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3년 9월의 말씀

아이들의 세계가 있는 세상

7,8월

무더위와 장마를 지낸 우리에게 좀 신선한 기운을 불어 넣어줄 그런 그림을 찾다 만났는데,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좋은 그림입니다. 60, 70년대에 학창 시절을 보낸 저에게는 너무도 익숙한 분위기의 그림으로, 그리움이 훅 밀려오게 합니다. 도시의 놀이터는 물론이요 시골에 가도 이제는 찾아볼 수 없는 그 옛날 그 시절의 모습이 되어버린 장면입니다. 인공으로 꾸며져 돈을 내고 들어가는 놀이방이 있고 아이들은 자신이 애써 구상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재미있고 호기심을 만족시켜줄 시설과 장난감들이 수북수북 쌓인 곳이라 들었습니다. 깨진 사금파리, 옥수수 껍질까지 활용해서 소꿉놀이를 하노라면 머리든 마음이든 이리 저리 굴릴 수밖에 없는 일은 아예 없어져 버렸고, 함께 놀 친구도 뭐 그리 그리울 일이 없는 것이지요. 서로 부딪치고 그래서 양보하는 법도 배우고, 머리를 맞대고 방법을 강구하고, 인원수가 모자라니 누구 누구를 더 불러오자고 아이들 나름으로 계획도 세우고 하면서 사회성과 리더십이 길러지는 귀찮은 과정이 싹 사라져 아주 편하게 생각없이 놀 수 있는 놀이터가 곳곳에 있습니다.

저 아이들의 모습에서 몇 겹의 그리움이 산그림자처럼 겹치며 뭉개뭉개 안개를 피워올립니다. 아이들 나름의 세계가 있는 시대를 살아온 복됨이라 할까요. 아이들의 세계는 어른들의 세계와는 달라야 하지요. 요즘 아이들은 학교 수업 마치기 바쁘게 수영에 피아노에 수학, 영어, 국어 등 배우러 다니느라 자신들의 세상이 없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탈출해버린 아이들만이 자기들의 세상을 구축하는데 그곳이 어떨지는 저로서는 감히 짐작이 가지 않습니다. 인위적으로 계산된 세상, 그곳의 법칙과 논리에 따라 자신을 키워가야만 성공하는 세상의 틀 안에서 자신의 개성 따위는 사치스러운 놀이나 쓰레기 취급을 당합니다.

아이다움이 살아 숨쉬는 곳에서야 어른들도 제대로 숨을 쉴 수 있지 않을까요? 그래서인지 예수님도 복음에서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신 것이겠지요. 아이가 아이다워지려면 엄마 아빠의 믿음직스런 그늘이 있어야 합니다. 노골적인 천막, 그것도 절대로 찢어질 리 없는 천막으로 아이를 가려줄 일이 아닙니다. 아이가 느낄 둥 말 둥 그래도 아이는 그것을 마음속 깊이까지 느낄 수 있는 그런 그늘 아래서 아이는 걱정 없이 뛰어놉니다. 그리고 이 그늘은 보일 듯 말 듯 해도 아이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그 위를 덮고 있지요. 그래서 아이는 자신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스스로 알게 됩니다.

자신의 키에 맞는 그 세상에서 놀이를 배우고 친구를 사귀고 싸우기도 하고 화해도 하고 작전도 세우고 실패도 하며 약함과 강함을 골고루 경험하며 아이는 어른이 되어갑니다. 친구들과 놀아본 적 없는 아이들이 커서 직장에 다니게 되면 그 세상은 온통 위협과 불신으로 가득 찬 곳으로 경험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경험해보지 못했고, 학교에서도 가르쳐준 적이 없는 세상이니까요. 이런 사람들은 늘 아이의 키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어디를 가든 자신에 앞서 모든 것을 준비해준 천하막강 천막, 부모의 틀이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부모는 또 그만큼 투자했으니 건강한 어른이기를 기대합니다. 키워지지 않은 것을 기대하는 부모나 늘 어떤 보호막이 있기를 기대하는 어른-아이나 불행하기는 별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

그림을 보면 서둘러 앞서가려다 넘어지는 아이, 어떻든 꼬리를 떼어내려 앞 아이의 허리를 잡고 안간힘을 쓰는 아이, 그런 상황을 온몸으로 쳐다보며 앞으로 나아가려는 아이들의 역동적 움직임이 선명한 가운데 주변 자연은 대조적으로 아주 고요합니다. 아이들의 온갖 야단법석을 받아안는 땅은 어머니지요.

