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1년 10월의 말씀

굶어 죽게 되었구나.
일어나 아버지께로

처음에, 꼴을 갖추지 않은 땅은 황량하고 공허하였습니다. 바닥 모를 심연은 어둠에 덮여 있고 물은 일렁거립니다. “빛이 생겨라.”고 말씀하시기 전의 혼돈입니다. “어둠이 심연의 얼굴을 덮고 하느님의 영이 그 물 위를 감돌고 있었다.”(창세 1,2). 장엄하며 경이로운 혼돈입니다. 아름다운 명령의 말씀이 내리실 절묘한 그 순간을 “하느님의 영”이 머물고 견디며 기다리고 있습니다.

한 아들이 자기에게 돌아올 몫을 미리 모두 챙겨서 먼(makron) 곳으로 떠났습니다(루카 15,11-24). 그는 방종하고 천박한 생활을 하며 자기 재산 –실은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을 훼손하여 다 잃었습니다. 가까워야 할 아버지에게서 멀어진 만큼 경계를 지켜야 하는 돼지들의 먹이에까지 손을 뻗쳤습니다. 만족을 모르는 무한 탐식, 무너진 창조 질서, 이제 그의 곁에는 누구도 무엇도 없습니다. 죽음같은 절망, 상실의 격랑만이 곧 집어 삼킬 듯이 어둠 속에서 출렁거립니다. 바로 이때 “하느님의 영”이 움직입니다. 아들의 정신을 흔들어 깨웁니다. “아, 나는 굶어 죽는구나.” 소리없는 각성의 틈을 비집고 빛이 스며듭니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땅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욕망을 떨치고 일어납니다. 아들이 아직도 멀리(makron) 있는데 아버지께서 달려갑니다. 마치 경기장에서 상을 받는 한 사람이 달리듯이(1코린 9,24) 먼 곳까지 단숨에 달려오시어 껴안으며 속삭이십니다. “얘야, 나의 자애는 영원하단다.” 아버지의 집을 기억하기만 하여도 하느님과 우리의 먼 거리는 사라집니다.

아버지 하느님은 사랑이시고(1요한 4,16) 영이십니다(요한 4,24). 하늘과 그 위의 하늘도 그분을 모실 수 없지만(1열왕 8,27) 그분께서 우리의 모든 삶 안에, 모든 실재 위에 현존하시는 주인임을 믿기만 하면 그분은 이미 우리 안에 들어오시어 죽음에서 다시 살리시고 창조를 계속하십니다. 잔치를 베푸십니다. 그러나 “큰아들”(루카 15,25-32)은 그 잔치를 함께 기뻐하지 못하고 화를 냅니다. 그는 과연 누구일까요? 하늘과 땅 안의 피조물들도 자신을 마구 거칠게 다루었던 아들에게 저항합니다. 그러니 지금 바로 “정녕 저희 영혼은 먼지 속에 쓰러져 있으며 저희 배는 땅바닥에 붙어 있습니다.”(시편 44,26) 라고 온 피조물을 향하여 겸손하게 고백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영은 무한한 너머에 계시지만 또한 지금 여기에서 힘차게 활동하시며 듣고 보고 계십니다. “자격 없었음”을 인정하고, 영과 진리 안에서 섭리의 질서를 지키며 충실한 종으로 함께 더불어 살겠다고 약속해야 합니다.

아버지의 집에서 먹는 “생명의 빵”이 정녕 생명입니다. 다른 것은 없습니다. “저희를 당신께 되돌리시고, 저희의 날들을 예전처럼 새롭게 하여 주시기를”(애가 5,21) 항상 청하면서, 기다리시며 달려오시는 아버지께 달려갑시다(히브 12,1). 탐욕은 벗어 버리고, 온 우주를 싸안고 계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입으면 좋겠습니다. 은총이 가득하신 성모님께서도 빠라클레토 성령이 그러하듯 우리를 보호하시고 지켜주십니다.

외젠 뷔르낭(Eugene Burnand 1850-1921) / 자비하신 아버지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1년 9월의 말씀

