 3,15)을 기억하며 우리에게 담대히 말해 주어야 합니다. “형제가 죄를 지으면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하시오.”

발보다 빠른 것이 말이라고 하니 베드로 자신도 교회 안에서 들려오는 뒷소리들을 듣고 있었을 것입니다. “베드로 저 사람 말이야, 저렇게 보이지만 글쎄 세 번씩이나 우리 주님을 배반한 인물이라는구먼.” 베드로는 평생 자신의 삶에 드리워진 멍에를 짊어지고 끊임없이 다시 일어서기를 거듭했을 것입니다. “베드로야, 나는 너의 믿음이 꺼지지 않도록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그러니 네가 돌아오거든 네 형제들의 힘을 북돋아 주어라.” 간절한 마음과는 다르게 말과 행위가 따르지 않는 자신의 약점을 익히 알고 계시는 예수님의 기도와 “끊임없는 교회의 기도”(사도 12,5)에 힘입어 베드로는 교회의 수장이 되어갑니다. 베드로는 분명 “산들이 밀려나고 언덕들이 흔들린다 하여도” 결코 밀려나지 않는 하느님 자비의 증인입니다.

어둠이 아직 가시지 않은 아침, 아무 것도 잡지 못한 지난 밤의 실패에 붙들려 뒤로 물러나는 베드로를 거듭거듭 당신께로 끌어 당깁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예.”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예.” 이 질문은 우리 모두를 향하고 있습니다.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절망하고 실패하여 좌절에 빠져 있을 때 “베드로의 밤”을 기억하면서 베드로와 함께 대답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8년 5월의 말씀

생명을 얻고, 또 얻어

 

“수

도원에 입회하는 이는 일정 기간의 초기 양성기가 끝나면 수도승 서원을 발함으로써 하느님께 봉헌됩니다. 그리고 “충실한 정주定住와 죽을 때까지 숭고한 순종을 통해서 참된 생활개선에 정진할 의무”(트라피스트 회헌)를 지닙니다. 너무 무거운 율법 조항으로 느껴지시나요? 이 의무의 짐은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기도, 노동, 독서의 일상 안에서 자매들과 함께 지는 것입니다. 때론 무게가 어깨를 누르기도 합니다. 허나, 놀랍게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우리의 권리이며 선물임을 느끼게 되는 때가 옵니다. 은총입니다! 이 은총은 정주를 하늘나라로 옮기는 선배들을 통해서도 주어집니다.

지난 1월, ‘천주의 성모 마리아의 대축일’을 지낸 다음 날, 일본 천사원의 카지미르 수녀는 숨겨진 봉쇄에서 단순하며 평범한 80여년의 수도생활을 끝내고 하느님 곁으로 돌아갔습니다. “평범”하다고 말하는 것은 그녀가 우리 시토회의 수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눈으로 보면 어쩌면 기적이며 신비일 수 있습니다. 일생을 한 장소에서, 매일 같은 시간표에 따라, 성당과 작업장, 식당 그리고 공부방과 침실이 움직인 영역의 전부입니다. 그녀는 병실에서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직 돌봄을 받으며 침대에 누워있을 때 우리 후배들에게 더 많은 진리를 전해 주었습니다. 엄마 품에 안긴 듯 편안한 아기의 미소를 짓고 있는 수녀를 만난 이들은 누구나 행복을 느꼈습니다. 늙고 병든 사람이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음에 놀랐습니다. 수녀의 손과 얼굴을 만지면서 감히 거룩함과 아름다움을 만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수정공동체에서 만든 가락지 묵주를 끼고 “나를 구하신 하느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 성모님의 손을 잡고 영원하신 아버지의 집으로 갔습니다. 이제 하느님의 얼굴을 뵙고 있는 수녀는 하느님의 얼굴을 찾고 있는 우리를 위한 영원한 전구자가 되었습니다. 시토회에 흐르는 생명의 강은 마르지 않을 것입니다.

하느님을 품에 모신 이가 하느님의 약속을 품은 이를 만나기 위해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을” 달려갔습니다. “남자를 알지 못하는 처녀”가 어머니가 되는 것과 늙은 석녀가 어머니 되는 것은 마찬가지로 터무니없고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일입니다. 하느님의 낯선 축복은 인간의 눈에는 어쩌면 수치와 고통일 수도 있습니다. 어처구니없는 은총의 고통 앞에서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타인의 고통을 방문합니다. 자기 고통의 충격에 함몰되지 않고 타인의 거룩한 땅으로 들어갑니다. 그리하여 “다섯 달 동안 숨어 지내던” 엘리사벳 태 안의 아기가 “즐거이 뛰놀게” 되었습니다. 생명이 생명을 부릅니다.