윈슬러 호머, snap the whip, 1872, 56×91.5cm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3년 8월의 말씀

이미 꽃이 된 여인

그림을 만나는 데는 의외로 현실 안의 변수가 상당한 영향을 미칩니다. 이 그림을 처음 만났을 때 제게는 고갱의 “타히티의 여인”과 같은 원시주의적 분위기가 느껴졌습니다. 이 화가의 걸어온 걸음으로 볼 때 틀린 말은 아니지만, 또 딱 그대로 맞아떨어진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보게 된 데는 눈 수술 후 보이는 것이 편치 않게 된 제 눈 덕분이었지요. 제목을 몰랐던 것도 한몫을 했고요.

나탈리아 곤차로바는 아르누보에서, 야수파에서 입체파, 미래주의, 추상주의까지 다양한 현대미술, 아방가르드의 스타일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모두주의 또는 모든주의 Everythingism 대표주자라 불립니다. 뭐 한 마디로 다재다능하다는 이야기겠지만 예술은 또 그것만으로 다 되는 것은 아닌가 합니다. 어찌 되었든 그림은 자주 만나고 자세히 보고 마음을 담아 보아야 나의 창을 두드리며 다가옵니다. 다른 안경으로 바꿔 끼고 그림 앞에 앉자 아주 새로운 그림으로 제 마음을 두드려주었습니다. 저 아름다운 꽃들은 타히티에서처럼 자연 안에 제가 피고 싶은 대로 피어난 야생화들이겠거니 했더니 꽃줄기들 위에 걸쳐진 삽이며 화분이며 모든 것들이 사람이 가꾼 꽃들임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타히티의 여인들처럼 자연 속에 꽃과 함께 유유자적하던 것으로 보였던 여인들은 꽃을 가꾸는 일꾼들 아니겠습니까. 잠시 사고정지. 그리고 새롭게 그림 앞에 앉았습니다. 정말이지 처음과는 다른 물결로 저의 창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게 된 것은 또 다른 설렘이요, 그림을 만나는 묘미입니다.

화분에 키운 꽃들을 이제 어깨에 이고 가슴에 안고 내다 팔기 위해 어디론가 운반하고 있는 장면이었습니다. 밭일을 하는 우리 수녀님을 보면 농작물이나 과실 등 농사의 결실들은 일종의 자신의 분신과도 같이 느끼는 것을 봅니다. 씨뿌리고 물주고 벌레잡고 행여 싹이 올라오지 않을까 들여다보며 떡잎이 올라오는 순간의 뿌듯함과 씩씩하게 자랄 때의 흐뭇함 행여 병이라도 들면 여러 수단을 강구하는 등 정이 들지 않을 수 없는 여정을 함께 합니다. 꽃을 나르고 있는 여인들의 모습에서도 이런 면이 느껴집니다. 병들고 꼬부라졌다 하여 결실물들을 함부로 다루거나 버리면 우리 농사꾼 수녀님은 몹시 마음 상해합니다. 마치 자신의 일부가 그런 취급을 당한 듯 한 느낌을 받나봅니다. 이 여인들의 모습에서도 이런 면이 느껴집니다. 무척 무거워 보이는 화분을 어깨나 가슴에 행여 떨어질세라 소중히 모시고 갑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여인들 가운데서 유독 좀 달라 보이는 이가 있네요. 만발한 꽃들 앞에 우뚝 서서 화분의 꽃을 응시하고 있는 왼쪽 여인은 노동에 푹 빠진 다른 여인들과 달리 정성으로 키운 꽃을 보내며 마지막 대화라도 나누는 듯 합니다. “그동안 고마웠어. 너를 키우고 바라보느라 노동의 힘겨움도 잊을 수 있었단다. 어딜 가든 착한 마음 주인을 만나 사랑받고 살거라.” 뭐 이렇게 말을 건네고 있는 듯 보입니다. 눈을 내리깔고 있는 다른 이들의 표정과는 달라도 많이 다릅니다. 노동의 힘겨움에 찌들어 기껏 키운 꽃의 아름다움도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정작 아름답게 꽃을 피워낸 이들에게 꽃은 무거운 노동일 뿐이요, 자신들의 집이나 자신을 아름답게 해줄 것들이 아닌 것이지요. 그런데 이 여인의 표정과 몸은 다른 것을 말해줍니다. 노동의 힘겨움 속에서도 잃지 않은 꽃과 하나된 마음의 아름다움이 꽃을 바라보느라 환히 열린 눈의 창으로 투명하게 비쳐보입니다. 몸도 꼿꼿하지요. 꽃을 키우며 꽃과 하나된 마음은 꽃을 돈벌이 수단으로 보는 이들은 감히 다가가지도 못할 것입니다. 땅이나 산을 투기 대상으로 보는 이들이 그 산천의 아름다움은 즐기지도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아름다움을 키워내는 이, 그리고 그것을 찾아내는 이 세상을 아름답게 합니다.