다 함께 탄식
다 함께 기도

“불

과 열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더위와 추위, 빛과 어두움, 안개와 구름, 땅 위의 모든 것들아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여라.”(다니엘서 3장). 하늘 바람 곳간은 며칠째 열리지 않고 밤조차 낮처럼 뜨거운 날이 계속되고, 우리는 시간경 기도때마다 선풍기 날개 소리에 행여 시편 기도의 노래가 파묻히지 않도록 입술과 아랫배에 더욱 힘을 주었습니다. 그 여름도 지나갔군요. 어려움에 처한 이들의 안타까운 소식이 들릴 때면 옷의 소금꽃을 씻어 말리며 기도합니다. “이 모든 고난과 위험도 이렇게 깨끗이 씻어 주소서.” 초록 꽃대를 쑤욱 뻗으며 순백의 향을 퍼뜨리던 수도원 길섶의 백합들도 9월 햇살 아래에서 시들고 있습니다. 지난 겨울, 낯선 새 한 마리 텅 빈 안마당에서 콕콕콕 언 땅을 두드리더니 늦봄부터는 식구들을 데리고 여기서 지냅니다. 책에서 이름을 찾으니 후투티! 텃새인 딱새들은 낯섦과 다름을 내치지 않고 함께 어울립니다. “기도와 일”을 졸음의 바다에 빠뜨리던 어느 날, 긴 부리로 창문을 톡톡, 고개 드니 신비한 머리 깃털을 세우고 흑백의 날개를 펼치며 천천히 건너편 벚나무로 날아갑니다. 고맙다, 새야. 봉쇄의 일상은 “모든 피조물이 다 함께 탄식하는”(로마 8,22) 희망의 기도에 끊임없이 동참하는 것임을 새삼 퍼뜩 깨닫습니다. “정녕 나는 그들의 고통을 알고 있다. 그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나에게 다다랐다.”(탈출 3,7-9).

지금 비록 비탄과 애통 속에 있어도 기도를 멈추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한숨과 탄식, 울음과 통곡, 말도 아닌 옹알이일지라도 성령께서는 다 들으시고 우리 안에서 기도하십니다(로마 8,26-27). 그리고 순교 성인들의 삶을 기억하고 묵상하며, 탄식하는 우리의 기도에 함께 하여 주시기를 청하면 좋겠습니다. 그들이 죽음 앞에서 남긴 한 마디 한 마디는 하느님께서 즐겨 받으시는 기도입니다. “내 일생에 누님만큼 천주를 사랑하지 못한 것이 한이 되오. …… 내 죄가 무수하다면 또 한편으로는 천주의 자비도 끝이 없으니 이것이 내 오직 하나의 희망이오. 내 힘만 가지고는 한순간이라도 꿋꿋이 견디지 못했을 거요. 참말이지 모든 일에 있어서 우리 힘은 아무것도 아니고 천주의 보호하심이 모든 것을 이룬다는 것을 지금이야말로 그 어느 때보다 인정하오.”(순교자 이 순이의 동생 이 경언의 옥중서한).

시들어 버릴 꽃이 늘 다시 피는 것도, 새가 나는 것도 사랑하는 존재를 향한, 가야 할 고향을 향한 그리움이 있어서입니다. 시련 속에서도 그 그리움 한 자락은 놓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깊은 구렁의 짙은 어둠보다 더 질기고 강하게 당신의 심연에서 우리를 끌어당기며 기다리고 갈망하는 그분께서 우리를 일으켜주실 것입니다. 그날이 오면 “산들이 밀초처럼 녹아내리듯”(시편 97,5) 온 땅의 재앙도 마침내 끝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아버지 하느님께 “큰 소리로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와 탄원을”(히브 5,7) 올리셨습니다. 성부께서도 사랑하시는 당신의 외아들을 죽음에 던지심으로써 온전히 죽음에서 부활시키시고 우리 모두를 당신의 자녀로 차지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감사의 기도를 바칩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죽음이 시작된 거기에서 생명이 솟아나고 나무에서 패배한 인간을 나무에서 승리하게 하셨나이다.”(성 십자가 현양 축일 감사송).

알브레히트 뒤러 / 1520 / 의자 위의 성모님과 아기 예수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1년 8월의 말씀

가장 먼, 가장 가까운

편 예언자는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거듭거듭 “저희를 다시 일으켜주소서. 당신 얼굴을 비추소서.” 라고 기도합니다(시편 80편). 보고 싶은 얼굴, 듣고 싶은 소리가 따로 있는 것일까요? 어색하지 않게 손잡을 수 있을 만큼 친숙하며 부드러운 얼굴, 나의 꿈과 의지를 변경하지 않아도 될 만큼의 부르심일까요? 그러나 정작 그분 얼굴, 그분 소리는 엄청 낯설고 당혹스럽고 모호하며 나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버리고 떠나라는 것이기도 하지요. 도망치거나 핑계를 대면서 응답을 제대로 드리지 못하는 것이 우리 모습이기도 합니다.

주님의 성소에서 분향하던 즈카르야는 천사를 보고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두려워하지 마라.”고 천사가 말하지만 그는 믿지 못하여 벙어리가 됩니다(루카 1,8-23). 그러나 나자렛의 처녀 마리아는 천사를 보고 몹시 놀랐습니다. “기뻐하여라.”는 천사의 인사말이 무슨 뜻일까 곰곰이 생각하지요(루카 1,29). 마치 아이가 퍼즐을 요리조리 꿰맞추며 놀이에 집중하듯. 결국 해답을 찾지 못하여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나요?”라고 묻습니다. 마른 솜이 물을 흡수하듯 천사를 통한 하느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어른”에게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이 터무니없고 놀랍고 황당하건만, 천사와 마리아 두 아이 사이에서는 친밀함과 신뢰가 쌓여 인간을 위한 하느님의 크신 꿈이 시작됩니다. 나자렛 고을에서 일어난 이 일을 회상하듯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nepios 어린이, 아이)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마태 11,25). 믿으셨기에, 하늘보다 더 먼 하늘의 하느님을 자기 자신보다 더 가까이 모십니다.