초록의 생명 충만한 5월, 세상을 떠난 선배들을 기억하며 우리의 원천에서 생명수를 길어 올립니다. “수녀들은 통회의 정신과 타오르는 열렬한 갈망으로 자주 기도에 전념할 것이며, 지상에 살고 있으나 마음은 천상 것에 이끌려 온전한 영적 갈망으로 영원한 생명을 희망한다. 그리고 지상을 순례하는 모든 이의 생명, 기쁨, 희망이신 동정 마리아를 늘 마음에 모실 것이다.”(트라피스트 회헌).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8년 4월의 말씀

듣고, 보고, 만지고

 

렐루야! 우리 주 예수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 정원”(요한19,41)이 있었습니다. 배반과 죽음이 일어난 바로 그 정원에 “생명나무”가 나타났습니다. 닫혔던 동산이 열렸습니다. 도망치거나 숨거나 무관심한 우리를 생명과 사랑, 평화의 자리로 불러 모으십니다. 이웃도 외면한 채 앞만 보고 바삐 걷는 걸음을 잠시 멈추고, 몸을 낮추며 가까이 다가가서, 꿈틀거리며 땅을 뚫고 올라오는 온갖 살아있는 것들의 희망을 느껴보라고 초대하십니다. 지난 일에 대한 두려움은 당신께 맡기고 타인의 눈을 바라보라 하십니다. 바로 그 눈 안에서 “나의 모습”을 새로움과 놀라움으로 발견하여 용서와 평화를 얻으라 하십니다.

통한 표정의 두 사람이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고 있습니다. 터벅터벅 걸으며 “그 동안 일어난 모든 일에 관하여” 서로 토론도 해보지만 답도 없고 절망의 먼지만 발 앞에 쌓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들 가까이 먼저 다가가시어 함께 걸으십니다. “아, 어리석은 사람들!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완고한 돌심장을 말씀께서 친히 어루만지어 말씀을 되새겨주시니 살아있는 심장이 되어 말씀의 불꽃이 타오릅니다. 그들은 곧바로 평화의 도시로 되돌아갔습니다.

느님께서는 고통 받으실 수 없는 분이시나, 함께 고통 받지 않으실 수가 없는 분이십니다. Impassibilis est Deus, sed non incompassibilis.”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 주님께서는 깊고 짙은 어둠의 바다로 내려가시어, 천 날보다 오랜 기다림과 사무친 그리움의 이름들을 영원으로 끌어 올리셨습니다. 그 이름들은 남은 자들에게 희망을 가리키는 별이 되어 아름다운 하늘 꽃으로 피었습니다. 4월, 그들을 불러봅니다. “승진님, 현철님, 영인님, 재근님, 그리고 혁규야!”(세월호 미수습자. 권재근님과 혁규는 아버지와 아들입니다.) 미안합니다. 고맙습니다. 우리의 기도 안에서 기억하겠습니다. 이미 “죽음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건너간” 그들은 결코 잊을 수 없는 우리 공동의 희망, 공동의 진실입니다.

상의 악과 고통, 인간의 희노애락을 듣고 보시는 주님께서는 당신 약속 – 나는 세상 끝날까지 항상 그대들과 함께 있습니다. – 을 기억하시어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도움과 위로, 연대와 실천의 손을 내미는 우리의 이웃으로 오십니다. 우리가 그 손을 맞잡으면 “마른 나무”(루카 23,31)로 되지는 않을 겁니다. 주님 포도나무의 살아있는 가지가 되어 영원한 생명의 열매 풍성히 맺을 것입니다.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8년 3월의 말씀

 

너 어디 있느냐?

 