나탈리아 곤차로바 ,“정원 가꾸기”, 1908년, 102.9 ×123.2cm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3년 7월의 말씀

여러 얼굴 여러 마음 그리고 …

그림을 보는 순간, 여러 버전의 메두사 그림이 떠올랐고, 그리스 신화 안에서 가장 여러 가지 설이 많아 그 유래가 확실하지 않은 것 중 하나입니다. 많은 분들이 이미 아시겠지만 머리카락이 꿈틀거리며 뒤엉킨 뱀으로 이루어진 여인입니다. 사실 심장 약한 사람은 그림을 보는 것만으로도 섬뜩해질 법한 그런 모습이지만, 이렇게 저주 받기 전에는 굉장한 미인이었다고 합니다. 그 모습이 너무 끔찍해 그녀를 본 사람은 돌로 변했다고 하니 그럴 만도 하지요. 뭐 그리 끔찍한 것에 연결시키느냐는 분도 있겠지만, 늘 그렇지는 않더라도 우리 인생에 있어 가끔은 괴물스런 존재가 하나도 아닌 여럿이 자신 안에 있음을 발견하는 것은 특별한 사람만이 아닐 것입니다. 예를 들면 사이코패스라든가 심각한 인격장애를 지닌 이들이 자신에 대해 이런 생각을 하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심각한 착각입니다. 이런 이들은 자신을 괴물이 아니라 지극히 정상이라 생각합니다. 정신과 의사들이 한결 같이 하는 말은 자신이 정신적으로 병들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낫기가 쉽고,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을 정신과까지 데리고 가는 일이 사실 가장 큰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은 분열되어 있어도 분열된 지도 모른 채 괴물로 살아가고 있는 슬픈 존재인지도 모릅니다.