성모님께서 누리신 가까움은 어떤 것일까요? 낮은 자리, 비천한 자리로 물러나시어 “밖에 서” 계십니다(루카 8,19-21). 예수님을 낳으셨으니 어머니이심에도 불구하고 제자의 자리인 “예수님의 뒤”에서 믿음과 순종과 겸손을 배우시며 모든 이의 어머니가 되십니다. 십자가 아래에서 아들 예수님의 마지막 숨을 받으시고, 두려워 떨고 있는 제자들을 모으시어 함께 한 마음으로 기도하십니다(사도 1,14). 하늘로 오르신 그분의 먼 가까움을 이젠 내적으로 더욱 친밀하게 누리며 성령강림을 맞이하도록 준비시켜 주십니다. 가장 멀리 떠난 아들의 죽음을 품에 안으시더니 이제는 하늘로 올림 받으시어 “아버지 하느님의 품” 안에 머무십니다. 그 자리는 우리 여정의 종착지이며, 한처음 우리 주 예수님께서 계셨던 곳이지요(요한 1,18). 우리도 멀리 계신 낯설고 당혹스러운 하느님을 가깝게 느끼며, 가까이 계신 주님을 알아 뵙고 섬길 수 있도록 성모님께 도움을 청합니다. 저 먼 곳 하늘의 하느님께 가까이 계시기에 중요한, 소소한 우리 일상 안에도 언제나 가까이 계십니다. 넘어지면 일으켜주시고, 눈물을 닦아 주시며 위로하여 주십니다. 하늘 본향의 희망과 기쁨을 지금 여기에서 살게 하십니다. “구세주의 존귀하신 어머니, 영원으로 트인 하늘의 문, 바다의 별이여, 넘어지는 백성 도와 일으켜 세우소서. 당신의 창조자 주님 낳으시니, 온 누리 놀라나이다. …… 죄인을 어여삐 보소서.”(시간경 끝기도 성모찬송가).

팔마 베키오(Palma Vecchio) / 16c / 성모 승천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1년 7월의 말씀

하느님께 발각되기

네딕도 성인은 “누가 수도 생활을 하고자 처음으로 찾아오면 그의 정신이 하느님께로부터 왔는지” 시험해보고, “그가 참으로 하느님을 찾는지(si revera Deum quaerit)”를 검증하고 식별할 것을 요청합니다(규칙서 58장). “하느님, 당신은 저의 하느님, 저는 당신을 찾습니다. 제 영혼이 당신을 목말라합니다. 암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 제 영혼이 당신을 이토록 그리워합니다.”(시편 63,2 ; 42,2). 아름다운 성모 성월인 5월에 우리 공동체는 하느님을 찾는 그리움을 폭포처럼 쏟아내는 두 자매가 새 옷으로 갈아입었습니다. 한 명은 수련기를 마치고 첫서원을 하였고, 다른 한 명은 수련 착복을 하였답니다. 후배를 맞이하면 “내 얼굴을 찾아라.”(시편 27,8)는 말씀을 곱씹으며 살아가는 우리 각자는 자신에게 묻게 되지요. “나는 하느님의 얼굴을 찾고 발견하였는가?”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도는 “하느님 발견의 지복이 거룩한 갈망을 해소시켜 주지는 못한다. …… 하느님을 찾았다고 하더라도 하느님 찾음은 결코 중단되지 않으며 영원 안에서도 계속된다.”고 말합니다. “사랑의 학교”에는 졸업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찾음은 약속과 희망 안에서 이미 받았기에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이것이 결실이지요. “너희가 나를 찾으면 나를 만나게 될 것이다.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내가 너희를 만나 주겠다.”(예레 29,13-14).

우리의 “하느님 찾음”은 그분께서 먼저 찾으셨고, 먼저 사랑하신 그 사랑의 열매입니다. 그런데 숨은 것도 보시고 먼저 찾으시는 분께서 마치도 눈이 어두운 것처럼(창세 27,1), 들리지 않으시는 것처럼 나를 찾지 못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분께서 나를 찾으실 수 있도록 모세가 그랬듯이 신을 벗고(탈출 3,5) 거룩한 땅으로 가까이 다가가야 합니다. 익숙한 내 신발을 벗고 낯설고 거룩한 타인의 땅으로 건너가야 합니다. 그분께 여기 이곳으로 오시라고 청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계시는 곳으로 내가 가야 합니다. 게으름, 질투, 불평, 시기심을 부수고 허물고 뽑아 던져 버리고, 한 처음 그분께서 빚으신 모습으로 광야에 서야 합니다. 내 이기심의 좁은 방에서 빠져나와 하느님께 발각되기. 나의 뜻, 나의 계획의 그물을 잘라 버리고 하느님께 발각되기. 베네딕도 성인은 “찾음”에 있어 좋은 도구를 주었습니다. “모든 영적 욕망을 가지고 영원한 생명을 갈망하라.”(규칙서 4장). 양파의 껍질을 벗기면 눈물이 나듯 쉽지 않으나 신비롭습니다. 외면하고픈 타인의 얼굴에서 찾는 얼굴을 보여 주시기 때문이지요. 더러는 홀연히 혹은 서서히 당신 좋으신 얼굴을 드러내십니다.