었다가 다시 찾은 것이 무엇일 때, 친구와 이웃들을 불러 모아 기쁨을 함께 나누고자 할까요? 그림의 “어떤 여인은 은전 열 닢을 가지고 있었는데, 한 닢을 잃어 그것을 찾고자 온 집안을 쓸고 뒤적이며 찾고” 있습니다. 혹 장롱의 옷 안에 있는지 탈탈 털어 보았고, 의자도 광주리도 엎어져 있습니다. 하나가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듯 아홉 개의 나머지 동전은 바닥에 드러누운 의자위에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져 있습니다. “등불을 켜들고” 몸을 구부려 “샅샅이 뒤지며” 찾다가 드디어 잃어버린 하나의 동전이 바닥의 틈새에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인의 기쁨과 평온은 천사의 기쁨이고 하늘도 그 기쁨의 빛을 감출 수 없어 방안을 환히 비추고 있습니다. 짐작하면, 여인은 친구와 이웃들을 불러 모아 잃어버렸던 은전 한 닢을 찾았다고 기쁨의 잔칫상을 차렸을 것입니다. 초대받은 이들은 다시 찾은 것의 정체를 알고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그들은 아무런 실리 없음, 현명하지 못함, 비효율성, 궁색한 살림을 제대로 운용하지 못하고 그나마 가진 것마저 방탕하게 허투루 낭비하는 것에 대해 비웃거나 조롱하거나 질책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을 구부린 채 등불을 켜들고 틈새에 끼인 동전을 바라보며 기뻐하는 여인의 중심에 하느님께서 계십니다. 세상과 사람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찾아 나서시며, 한 사람 한 사람을 “먼저 사랑”하십니다. 질병, 불안, 슬픔, 분노, 소외, 억울함, 완고함과 비겁함 등의 온갖 어려움의 틈새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이들을 빛이신 하느님께서 친히 몸을 굽혀 찾고 계십니다. 절망의 질곡에서 벗어나, 이기(利己)의 땅에서 이타(利他)의 땅으로 건너가 새롭게 살고파 삶의 방향을 바꾸고자 하는 이들은 굳은 결심을 합니다. 물론 “내가 돌아서야 하는 나의 의지적 행동”도 필요하고 중요하지만, 회심은 은총의 선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선한 의지일 때는 더욱 그러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합니다. “주님, 저희를 당신께 되돌리소서, 저희가 돌아가오리다. 저희의 날들을 예전처럼 새롭게 하여 주소서.”(애가 5,21).

3월, 수도원 뜨락과 길섶 마다에는 땅 밑에서 추위와 어둠을 이겨낸 씨앗들이 땅을 뚫고 올라오는 용기와 희망의 기운으로 가득합니다. 맨몸으로 겨울을 지낸 나무들의 가지 끝은 새로운 시작이 되어 새순이 움트고 있습니다. 얼마나 놀랍고 고마운지요! 우리도 일상의 단순함과 충실성이 행여 모자라거나 지나치지는 않는지 기도의 발걸음과 일하는 손에 더욱 정성을 다하며, 원천의 맑고 깊은 샘물에 몸도 마음도 다시 한 번 비추어 봅니다. “자매들은 모든 사람들을 다 함께 영원한 생명에로 이끄시는 그리스도보다 아무 것도 우선시키지 않으며, 단순하고 숨겨지며 노고에 찬 생활 안에 항구하는 그만큼 기쁨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트라피스트회헌).

나의 동전을 찾고자 여인이 밝힌 등불은 한 사람의 죄인을 구원하고자 밝히는 부활초가 되어 우리 앞에 곧 나타나 보일 것입니다. “그 빛을 만날 때까지, 그 빛 안에 쉴 때까지, 모든 이와 그 빛을 나눌 때까지는”(프란치스코 교종) 초조한 갈망의 기쁨을 멈추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표지 : 렘브란트 <돌아온 아들> 부분그림

도메니코 페티(1589~1624) <잃어버린 동전의 비유>, 프레스텐 국립미술관, 독일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8년 2월의 말씀

당신의 기억을 향하여

 

“우

리는 하늘도 땅도 주님의 것, 밤도 낮도 주님의 것, “땅이며 그 안에 가득 찬 것, 온 누리와 거기 있는 그 모든 것이 주님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렇습니다. 내 자신, 존재 자체도 분명 주님의 것입니다. 살아간다는 것은 “나”를 온전히 나의 주인께 돌려 드리는 여정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는 동안 모든 것이 내 것임을 주장하고, 더 많은 것이 내 것이기를 바랍니다. 어느 부분에서는 몸을 가두고 사는 우리도 “내 것”으로부터 자유롭지는 않습니다. “죽음을 날마다 눈앞에 환히 두라. 모든 영적 욕망을 가지고 영원한 생명을 갈망하라.”는 성 베네딕도의 권고에서 희망과 길을 얻습니다.

우리의 존재, 우리가 가진 모든 것, 생각과 선을 행할 수 있는 의지도 선물입니다. “가진 것 가운데에서 받지 않은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선물이며 은총임을 깨닫는 그 자리에 구원이 있습니다. “구원은 우리보다 앞선 것에 자신을 개방함으로써, 삶을 긍정하고 그 존재를 지탱해 주는 근원적인 선물에 개방함으로써 시작됩니다. 이 근원적인 선물에 마음을 열고 그것을 인정할 때에만 구원이 우리 안에서 성취됩니다.”(신앙의 빛 19항).

빗방울이 자신의 존재를 고집하며 유지한다면 세상은 비가 내릴 때마다 홍수가 날 것입니다. 빗방울은 땅에 떨어져 자신을 잃어버립니다. 땅에 스미어 새싹이 돋게 하고 수액이 되어 나무를 자라게 하고 온갖 것의 생명수가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두 “세상에 보내진 몸, 아버지 하느님께 돌려드려야 하는 몸”임을 아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방울 같은 사람들입니다. 믿는 이들은 세상 속으로 투신하되 세속적인 것에서는 멀어져야 합니다. 세상의 중심에서 권력, 명예, 재물을 따르는 것을 거슬러, 다르게, 낯설게, 더욱 차별화된 삶의 형태를 선택하면 좋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것을 추구”하면 좋겠습니다.