이 그림은 분열된 인간성의 신호로 혹은 자신의 또 다른 모습의 응시라는 양쪽에서 바라볼 수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양면성은 그 자체로는 건강한 인간성의 표시라고도 볼 수 있지요. 기쁘다 해서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는 것은 인간 개인 그리고 그 사람을 둘러싼 환경이 있기 때문입니다. 기쁜 일이 생겼지만 내면에는 해결되지 않은 슬픔이나 분노가 있을 수 있고, 나는 기쁘지만 함께 살아가는 가족이나 지인은 힘겨운 상황일 때 어른이라면 그 기쁨을 드러내지는 않습니다. 또한 기쁘다 해서 그것을 온통 밖으로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안으로 거두는 것은 나이 들어가면서 얻는 성숙의 표시이기도 합니다. 만약 한 얼굴밖에 없다면 고통으로 눈물 흘리는 사람 앞에 기뻐 웃고 있는 그야말로 괴물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적 분열이 일상이 되고 거의 일반화된 현대 세계에서는 이보다 훨씬 복잡한 양상을 띠고 나타납니다. 에곤 쉴레가 자신의 모습을 백 점이 넘게 그린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화상들에는 한결같이 우울한 모습이 깃들어 있습니다. 이중 자화상에서 분노 가득한 아래 쪽 얼굴만이 아니라 천진난만한 눈길로 바라보는 듯한 표정 속에도 슬픔이 엿보입니다. 그 정도가 아니라 그의 그림의 대표적 성격인 가늘고 구불거리는 선 자체가 보는 이로 하여금 불안감 아니면 적어도 편하지 않은 느낌을 줍니다. 이런 면에서 그의 그림을 이 시대 우리들의 자화상이라 할 수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이런 상황을 한탄하거나 아니면 아무도 없는 곳으로 도피하여 혼자 사는 길을 찾아야 할까요? 그런데 다행히도 수도승 전통은 인간성의 이런 면에 대처하는 방법들을 많이 축적해왔습니다. 그것은 너무도 간단해서 어쩌면 뭐 그렇게 해서 될 일인가라고 웃을 분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그냥 바라보는 것, 그냥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자신 안의 이중성 내지는 그보다 더 복잡한 분열 상황을 지속적으로 바라보고 인정하고 또 바라보고 인정하는 것 이것만으로 충분하더라는 것이지요. 자신의 힘으로 어찌 해보겠다 덤비면 덤빌수록 상황은 더 꼬여간다는 것을 경험해본 이들은 압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문제는 늘 우리 자신을 넘어서기에 생기기 때문입니다. 수도승 전통은 “자신을 알고, 이웃을 알고, 하느님을 안다.”는 거의 공식화된 말로 표현합니다. 이 알아차림은 우리 자신의 알아차림이자 동시에 그리스도의 알아차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분열 상황에 직면해서도 당황하지 않게 됩니다. 참 단순하고 단순하지요.

에곤 쉴레 이중 자화상 1915년, 584×522 Cm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3년 6월의 말씀

절망, 그 새로움 그 오래됨

크의 그림은 일견 섬찟하고 두려움을 느끼게 하면서 동시에 왠지 친숙한 느낌을 주는 기묘한 매력을 뿜습니다. 결코 아름답다 할 수 없는 그의 그림들이 현대인들을 묘하게 잡아끄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법 합니다. 그의 그림들에는 한결같이 두려움, 공포, 불안이 선명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삶은 믿기 어려울 정도로 가까운 이들의 연속적인 죽음으로 새겨져 있습니다. 어머니는 다섯 살에 결핵으로 사망하고 13살 때는 누이가 같은 병으로 사망했으며, 여동생은 정신병에 걸렸고, 스물여섯에는 아버지가 사망하였으며, 서른두 살에는 남동생이 죽었습니다.