오늘이 첫날이면서 마지막 날인 듯 매번 그렇게 시간경 기도를 바칩니다. “주님을 찾는 이들의 마음은 기뻐하여라. 언제나 그 얼굴을 찾아라.”(시편 105,3-4). 사흘 후면, 늦어지는 듯하더라도 어김없이 지체하지 않으시고(하바 2,3) 말씀이신 신랑께서 찾아오실 것입니다. 이 행복한 희망과 사랑을 전합니다. “나는 밤새도록 내가 사랑하는 이를 찾아다녔네. …… 내가 사랑하는 이를 찾으리라. …… 내가 사랑하는 이를 찾았네.”(아가 3장). 약속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마리아님, 하느님의 어머니이시니 우리를 도우소서.

요하네스 페르메이르 17c 마르타와 마리아의 집을 방문한 그리스도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1년 6월의 말씀

놓아 드리지 않겠나이다.

6월,

새벽 산의 초록이 참 싱그럽습니다. “그리스도님, 여기 없는 이들과 앓는 이들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소기원을 바치고 독서기도를 끝낸 후 성당을 나오면, 이미 새들의 Lectio Divina (거룩한 독서) 소리가 하늘을 두드리며 동녘 햇살을 깨우고 있습니다. 하루가 주님 안에서 열립니다. 촘촘한 그물로 맺어진 관계의 일상이 시작됩니다. 사랑하고 미워하고, 애틋하지만 성가시기도 하고, 마주하고 싶지만 멀어지고, 온갖 겸손으로 순종하기도 하나 다시는 보지 않을 듯 논쟁하고, 그때마다 너의 얼굴을 통하여 차츰차츰 낯선 나를 만나고, 서로는 존재의 의미를 알게 되지요. 우리 사이만이 아니라 하느님과도 이러하다는 생각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삶 안으로, 역사 안으로 들어오시어 함께 일하셨음을 지나고 나면 알아차립니다. 그러나 느닷없이 벼락치듯 지금 이 순간에 엄습하시기도 합니다. 숨기신 채 우리 두려움 속으로 쳐들어오십니다. 야곱은 자신의 편이 되고 힘이 될 수 있는 모든 것을 앞서 보내고 혼자 남았습니다(창세 32,23-32). 밤의 어둠과 건너야 할 야뽁강의 거친 물결만이 그와 함께 있습니다. 바로 그 밤, “어떤 사람”이 나타나 씨름을 합니다. 그가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반칙으로 야곱을 절뚝거리게 만든 것을 보면 한밤중의 낯선 이는 까닭없는 “공격자”이군요. 이길 듯한 싸움에서 지게 되자 야곱은 매달립니다. “저는 이 강을 반드시 건너야 합니다. 저를 축복해 주소서. 그렇지 않으면 나는 당신을 놓아 드리지 않겠습니다.” 싸움을 걸어온 낯선 자는 “축복하는 이”가 되었습니다. 야곱이 매달리며 씨름한 사람이 누구인지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 사투 끝에 야곱은 이스라엘로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야곱만 변화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도 당신을 변화시키시며 드러내십니다. 싸움을 거는 “낯선” 사람에서 “축복하는” 사람으로, “이스라엘의 하느님”으로 당신을 알리십니다. 하느님의 구원 의지와 태생 싸움꾼(창세 25,22) 야곱의 끈질긴 집념의 승부는 잊지 못할 장면입니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결코 피할 수 없는 산, 건너야 할 강이 있고, 어처구니없이 ‘공격당할 수도 있음’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늘 무엇인가를 붙들고 씨름하듯 매달리지요. 붙잡고, 놓지 않고, 결코 거리를 두지 말아야 할 것은 하느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분께서 주님으로서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시고 당신의 일을 하시도록 계속 그분을 밀어붙이며 재촉하는 것이지요. 나의 책임과 의무를 그분께 떠넘기는 것이 아니라 기도의 몫을 다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투쟁이니까요. 우리는 누군가의 삶을 기억하며 그가 실망의 늪에 빠지지 않도록, 두려움에 함몰되지 않도록, 죽음의 구렁에 떨어지지 않도록 내 목숨을 걸고 투쟁하듯 기도해야 합니다. 폭력과 무죄한 이들의 피로 물드는 척박한 세상을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지금 일어나는 일들은 당신께 어울리지 않습니다. 당신께는 어울리지 않습니다.”(창세 18,25). 하느님께서도 마음을 바꾸십니다. 응답이 없어도 쉽게 물러서지 말고 그분을 놓지 말아야 합니다. 숨어 계시지만 알려지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기도보다 더 간절히 그분께서 먼저 찾고 계십니다. 싸매 주시고, 살려 주시고, 일으키시어 우리가 다시 그분 얼굴 앞에서 살게 하여 주십니다. 하느님과 야곱, 두 승자에게 그러했듯 우리에게 해는 떠오릅니다.