“의롭고 경건한” 시메온, 그는 결코 시대의 거짓, 우상, 폭력과 거대 자본, 화려한 소비에 자신을 맡기지 않았습니다. 진실로 깊은 차원에서 자신에게 일어나는 것,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미래의 기억, 그분께서 원하시는 것, 바로 이런 것들에 섬세한 주의를 기울이며 삶의 중심은 무엇인지, 삶에 의미와 방향을 주는 것은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고, 행동하며, 기다렸습니다. 세상도 아니고, 스스로도 아닌, 오직 주님께서 만져 주시고 주님께서 위로하여 주시기를 기다릴 줄 아는 겸손을 지녔기에 시메온은 죽기 전에 구원의 빛을 만난 것입니다. 놀랍게도 “계시의 빛이며 영광”인 구원을 부드럽고 여리고 아주 작으며 “포대기에 싸인 아기”에게서 봅니다. 더욱 놀라운 일은 아무 것도 갖지 않고 무장 해제된 이 아기가 “배척당하는 표징”이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 저희는 당신께 희망을 겁니다. 당신 이름 부르며 당신을 기억하는 것이 이 영혼의 소원입니다.”(이사 26,8).

표지 그림 : 렘브란트 <시메온의 예언> 유채, 98×79cm, 1669년, 스톡홀름 국립미술관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8년 1월의 말씀

복되어라,

복을 짓는 사람들!

 

“새

해를 맞이하였습니다. 우리는 서로 이름을 부르고 좋은 말을 건네며 복을 빌어줍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어쩌면 여전히 아프고, 힘들고, 버겁고, 먹먹하고, 억울하며 당혹스러운 일이 있을지라도 새해 아침은 우리 모두에게 전혀 새롭고 설레는 시간이 열리는 문이기를 바랍니다. 웃음과 울음, 가난과 부요, 상실과 연대 그 모든 것에서 희망이 꿈틀거리고 평화가 흐르며 주님 사랑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깊어지고 넓어지기를 소망합니다.

처음, 하느님께서는 친히 당신 손으로 빚으시어 창조하신 인간에게 선하시고 아름다우신 당신 얼굴을 보여주시며 복을 내리셨습니다. “번성하여라.” 아담에게, 아브라함에게, 이웃에게, 이방인에게도 당신 얼굴을 보여주시며 축복하셨습니다. 바라보시면서 좋아하신 그 얼굴은 찾고 돌아가야 할 그리움의 고향처럼 우리 안에 새겨져 있습니다. “생명의 땅에서 주님의 복을 누리고픈” 시편 예언자도 바로 그 주님 얼굴 뵙기를 간절히 열망하였습니다. “하느님, 우리에게 복을 내리옵소서. 어지신 그 얼굴을 우리에게 돌이키소서.”

주님께서는 한결같이 그러나 늘 새롭게 “땅을 찾아오시어 풍요롭게 하시고 새싹들에게 강복하시며 당신 선하심으로 한해를” 꾸미십니다. 당신 백성인 우리의 고난을 보시고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시며 고통을 함께 느끼시고 아파하시며 우리 모두를 해방과 자유, 치유와 구원의 길로 이끄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라고 말씀하시는 바로 그 하느님께서 우리 일상 한가운데 오시어 함께 숨쉬며 살고 계십니다.

축복은 “좋은 말”이고 얼굴을 통하여 전해지는 선물입니다. 우리가 보고 듣고 접촉하는 것들은 우리 삶의 자리에서 마치 주인인양 이렇게 저렇게 우리를 끌고 다닙니다. 마찬가지로 나에게서 보여지고, 나에게서 나가는 행동, 말, 몸짓, 얼굴 표정은 나의 자리뿐만 아니라 너와 우리 자리의 질을 결정지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주의를 기울여, 믿는 이라면 당연하게 일상의 크고 작은 일들에서 놓치고 싶지 않은 것들을 붙드는 심정으로 사랑과 생명, 축복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들이 바로 주님께서 좋아하시는 것이고 우리의 주인은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손을 드시어 제자들을 축복하시며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축복하시는 우리 주님의 두 손과 말씀은 하늘을 품은 지붕이 되어 오늘의 우리에게도 드리워져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여라.” 제자들은 기뻐하며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하늘로 오르신 주님께서는 우리의 가장 내밀한 곳에서 당신 친밀함을 선물로 나누어 주십니다. 이제 우리는 서로 “빛을 비추고, 복을 빌어 주고, 활기를 불어넣고, 일으켜 세우고, 치유하고, 해방시키는 이 사명으로 날인된 이들, 심지어 낙인찍힌 이들”(복음의 기쁨 273항)입니다.