죽음이 꿰뚫고 지나간 그의 삶이 비참, 고독, 불안으로 관통된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는 그런 자신의 불안을 그림 속에 꾹꾹 담아냈습니다. 자살 충동도 있었을 것이요, 구불거리는 그림 속 선들처럼 늘 요동치는 자신의 형언할 길 없는 불안에 삼켜지지 않은 것 그것만으로도 그의 삶은 우리에게 하나의 메시지가 됩니다. 그래서 보는 이들의 눈에 이 상황은 과장으로 다가오지 않고 아주 현실감있게 느껴집니다. 듣는 것만으로 소름끼치는 그의 삶의 흐름 속에 그가 매몰되지 않은 것은 바로 이 그림이라는 재능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라는 합리적 추측과 함께 바로 여기에 그의 비극적 삶에 대한 이 시대를 위한 일종의 사명 같은 것이 있었으리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이 시대 역시 바로 불안과 고독의 세대이기 때문입니다. 물질적으로 이만큼 풍요로운 시대도 없었거니와, 지식의 차원에서도 만물의 바닥이라도 꿰뚫을 듯 속으로 파고들고 우주의 끝으로 날아가고 가장 작은 것들 속으로도 거침없이 들어가는 과학의 힘은 마치 신의 부재 내지 신의 다음 자리 정도는 인간이 충분히 차지 할 듯 거침이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 내면의 불안과 존재의 고독 또한 이에 못지않게 모든 시대 가운데 최고를 치고 있습니다. 우울증과 공황장애는 이제 감기 앓는 것이나 다름없이 취급됩니다. 예전과 달리 드문 현상으로 감추고 숨기려 들지 않는 것은 이제 누구나 그런 증상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위의 그림을 보고 뭉크의 정신상태가 참 이상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많지 않으리라 짐작합니다. 왜냐하면 정도의 차이는 있더라도 누구나 자신의 내면의 한 풍경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인 것이지요. 저 역시 눈 수술을 하며 폐쇄공포증과 일시적 공황장애를 뼈 속 시리도록 체험한 적이 있습니다. 자신의 의지가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하는 자리, 그런 자리에서 인간은 진실로 하느님인지 아니면 에고로 똘똘 뭉친 자신인지를 선택하게 되는 절체절명의 순간을 맞이합니다. 소화 데레사 성녀가 하느님 부재의 깊은 수렁에 빠진 것도 아마 이와 비슷한 상황이 아니었을까 짐작합니다. 자신의 의지에만 의지하던 인간이 새로운 차원으로 즉 하느님의 차원으로 넘어가는 순간을 맞이하는 것이지요.

그림에서 보면 하늘에는 붉은 불이, 땅에는 검은 늪이 가득 차 인간은 갈 곳조차 없어 좁디좁은 다리 위에 오밀조밀 밀쳐대며 맹목적으로 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무리 진 이들의 눈동자가 텅 비고, 눈 코 입도 뭉그러져, 형체들이 비슷한 좀비 무리를 연상시킵니다. 그런데 맨 앞쪽 여인의 눈만이 공포가 담겨있기는 하나 눈동자가 제대로 박혀 있으며, 정면을 응시하는 여인의 모습은 당당함마저 느끼게 합니다. 환하게 제일 앞에 놓으면서도 마치 수수께끼처럼 심어놓은 여인은 절망의 바닥에서도 결코 스러지는 일이 없는 구원의 실자락 같이 느껴집니다. 이 시대가 아무리 어둡고, 개인의 절망이 아무리 깊어도 스러질 수 없는 희망을 뭉크는 보여줍니다. 그의 그림은 깊이 볼수록 다가오는 것이 있습니다. 얼핏 보고 그 두려움만 눈에 담은 후 돌아서면 결코 눈에 뜨이지 않는 숨겨놓은 그림찾기를 통해서만 드러나는 모습입니다.

뭉크, 불안, 1894, 94*74cm, 오슬로 뭉크미술관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3년 5월의 말씀

스산함과 따뜻함

노레 도미에, 이 화가의 일생 이야기만 해도 이번 달 소식지 난은 꽉 찰 것 같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두 가지만 접하는 것으로 만족할까 합니다. 하나는 그가 사회적 문제에 대한 의식이 아주 날카로웠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초기에 풍자 만화로 유명하여, 왕이 백성을 먹고 배설하는 장면으로 감옥과 정신 병원 유폐까지 당하였습니다. 그는 끊임없이 세상 권력의 비뚤어짐과 그로 인해 희생되는 서민의 삶에 깊은 관심을 가졌고, 그 서민의 스산함과 따스함 양쪽 모두를 꿰뚫어 보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상류 계층의 위선과 또 그만큼 하층민의 애환과 그들 심성의 따뜻함에 아주 민감하였습니다. ‘3등 열차’, ‘이주민들’ 등 어렵고 힘들게 살아가는 이들의 삶에서 아주 독창적인 장면들을 잡아냅니다. 이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 없이는 결코 잡아낼 수 없는 그런 장면들을 화폭에 담았지만 살아 생전 풍자 만화로는 알려졌어도 화가로는 이름을 알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사후 그의 그림은 인상파에 깊은 영향을 남겼고 시인 보들레르, 화가 들라크루아 등으로부터 극찬을 받았습니다.