지거 쾨더(Sieger Köder,1925~2015) <해가 야곱 위로 떠올랐다.>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1년 5월의 말씀

만남,
두려움과 끌림

물이 찢어질 만큼, 두 척의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 될 만큼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되자 시몬 베드로는 그만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립니다(루카 5,1-11). 낯선 상황이네요. 어마어마한 양의 물고기들이 파닥거리는 소리, 눈부신 비늘빛, 단지 억세게 운 좋은 날이라고 여겼던 것은 아닌가 봅니다. “몹시 놀란” 베드로는 죄인임을 고백합니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어쩌면 함께 일하던 어부들 중에는 두려움을 감당할 수 없어 도망친 이들도 있었겠지요. “두려워하지 마라.” 베드로는 즉시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통하여 과연 무엇을 보고 누구를 만난 것일까요?

누군가, 무엇인가를 대면하여 잠시의 망설임도 주저함도 없이 바로 그것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모세(탈출 3,1-6), 이사야(이사 6장), 의로운 요셉(마태 1,18-2,23), 파트모스 섬의 요한(묵시 1,9-20)이 그러합니다. 이들은 다소 차이는 있을지라도 무시무시한 두려움의 신비(mysterium tremendum) 앞에 압도당하지만 동시에 매혹적인 신비(mysterium fascinans)에 깊이 이끌리어 자기의 실존과 운명을 내어 맡깁니다. 물러서는 것이 아니라 다가갑니다. 그리하여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라고 응답하며 경외로운 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나가 됩니다. 이러한 체험은 몇몇 선택된 이들만의 것일까요? 탈출기 19장을 읽으면 모세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무서우리만큼 놀라운 하느님의 두려운 현존을 체험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하느님을 배반하고 또 배반하여 주님을 분노케 합니다. 까닭이 무엇일까요? 그들은 모세와는 다르게 “멀찍이 서 있었습니다.” 이 말을 성경은 두 번씩이나 전합니다(탈출 20,18.21). 죽음의 공포, 마지막 순간의 뒷걸음 때문에 하느님의 바다가 아닌 불안의 늪으로 빠져든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 경험에도 크든 작든 “몹시 놀라는”(루카 1,29) 낯설고 두려운 일이 생깁니다. 한낱 피조물인 인간의 약함과 불안, 때론 경외감을 느끼지 못하는 무감각과 불신 때문에 쉬운 길, 익숙한 자기 중심성으로 도망가기도 하지요. 경험을 정직하게 겸손한 마음으로 응시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기도하신 성모님께 도움을 청합시다. 성모님께서는 우리의 그 경험이 두렵고도 떨리는, 그러나 한없이 매혹적인 하느님의 신비와 만나는 초대임을 알게 하여 주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 “그분께서 아무 자격 없는 나를 당신의 자비 안으로 맞아주셨기에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앞에서 기뻐 뛰나이다.”라고 노래할 수 있기를. 무엇에도 누구에게도 매이지 않고, 오직 우리를 위해 생명을 내어주신 예수님의 아버지 하느님께 매인 사람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안드레아 델라 로비아 / 성모 영모 (15C) / 테라코타 / 라 베르나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1년 4월의 말씀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처음, 땅은 텅 비었고 어둠이 덮인 깊은 심연 위에는 하느님의 영이 감돌고 있습니다. 바로 그 시간인 듯한 곳에서 어머니를 뵈었습니다. 주님에게서 받은 모든 것을 돌려드리고 마지막 남은 숨을 맡기고 계셨습니다. 코로나로 인한 “거리 두기”의 재앙 앞에서 자식은 속수무책이었건만 하느님께서는 함께 가까이 계셨군요. 몸으로 낳은 자식들에게 살과 피를 남김없이 내어주고 이제 텅 비었습니다. 만지면 산산이 부서질 것같이 한 점 무게도 없고, 붙잡을 것도 잃을 것도 없는 빈손, 오직 통째로 삼킨 그리움만 목에 걸려 있습니다. “끝”인 죽음을 눈앞에 둔 인간의 모습입니다. 주간 첫날 매우 이른 아침, 무덤으로 달려간 여인들이 본 “빈 무덤”을 생각합니다. 투명해지는 어둠을 뚫고 소리가 들립니다. “정녕 그대는 아름답구려, 나의 애인이여, 아름답구려.”(아가 4장). 신랑은 당신에 대한 애틋하고 오롯한 그리움을 간직한 신부를 맞이합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생명의 시작입니다. 그 경이로운 돌문은 하느님에 대한 인간의 그것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그리움으로 열렸습니다.