표지그림 : 시토회 창립자 이콘(프레스코화 2017년)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7년 12월의 말씀

가난의 감각

 

“성

탄이라는 말을 들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감각적 이미지는 전기불로 장식된 휘황찬란한 크리스마스 트리와 빨강 초록 원색의 온갖 장식품들일 것입니다. 기쁘고 흥겹고 연말파티와 모임들, 맛있는 음식이 떠오르는 것이 결코 나쁜 일은 아닙니다만, 성서 속 성탄, 예수님 탄생의 이미지와는 사뭇 다른 것은 사실입니다. 추운겨울, 모닥불, 캄캄한 밤, 여관방조차 찾을 수 없어 만삭인 마리아를 데리고 찾은 마굿간, 짐승들, 가난한 목동들. 이것이 성서의 성탄 이야기 속에 나오는 내용들입니다. 캄캄하고 적막한 시골 어느 구석의 쓸쓸한 밤 하느님의 아들 아기 예수가 태어나 마굿간 구유에 뉘어졌고 탄생을 축하하는 이들은 짐승들과 목동들뿐이었습니다. 이것이 전부입니다.

이 그림 속 동방박사들은 다른 그림들과 달리 화려한 왕의 복장도 빛나는 선물도 없이 추운 밤에 길을 잃고 쭈그리고 앉은 모습이 청승스럽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아기 예수가 태어난 유다 베들레헴과는 아주 먼 거리에 살았던 동방박사들은 아기 예수를 찾다 길을 잃었습니다. 길을 잃고 인간이 만든 지도를 펼쳐놓고 열심히 길을 찾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거쾨더 신부님의 탁월한 통찰은 별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그들을 이끌었던 별은 여전히 그들의 머리 위에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들은 별보다는 지도에 머리를 박고 길을 찾고자 하고 있습니다. 하늘이 이끈 길을 인간의 방식으로 찾으려 한들 가능할 리가 없지요. 이 길은 인간의 지도로 찾을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어떤 감각, 가난의 감각만이 이 별이 가리키는 곳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들은 혹시나 하고 헤로데 왕을 찾아가기도 하였습니다. 그곳에서 만난 성서전문가들은 유다의 왕이 태어날 것이라는 동방박사들의 말을 듣고 ‘유다 베들레헴’일 것이라 알려주면서도 정작 자신들은 찾아 나서지 않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헤로데 왕은 자신의 경쟁자가 나타났다 여기고 아기살해 계획을 세웁니다. 아기가 자랐을 때 자신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도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그저 자신의 왕의 자리가 위태로워진다면 그것이 누구든 무엇이든 제거해야 할 대상이 될 뿐입니다. 동방박사들이 행여나 하고 찾아간 왕은 이런 왕이었습니다. 그들은 왕을 찾았지만 아직 세속의 왕과 생명의 왕을 구별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길을 잃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목동들은 다릅니다. 목동들은 남들 다 자고 있는 한밤중에도 양들을 지켜야 하고 들판에서 제대로 된 음식도 먹지 못하며 들짐승들의 위협에 온몸으로 부딪치는 고단한 삶을 살면서도 세상 사람들에게 양을 훔치는 사람들로 취급받던 그 시대 가난한 이들 중의 한 부류입니다. 이들은 하느님의 아들 아기가 태어난 곳에서 그다지 먼 곳에 있지 않았습니다. 무기, 식량 등 온갖 채비도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천사들이 나타나 알려주었을 때 어떤 의혹도 망설임도 없이 그들은 당장 길을 떠났습니다. 그들은 가난한 아기와 너무도 가까이 있었고 너무도 닮아있었습니다. 그래서 곧바로 찾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가난의 감각입니다. 하느님의 감각입니다.

가난이 몸안 몸밖에 흘러넘쳤기에 천사들이 알려주었을 때 가난한 아기의 소식을 금방 알아들었습니다. 마굿간, 추위, 무관심에도 가난한 아기의 평화로운 잠은 방해받지 않듯이 목동들의 평화의 아기를 향한 발걸음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이들은 완전하고 풍요롭고 휘황한 자리가 아니라 불완전하며 부족하고 삭막한 곳이 하느님의 자리임을 감각으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리는 텅빈 자리, 가난한 자리, 심지어 황폐한 자리입니다. 화려한 곳, 빛나는 곳에서 어슬렁거린다면 하느님 비슷한 것을 찾을 뿐입니다. 아기 예수의 마굿간 바로 그런 곳이 성탄의 자리입니다.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7년 11월의 말씀

 

하느님의 어릿광대

 