이 그림은 서민의 일상 중 한 컷 스냅 사진과도 같은 느낌을 주는 그림으로, 엄마 따라 어영차 계단을 오르는 어린아이의 걸음새가 당찹니다. 다리 길이보다 긴 계단을 짧고 통통한 다리로 오르는 모양을 보자면 마음이 절로 흐뭇해져옴을 느낍니다. 아마도 그 힘은 힘차게 그러쥐고 있는 엄마 손 때문임에 틀림없습니다. 아이는 그 와중에도 자기도 엄마를 돕겠다는 듯 빨래방망이를 두 손에 꼭 쥐고 놓지 않습니다.

아이와 엄마가 올라오는 계단 뒤로 푸른 강이 보이는 것을 보면 빨래를 끝내고 그 빨래 뭉치를 손에 들고 올라오는 길이라 보여집니다. 빨래를 짜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알겠지만 물먹은 세탁물은 그 무게가 엄청납니다. 저 가파른 계단을 무거운 세탁물을 한 손에 들고, 아이의 손을 잡고 엄마는 계단을 오릅니다. 아이를 향해 살짝 숙인 엄마의 자세에 아이를 향한 사랑이 진하게 묻어납니다. 남자 못지 않게 건장한 어깨와 팔뚝은 그녀가 단지 살림과 육아에만 전념하는 주부가 아니라 삶의 전선에서도 단단히 한몫하고 있음을 짐작하게 해 줍니다. 아마도 저 빨래는 가족의 것이 아니라 품삯을 받고 해 주는 것이 아닐까요.

분명 삶의 스산함이 가득한 환경 속에 거칠게 살아가는 여인 같지만 그것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아이를 향한 엄마의 따뜻한 사랑이 그림에서 모락모락 연기 오르듯 피어납니다. 어쩌면 삶이 스산하기에 그 사랑이 더욱 절실하고 깊고 순수해지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아무것도 부족함이 없는 귀족 부인과 아이 그림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귀한 조화입니다. 스산함으로 인한 황폐함뿐이거나, 따뜻함으로 마냥 솜사탕 같은 장면에서는 느낄 수 없는 가슴 찡한 감동이 있지요.

하루 노동으로 지친 엄마의 모습은 내색 안 해도 아이들에게도 느껴지지만, 엄마는 그런 빛 한 번 비치지 않고 힘든 노동 후에도 맛있는 밥 만들어 아이들을 먹입니다. 아이들은 그 사랑의 품이 넓어 저 아이처럼 힘찬 걸음을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저 아이는 큼지막한 빨래 방망이가 무거워 아래로 쳐져도 그 방망이를 꼭 그러쥐고 계단을 오릅니다. 아마 나름 엄마를 도와 주고 싶은 마음 아닐까요. 물에 젖어 한없이 무거워진 빨래가 건장한 엄마의 팔 힘만으로도 지탱이 안 되어 무릎 위에 살짝 얹듯 들고 올라옵니다. 그래도 아이의 손을 결코 놓지 않고 아이를 향한 시선도 거두지 않습니다. 남자인 도미에가 이런 모습을 포착했다는 것이 새삼 가슴 따뜻하게 다가옵니다. 앞에 살짝 언급한 그의 삶의 언저리가 있기에 이런 평범한 모습 속에서 예술을 끌어낼 수 있겠지요. 사실은 5월 성모님의 모습을 찾다 이 그림을 만났고, 보자마자 이 그림 위에 성모님의 모습이 겹쳐졌습니다. 성모님의 삶의 스냅 사진 한 장 건진 행운을 만났습니다.