많은 군중이 예수님을 따르며 밀쳐 댑니다(마르 5,24-34). 주님은 그 모두에게 한결같이 좋으신 분이시며, 자비는 당신의 모든 피조물 위에 미치십니다(시편 145,9).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련한 이와 넋이 꺾인 이, 당신의 말씀을 떨리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을 먼저 굽어보십니다(이사 66,2). 그 군중 속에 한 여인이 있습니다. 그녀는 오랫동안 우상에 흔들리며 절뚝거리던(1열왕 18,26) 걸음을 멈추고 생명이신 한 분 주님께로 돌아섰습니다. 이제는 그분 뒤에 서서 자신의 고통을 내맡깁니다. 그러자 그분은 영원에서부터 마치 처음처럼 사랑으로 다가오시며 말을 건네십니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마르 5,30). 옷자락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하늘은 땅에 닿아, 하느님을 외면한 채 쏟아부었던 헛되고 무의미한 고생을 유의미로 바꾸어 주십니다. 치유된 여인은 분명 주님의 그 눈길로 다른 이들을 바라보며, 주님께서 그러하셨듯이 아파하는 이들에게 가까이 다가가 다정한 말을 건네고 이웃이 되어 줄 것입니다. 은총은 그렇게 닮아가고 부활의 “알렐루야!”처럼 퍼져나가는 것이니까요.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을 백성의 큰 무리도 따라갔고, 그중에는 예수님 때문에 가슴을 치며 통곡하면서도(루카 23,27), 자신의 슬픔에 함몰되지 않은 한 여인이 있습니다. 베로니카, 그녀는 자신이 겪는 고통에서 빠져나와 예수님의 고통에 다가갔습니다. 자신의 눈물보다는 타인의 눈물과 땀, 피를 닦아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녀의 수건에 당신 얼굴을 인장처럼 새겨주십니다. 고통(passio)의 땅에서 연민(compassio)을 발견하는 용기있는 이들에 의해 땅은 열려 구원의 꽃이 피어납니다(이사 45,8). 바로 이 부활의 자리, 인간의 울음과 하느님의 울음이 만나 의로움이 열매 맺습니다. “누가 내 헐벗은 몸에 옷을 입혀 주었느냐? 누가 굶주리는 나에게 먹을 것을 주었느냐? 누가 내 갇힌 몸을 풀어 주었느냐?”(마태 25,31-46). 고통을 돌본 이에게 새겨진 그 얼굴은 어둠의 골짜기를 지나는 우리에게 위로가 되고 빛이 되는 그리스도의 얼굴입니다.

엘 그레코 / 베로니카의 베일에 새겨진 예수님의 얼굴(16C) / 톨레도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1년 3월의 말씀

아빠, 아버지.

음서는 요셉을 “다윗의 자손”이라 부르며 “의로운 사람”(마태 1,19)이라고 말합니다. 시편 예언자는 “하느님의 가르침이 마음에 있어 걸음이 흔들리지 않는”(시편 37,31) 이를 의인이라고 합니다. 하느님의 가르침을 “가슴속에”(시편 40,9) 즉, 내장속에 새긴 사람입니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 새겨진 법을 버리는 것은 더더욱 어렵지요. 의로운 요셉은 가슴에 새겨진 율법, 앞날에 대한 자신의 계획, 세상의 이목에서 감히 이탈합니다. 같이 살기 전에 잉태한 약혼녀를 보물을 취하듯 맞아들입니다(παρέλαβεν / parelaben)(마태 1,19-24). 잠에서 깨어나 하느님을 닮은 방으로 들어간 것이지요. 타인의 수치를 세상에 드러내지 않고 소문없이 처리하는 것은 예사롭지 않은 온유한 수용이지만, 요셉은 그것을 훨씬 넘어섭니다. 그의 온유는 주님께 대한 철저한 순종이고, ‘아기’로 오신 하느님에 대한 탁월한 돌봄입니다. 그의 온유와 순종, 돌봄의 책임은 우리 믿는 이들이 닿아야 할 종착지이겠지요. 요셉은 거듭거듭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천사가 알려주는 낯설고 험한 길을 떠납니다. 자신의 선입견, 고정된 가치관, 안정의 기득권을 고집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당연한 듯 담담하게 전합니다. “요셉은 일어나 밤에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παραλαμβάνω / paralambano) … 갔다.”(마태 2,14.21).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아!”하고 부르시자 그가 “예, 여기 있습니다.” 라고 대답합니다. “너의 아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사악을 … 나에게 번제물로 바쳐라.”(창세기 22장). 한마디 항변도 없이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 일어나 번제물을 사를 장작을 팬 뒤 아들 이사악을 데리고 하느님께서 자기에게 말씀하신 곳으로 길을 떠납니다. “믿음으로”(히브 11,17). 아버지는 손에 불과 칼을 들고 아들은 번제물을 사를 장작을 지고 그렇게 함께 걸어갑니다. 신비의 무게로 온 세상은 침묵하고 아들의 소리만 있습니다. “아빠!” “얘야, 나 여기 있다.”(창세 22,7). “나 여기 있다.”라는 아버지의 응답만으로 두려움과 공포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 우리는, 보고 계시고 마련하시는 아버지가 계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 아버지께서 크고 작은 일상의 버거움을 견디게 하는 충실함과 희망을 주시고 신앙을 자라게 하십니다.