“세

속주의와 불신앙이 한창 맹위를 떨치던 19세기 프랑스에 루오 같은 종교화가가 태어난 것은 참 경이로운 일입니다. 실존주의 허무가 깊이 침잠하고 있던 한복판에 그의 섬광과 같은 종교체험이 깃든 작품들은 사람들에게도 경이로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만큼 그의 작품에는 참된 신적 체험이 깃들어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 존재의 슬프고 가혹한 모습을 루오만큼 명확하게 본 화가도 흔치 않습니다. 그럼에도 그의 그림에는 비관주의의 그림자조차 비치지 않습니다. 이 사실들이 또한 그의 신적체험의 진정성을 비춰주고 있기도 합니다. 그의 작품에서는 눈물이 흐릅니다. 하지만 그 눈물은 인간의 고통에 공감하고 그것을 씻어주는 그런 종류의 눈물입니다. 그의 그림에는 또한 분노가 느껴집니다. 그러나 그 분노는 인간을 인간답지 못하게 하는 세상의 악에 접한 이의 참으로 마땅한 분노입니다.

쓸데없는 모든 것을 생략하고 핵심만 남기는 그의 기법 또한 독특합니다. 동양화처럼 여백을 중요하게 여기지는 않지만 그림에 핵심만 남김으로써 그가 전하고자 하는 바가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그의 그림은 애초부터 그저 아름답기만 한 것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인간실존의 고뇌와 고통스런 현실 그리고 하느님의 자비를 빼고서는 루오의 작품을 이야기할 수 없게 됩니다. 그중에서도 광대를 주제로 한 작품이 수적으로도 눈에 뜨입니다. 얼굴만 그린 광대, 서있는 광대, 앉아있는 광대, 줄타는 광대, 말타는 광대, 공던지는 광대 등 종류도 다양하며 양으로도 수 십 점이 넘습니다.

그의 인생 여정을 보면 그의 의도를 감지할 수 있는 부분을 만나게 됩니다. 루오는 볼라르라는 미술 중개상에게 자신의 그림 전체의 권한을 넘기는데, 그가 죽자 그의 상속자들과 그림에 대한 소유권 문제로 재판을 치르게 됩니다. 여차저차 한 과정 끝에 그는 미완성작품들을 회수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그것들을 모조리 불태웁니다. 그가 소송을 건 것은 금전적인 문제가 아니라, 그 스스로 밝히기를 예술은 소중하기에 미완성작들을 세상에 내놓을 수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참 바보같은 사람입니다. 광대 그림은 어쩌면 그 자신일 수도 있습니다. 스스로 자화상이라 한 “도제”라는 제목의 그림보다 광대 그림들이 더 그의 모습을 드러내줍니다. 광대는 약삭빠르게 승승장구하는 세상의 승리자의 반대편에 서있는 사람들입니다. 힘없는 사람, 세상의 변두리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웃음을 만들어내는 그들의 눈에는 슬픔이 가득합니다. 세상 사람들을 웃게 하되 자신은 슬픕니다. 이 양극이 만들어내는 깊은 슬픔, 그 슬픔을 통과한 이의 투명함이 화면 가득 넘칩니다.

그러나 루오는 세상의 양지로는 결코 나갈 수 없으며, 나가더라도 적응하지 못하는 비극적인 인간상을 그리는 데서 멈추지 않습니다. 광대의 얼굴을 예수의 얼굴과 상당히 유사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특히 그 눈빛이 그러합니다. 형용할 길 없는 투명함이 화면을 건너 사람의 마음에까지 와닿습니다. 밀어낼 수는 있어도 부정할 수는 없는 그런 종류의 투명함입니다. 이 투명함 앞에 서면 이들의 삶에 함께 연대할지 말지 결단을 촉구받고 있음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광대의 얼굴에서 예수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은 예수의 마음을 알아들을 수도 없습니다. 더 나아가 루오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이런 이들처럼 세상의 변두리인, 작고 낮고 무시당하고 찌부러진 이들의 부류 속에 속하는 것임을 주장하고 싶어하는 듯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예수의 눈빛을 광대의 눈빛과 동일시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삶과 인간의 고뇌, 모순, 불의에 누구보다 민감했던 루오는 가장 가난한 이들을 통해 우리의 이웃이 누구인지, 우리의 이웃을 그렇게 만든 이는 누구인지를 묻습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광대요, 버림받은 이임을 조용히 그러나 웅변적으로 말해줍니다. 루오는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면서 세상의 한복판, 세상의 꼭대기에서 군림하며 무력한 이들을 사람 취급하지 않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임을 철저히 깨닫고 살아간 성인들의 무리에 속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하느님의 어릿광대였습니다.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7년 10월의 말씀

 

공동체와 잔치,

하나됨의 자리

 

“혼

인을 하고 나면 당연히 잔치 자리가 이어집니다. 요즘에야 다들 식당에서 음식을 먹고 깔끔하게 헤어지지만 예전에는 며칠에 걸쳐 치르는 온마을 잔치였습니다. 거지들도 이때만은 배부르게 한상 받고 아이들 손에도 맛있는 것이 떨어지지 않는 며칠이 이어집니다. 혼인이 당사자들을 맺어주는 예식이라면 그 다음 이어지는 잔치는 결혼으로 맺어지는 부부가 속하는 집안, 마을 전체가 함께 나누는 하나됨의 자리입니다. 그 마을에 있는 거지들도 배제되지 않는 자리, 온동네 사람들이 한 마음으로 새부부의 출발을 축하하는 자리입니다.