오노레 도미에 1863년 48.9×33cm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3년 4월의 말씀

저 열린 문

지 고흐의 “감자 먹는 사람들”의 분위기가 물씬 납니다. 분위기도 다르고 고흐 그림 속에서는 가족이 서로 대화를 나누며 먹는 모습인데 반해 리버만은 기도하는 모습으로 그립니다. 뿐만 아니라 고흐는 식탁 위에 석유등을 밝히고 있고, 리버만은 실내에는 어떤 조명도 없이 입구 문을 활짝 열어 놓아 그곳으로부터 빛이 들어오는 장면을 그렸습니다. 그럼에도 어쩐지 영향을 받았을 것 같은 느낌이 들지요. 사실 이 그림은 부활을 주제로 한 그림을 찾다 만난 그림입니다. 환하고 밝은 저 입구에 예수님께서 들어와 서계실 것 같지 않나요. 불도 없는 어둑한 실내에 먹을 것이라곤 감자밖에 없는 식탁에 둘러앉은 가족들이 참 경건하게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나이 지긋한 부부와 아들로 보이는 젊은 부부, 아직 아이도 없는 걸 보면 이제 막 새가족을 이룬 것 같기도 합니다. 무릎 위에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아버지의 모습 특히 손이 무척 인상적입니다. 온갖 고난과 역경을 헤치며 살아온 농부의 삶, 이제 그 고난과 역경도 그에게는 식탁 위 감자처럼 온전한 감사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그런 모습으로 보입니다. 반면 뒷 모습만 보이는 젊은 여인의 의자가 상당히 불안해 보입니다. 아무리 가난해도 최소한 실내이니 바닥이 경사질 리는 없을 터인데 의자가 무너질 듯 참 어색하고 이상한 자세입니다. 의자 깊숙이 앉은 아버지와 달리 그녀는 기울어진 의자에 반쯤 걸친 불안한 자세입니다. 맞은 편에 앉은 아들은 뭔가 알고 있는 듯 얼굴에 불안한 기색이 보입니다. 아들 얼굴에 빛이 이상하지요. 빛살이 들어오는 쪽은 오히려 검고 그 반대편 아버지 쪽 얼굴이 환합니다.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이런 실수를 했으리라고는 볼 수 없지요. 화가의 의도가 듬뿍 담긴 그림 속 비틀림입니다. 그는 앞에 앉은 아내의 마음을 알고 있고, 결혼 전 사랑했던 그 열정도 어쩌지 못할 현실의 누추함이 점점 무겁게 눌러와 서로의 관계마저 힘들어져가는 그런 상황이 절로 떠오릅니다. 젊음은 젊은 그만큼 열정과 그 열정이 비틀리기 시작할 때의 경직이 서로 지지않고 맞먹지요. 그 경직됨을 풀고 서로의 약함과 한계를 받아들이면서 사랑의 풋풋함은 사라지고, 자신을 내놓고 상대를 받아들이는 참사랑의 단계로 넘어갑니다. 하지만 이 젊은이는 아직 스스로는 어찌 해볼 수 없음을 인식하고 있는 듯 합니다. 그리고 말없이 온갖 역경을 뚫고 풍요로워진 아버지의 현명함에 내심 도움을 청하고 있나봅니다. 아버지는 이런 상황을 모를 리는 없겠지만, 섣불리 개입하지 않고 묵묵히 아들의 식사기도를 듣고 있습니다. 가재도구라고는 없는 가난한 살림살이와 가난한 음식, 두 팔로 식탁에 버티고 있는 그녀의 자세는 젊은 사람 특유의 격정을 꾹 누르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버지는 이런 며느리를 야단치거나 비난하기보다 어떤 새로운 힘이 그녀에게 새로운 시야를 열어주기를 기도하고 있지 않을까요

경건해보이는 현실, 목가적으로 보이는 농촌 속 한 겹만 걷으면 아마도 저런 시리고 아린 현실이 금방 얼굴을 드러낼 것임에 틀림 없지요. 그 시리고 아린 현실 속 저 아버지와 같이 무릎 위에 두 손 모으고 온 존재로 기도하는 누군가가 있는 곳에는 열린 문으로 새로운 빛이 들어옵니다.

캄캄하기에 빛이 들어올 수 있습니다. 저 곳이 온갖 조명, 샹들리에로 환하다면 저 열린 문으로 들어오는 빛은 누구에게도 빛이 될 수 없습니다. 실내조명조차 없는 곳, 그래서 오히려 참 빛을 그리워하는 이들이 있는 곳, 그곳에 예수님은 부활하신 모습으로 나타나십니다. 부활하신 후 여인들에게 예루살렘이 아닌 갈릴래아로 가시겠다고 하셨지요. 부활하신 분은 십자가에 달리셨던 바로 그분입니다. 십자가가 있는 곳, 예수님이 오실 바로 저 열린 문입니다.