“일어나” 마음의 귀를 열고 타자의 밤으로 들어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누군가는 한낮의 어둠속에서 “아빠, 아버지”라고 울부짖으며 침묵하시는 하느님을 찾고 있습니다. 멀리 떠나있던 다른 이는 이제야 제정신을 차리고 아버지의 집을 향하여 발걸음을 옮깁니다(루카 15,11-32). 그는 감히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지도 못합니다. 우리는 그 소리를 향하여 다가가 그들을 맞아들이는 아버지가 되도록 초대받았습니다.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성 요셉의 해’ 교서에서 “분명 어떠한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요셉과 같습니다.” 라고 말씀하시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그림자이며, 더 큰 부성을 보여주는 표징”(아버지의 마음으로 Patris Corde)이어야 한다고 당부하십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인하여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는 은총을 받았으니, 이제 다른 이를 향하여 “아버지가 되는” 은총도 함께 청하면 좋겠습니다.

렘브란트 / 자비로우신 아버지 (1669년)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1년 2월의 말씀

내 얼굴 앞에 서라.

“그

대는 서둘러 나에게 빨리 오십시오. 데마스는 나를 버리고 …… 크레스켄스와 티토도 …… 구리 세공장이 알렉산드로스가 나에게 해를 많이 입혔습니다. 나의 첫 변론 때에 아무도 나를 거들어 주지 않고, 모두 나를 저버렸습니다.”(2티모 4,9-16 참조).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고, 그리스도 때문에 그 모든 것을 쓰레기로 여긴 바오로의 고백입니다. 사도 역시 평범하고 일상적인 두려움, 불안, 정신적 고독을 느꼈군요. 굳센 믿음의 희망, 담대함, 복음 선포의 열정을 지닌 그였건만. 한낱 인간의 고독이 이러하다면 영원하신 하느님의 아드님, 우리 주 예수님께서 겪으신 버림받음의 고독은 어떠했을까요?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 따르던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나고, 멀찍이 떨어져서 뒤따르던 베드로마저 배반했지요. 우리와 조금 더 가까운 바오로의 고독한 절망을 이해하면서 감히 예수님 고통의 신비에 한 발짝 다가갑니다. 우리를 위해, 우리를 앞서, 스스로 버림받아 자신을 온전히 비워내신 분.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사람들에게, 완전히 버림받는 시련을 허락하신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구체적인 체험의 강도는 다를지라도 누구에게나 주어질 수 있는 현실입니다. “왜?”라고 묻지 않을 수가 없지요. 그런 고통이 왔다면 십자가 위의 예수님께서 이미 가신 길이고 바오로와 다른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앞서 걸어간 길임을 기억해야겠지요. “주님께서는 내 곁에 계시면서 나를 굳세게 해 주셨음”을 고백할 수 있도록 사도의 전구를 청합니다.

사도 바오로만큼이나 열정적이었던 엘리야 예언자를 만나봅니다. 밤낮으로 사십 일을 걸어, 하느님의 산 호렙에 이미 이르렀건만 “주님께서는 계시지 않았습니다.” 바람 가운데도, 지진 가운데에도, 불 속에도 계시지 않았습니다(1열왕 19,9-18 참조). 카르멜 산에서 위풍당당하게 사백 오십 명이나 되는 바알의 예언자를 사로잡은 엘리야는 어디로 갔을까요? 지금 그는 동굴의 어둠 속에서 얼굴을 가린 채 웅크리고 있습니다. “일어나 내 얼굴 앞에 서라.” 엘리야를 동굴에서 나오게 한 소리는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였습니다. 그저 감미로운 사랑의 속삭임일까요? 아닙니다. 스스로가 설정한 현실, 이미 알고 있는 하느님의 얼굴, 자신의 계획, 자신의 의지, 그 모든 것들이 “발에 밟히듯 뭉개어지면서 산산조각으로 부서지는 소리”였습니다. 그렇게 내면이 다 비워지고 오직 침묵만이 남았을 때, 밖에서 주님의 소리가 들려옵니다.