신랑이 신부에게 속하듯 신부도 신랑에게 속하고, 모든 이가 함께 이 하나됨을 축하하며 한 마음이 되는 혼인잔치는 성경과 그리스도교 전통 안에서 자주 하느님나라에 비유되곤 하였습니다. 그리고 전통적으로 수도승 공동체는 이 하느님나라의 표상으로 여겨지곤 하였습니다. 현실 안에서 보자면 수도승공동체에 속한 사람으로서는 몸이 오그라들 만큼 부담스러운 것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참으로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수도승공동체가 멋지고 훌륭하게 살기 때문에 하느님나라의 표상이 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 공동체가 아무리 잘산다 하여도 하느님나라는 인간적인 것에 속하는 것이 되어버리고 말며, 그 공동체의 잘사는가 못사는가 하는 사실에 따라 결정되고 맙니다.

그렇지 않고 하느님나라는 이미 이 땅으로 쳐들어오고 있는 하느님의 온전한 선물입니다. 이미 우리에게 와있는 하느님나라, 하느님의 영역, 하느님의 다스림을 얼마나 깊이 사무치게 깨닫고 있는가에 따라 한 수도승, 한 공동체의 삶의 질이 달라집니다. 하느님나라가 이미 와있음을 깨닫는 사람은 이미 온전히 하느님의 소유가 된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마음, 하느님의 사랑, 하느님의 열정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하느님께 온전히 속한 이는 온전히 자신에게 속하며, 타인과도 일치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생명과 죽음, 너와 나, 좋은 것과 나쁜 것의 구별도 이전과는 전혀 달라집니다. 그리하여 죽음 안에서도 생명을 보고, 너 안에서 나를 발견하며, 나쁜 것이 곧 하느님의 선물임을 깨닫기에 그런 이의 삶은 잔치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죽음과 내게 낯선 이웃과 나쁜 것 안에서도 사라지지 않는 기쁨은 하느님의 빛이요 노래입니다. 이 기쁨은 삶의 무거움과 비탄, 절망을 통과한 기쁨입니다. 심지어 이것들 위에 가볍게 올라선 이의 기쁨입니다. 그러나 이 기쁨은 눈물을 흘리면서도 기뻐하는 것이지, 단순히 아기처럼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늘 기뻐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런 기쁨은 섬세하고 상처받고 부서지기 쉽습니다. 그리하여 기쁨이 부서질 때도 기뻐하는 역설의 기쁨입니다. 우울해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우울을 훨씬 넘어섭니다. 밀려오는 현실이 후쿠시마의 쓰나미를 훨씬 넘어서는 강도를 지니더라도 그 쓰나미를 꿰뚫고 오직 참된 하나를 볼 수 있는 강인함을 지닙니다. 이런 기쁨은 신적인 영역 즉 하느님나라에 속함에서 오는 기쁨입니다. 이렇게 표현해도 된다면 이런 사람은 속하는 영역, 발딛고 선 땅이 다른 사람입니다. 이 때문에 현실에서 일어나는 온갖 희로애락이 그의 기쁨을 결정짓지 못하는 것이지요.

그는 오직 이 땅에 이러한 하느님나라가 확장되는 것만을 참된 목표로 삼으며 갈갈이 흩어진 욕망이 이를 향해 오롯이 방향을 잡습니다. 따라서 이런 사람은 아주 단순합니다.

이런 단순함이 곳곳에 드러나는 공동체는 매일 하느님나라의 잔치가 열리고 있는 것입니다. 희생하는 것이 기쁨이 되고, 네가 잘되는 것이 나의 기쁨이며, 작아지는 것이 자기실현이 되는 그런 곳, 누구나 꿈에도 그리는 곳이 아닐까요? 그런데 이것은 창조 때에 이미 하느님이 우리를 위해 만드신 세상입니다. 샤갈의 창조라는 그림에서 보듯 모든 것이 기쁨의 무지개를 감싸고 춤추고돌며 십자가의 위의 예수님도 스텝이라도 밟듯 경쾌하며 물고기나 곤충이나 함께 하늘을 날고 천사도 인간도 하나의 하늘을 날고 있습니다. 수도승뿐 아니라 인간 모두는 이 나라의 백성이요 주인입니다.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7년 9월의 말씀

 

 

공동체와 혼인, 정배

하느님 사랑의 불꽃

 

“세

 

상은 빛과 신비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 빛은 사람의 얼어버린 마음을 따뜻하게 덥히고, 생동하는 열정으로 가득 채워줍니다. 하느님의 현존과 하느님의 실재적 능력이 펄펄 살아 뜁니다. 하느님은 사람과 생동하는 관계를 맺기를 원하시어 당신의 발가락 하나만큼도 되지 않을 좁디좁은 세상으로 내려오시고, 그보다 더 좁은 사람의 마음 안에서 살아있는 열정으로 가득히 현존하십니다.

무슨 꿈같은 소리, 꿈 중에서도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를 하느냐고 하실 분도 계실 것입니다. 현실을 보라고, 바로 너의 주위를 한 번 둘러보라고 하실 분도 계실지 모릅니다. 그런데 만약 사랑에 빠진 이들이 이 말을 듣는다면 조금은 이해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이보다 몇 배 더 찬란한 세상을 맛보고 있을 것입니다. 암울했던 잿빛 일상이 새로운 광채를 띠며 눈앞에 나타납니다. 어떤 불꽃이 그들 안에 새롭게 타오르기 시작한 것이지요.

고대의 유대인들은 그리스 문화가 세상을 지배하던 기원전 2-4세기에 이 인간의 사랑이 바로 야훼 하느님의 불꽃임을 보았습니다. 이보다 훨씬 더 오랜 이집트, 바빌로니아 문명에서도 사랑은 아가에서처럼 찬양받습니다. 그들의 사랑 노래로부터 많은 영감을 받았던 이 아가서의 저자는 과감하게도 이집트에서 사랑의 여신이 사랑을 관장하던 것을 그야말로 흔적도 없이 싹 밀어냅니다. 그리고 여신의 상징들이었던 노루, 비둘기 등을 사랑의 상징으로 격하시켜 오히려 사랑의 생동감을 더 강하게 해줍니다. 이것을 어떤 학자는 “사랑은 신이다.”에서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로 옮겨가는 데 수천 년이 걸렸다는 표현을 쓰는데, 기가 막힌 통찰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가서의 저자는 인간의 육적 사랑을 동반한 남녀 사랑 안에서 하느님의 가장 강한 불꽃을 보았습니다. 연인끼리의 육적 사랑의 표현 가득한 이 저서가 유대인들의 손에 의해 정경(정통 성경) 안에 든 것은 유대인들의 신적, 인간적 감각의 탁월한 조합의 결과물일 것입니다. 수많은 신비가들이 이 아가서에서 하느님 사랑, 인간 사랑의 분리할 수 없는 깊은 연결과 그 신비적 차원에 매료되었습니다. 가장 특별할 수도 있지만 가장 일반적이기도 한 인간 사랑의 이야기가 하느님 사랑의 이야기가 됩니다. 즉 가장 비종교적인 것이 종교적인 것이 되고, 비종교적인 것 안에 종교적인 것이 가득함을 봅니다. 분리가 없어집니다. 일상이, 지루하고 매일 똑같은 일상이 신성화되고 잔치가 됩니다.

아가서는 갇혀있던 하느님의 불꽃을 세상 안으로 끄집어 내줍니다. 이 불꽃만이 우리를 참으로 생동하게 만들어 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수도공동체는 이러한 하느님의 불꽃을 아가서처럼 세상 안으로 끄집어 내주는 역할을 합니다. 이 불꽃은 수도자 한 명 안에, 모든 사물 안에, 모든 생물 안에, 모든 문화 안에 내재해있지만 단지 꺼내주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이 사랑의 불꽃을 꺼내는 이가 바로 하느님의 정배인 것입니다. 365일 변하는 일도 없이 똑같이 반복되는 하루 7번의 기도, 신적 독서, 노동, 매일 만나는 똑같은 사람이 지루하기 짝이 없는 반복이 아니라 정배의 찬란한 빛을 띠고 다가옵니다.

꿈을 꾸는 것일까요? 꿈은 꾸어야 꿈인 것이지요. 꿈은 허황한 SF영화가 아니라 인간 존재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수도생활을 오직 금욕과 원칙과 규칙으로만 보는 이는 연인의 사랑을 맛볼 수 없고 어쩌면 거룩하되 우울하며 열정과 생동감이 줄어든 마른 빵과 같은 삶을 영위할지도 모릅니다. 수도생활은 하느님 정배로서의 삶이요, 하느님현존의 생동감이 펄펄 뛰어 이미 여기서 하느님나라를 미리 보여주는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