주님께서는 여러 두려움과 불안에 우리가 홀로 맞서도록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밖에서 우리 문을 두드리십니다. “함께 있자.” 더 가난한 이의 얼굴로, 초라한 얼굴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 얼굴을 맞아들이면 우리의 가난과 어둠, 초라함을 당신 것으로 삼으십니다. 그러나 우리 힘만으로 일어나서 문을 열 수는 없습니다. 끊임없이 은총을 청하는 것이지요. “다시 일어나게 하여 주소서. 다시 보게 하여 주소서.” 바다의 별이신 성모님께서 우리를 위해 전구하시며 우리와 함께 기도하십니다. 당신 아드님의 얼굴 앞에 설 수 있도록.

Sieger Köder/불이 지나간 후 부드럽고 조용한 소리가 들려왔다.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1년 1월의 말씀

새로운 얼굴

“나

는 내 연인의 것, 내 연인은 나의 것”(아가 6,3). 이 놀라운 교환 체험의 처음을 기억하시나요? 어린 시절, 엄마의 얼굴을 빤히 올려다보다가 요술에 걸린 듯, 신비에 사로잡힌 듯 “엄마! 엄마! 엄마 눈 안에 내가 있어요!”라며 환성을 터뜨린 때가 있었지요. 그 경이로움을 꺼내어 새로운 듯 만지니, 맑은 새벽 하늘이 쫘악 찢기면서 별들이 후두둑 쏟아지는 그림이 겹쳐집니다. 그날에 한 소리 새겨졌지요. “얘야, 네 눈 안에는 내가 있단다.”

사람은 모방하는, 닮아가는 존재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욕망을 모방하고, 모방하면서 욕망하고 경쟁하고 … 점점 서로에게 짐승처럼 되어갈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경탄하고, 정겹게 다가가며 사랑하고 서로 존경하고 함께 기뻐하고 함께 어려움을 겪으며 점점 “참사람”이신 주님의 얼굴을 닮아가는 길이 분명 있습니다. 좁고, 가파르고, 때론 숨쉬기조차 힘들고, 끝이 없을 듯 험난한 그 길의 종착지에서 “새로운 얼굴”을 얻은 이들이 있습니다. 성조 요셉도 그러합니다(창세기 37장-50장). 아버지 야곱이 다른 아들보다 자신을 더 사랑하였기에 형들에게서 미움을 받고 다정한 말조차 나누지 못하고 끝내 “물 없는 빈 구덩이”에 던져졌습니다. “은전 스무 닢”에 노예로 팔려가고, 치욕스러운 누명의 감옥살이, 재앙인 “기근”으로 인하여 드디어 형제들과 대면하는 시간이 왔습니다. 재앙이 하느님 은총의 다른 얼굴인가 봅니다.

형들은 아직 자신들의 얼굴로 동생을 만나야 했기에 두렵기만 합니다. “요셉이 우리에게 적개심을 품고, 우리가 그에게 저지른 모든 악을 되갚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동생 요셉은 깊은 눈물의 강에 이미 다 씻어버렸으니 어떤 얼룩도 맺힘도 겨자씨 한 알 만큼의 적개심도 없는 전혀 “새로운 얼굴”입니다. “두려워하지들 마십시오. 내가 하느님의 자리에라도 있다는 말입니까? … 이제 두려워하지들 마십시오. 내가 형들과 조카들을 부양하겠습니다.” 이것이 정녕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놀라운 용서와 화해입니다. 비록 인간은 악을 꾸미지만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선으로 바꾸십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버림받은 그때부터 아버지 야곱의 얼굴을 붙잡고 꿈과 사랑을 잃지 않았겠지요. 아버지의 얼굴을 기억하며, 야곱의 삶에 늘 함께 계셨던 “하느님의 얼굴”을 찾고 또 찾았겠지요. “내가 너와 함께 있으면서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켜 주고, 내가 너에게 약속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않겠다.”(창세 28,15).

“근심하는 이들의 위로자”이신 성모님의 인도로 영원한 임금이시며 영원한 신랑이신 주님을 감히 부릅니다. “나의 연인이여!” 성령 안에서 이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는 이의 영혼은 복됩니다. 무엇을 희망하더라도 이미 받을 것임을 믿으니까요. “주님께서는 당신을 부르는 모든 이에게, 당신을 진실하게 부르는 모든 이에게 가까이 계시다.”(시편 145,18). 여전히 어둑하고 위태로운 현실일지라도 말씀과 기도 안에서 주님께 더 가까이 가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당신 얼굴을 보여주시고자 달려오실 것입니다(야고 4,8 참조). 가난한 우리 이름을 부르며 “나 여기 있다.” 말씀하십니다.

길의 인도자이신 성모(Hodogetria) / 15C. 러시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