식사 기도하는 오스트프리슬란트 농부들, 막스 리버만 1847-1935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3년 3월의 말씀

사랑의 배신-그리고 끝?

“아

기는 분명 아긴데 심통이 단단히 난 채 잠이 들었나봅니다. 볼록한 배가 아기 특유의 모양새를 보여주지만 심통 난 얼굴은 어찌 보면 어른의 얼굴 같아보이기도 합니다. 심통 난 아기만으로 화면을 꽉 채운 그림에서 아기만 환하고 주변은 검게 그려 카라바죠 특유의 빛과 어둠이 유독 두드러지는 그림입니다. 아기에게서 눈을 돌려 화면의 다른 쪽으로 눈을 돌려봅시다. 이게 웬일입니까. 힘없이 축 늘어지긴 해도 분명 등에 달린 날개며 옆에 화살이 놓여있는 걸 보면 그 유명한 큐피트인 것이 분명한거죠. 물론 제목 “잠자는 큐피트”를 보면 알 수 있지만 제목 보지 않고 그림만 본다면 큐피트라 알아보는데 시간이 좀 걸립니다. 카라바죠가 그 유별난 성격으로 실연이라도 한 후 사랑에 회의를 느껴 그린 그림일까요? 이렇게 귀염성 없는 큐피트는 처음 봅니다. 화가가 의도하는 바가 있어 보이니 한 번 따라 들어가 봅시다. 우선 카라바죠는 삶이 참으로 종횡무진 어디로 튈지 모르는 난봉꾼이라는 말이 딱 맞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만큼 자신의 약함을 하느님 앞에서 깊이 이해하고 엎드리는 그런 모습을 보여줍니다.

몇 백년 전 일을 어찌 아느냐고요? 그의 그림들이 이야기해주는 바이지요. ‘나르키소스’, ‘끌려가는 그리스도’, ‘세리 마태오’ 등을 보고 있노라면 자연스레 위와 같은 결론 도달할 수밖에 없는 인간존재 밑바닥에 대한 깊은 통찰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 그림 역시 그런 통찰의 묘미를 우리에게 맛보게 해주니 맛있는 음식을 보고 먹지 않을 수야 없지요.

우선 제목을 “사랑의 배신-그리고 끝”이라 잡았습니다만, 인간 현실 안에서 사랑이란 말만큼 달콤한 것도, 동시에 살벌한 것도 없지요. 현실 부부에게서 사랑이란 어떤 맛을 낼까요? 굳이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누구나 사랑받고 싶어하지만 누구나 이 갈망이 헛되이 끝나는 실망을 맛봅니다. 그 목마름으로 인간은 헐레벌떡, 허덕지덕 삶이 너덜너덜해지는 것은 아마도 수많은 세월, 인간 보편의 현실이라 해도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성프란치스코는 “사랑받기보다 사랑하고, 이해받기보다 이해하고”라고 노래하였으니, 이 맥락에서 볼 때 참 마땅하고 옳은 말이지요.

그렇다면 사랑은 그저 배신으로 끝날 뿐이니 아예 시작도 하지말자 뭐 이런 결론이라도 내야만 마땅할까요? 이런 우리에게 예수님은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내가 너희를 사랑하듯,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진지하게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고자 노력해본 사람이라면 틀림없이 이 말 앞에 깊은 절망을 느껴보셨을 것입니다. 끝까지 이기적인 자신의 모습이 사랑에 걸림돌이 되고, 동시에 이웃의 똑같은 모습 앞에 혐오감이 무거운 짐처럼 자신을 억누르는 그런 체험말입니다. 이 절망은 구원으로 이끄는 길일 되기도 합니다. 스스로 사랑할 수 없다는 존재 바닥의 체험 그곳으로 자신의 힘이 아닌 전혀 다른 힘을 체험할 때 비로소 이 갈망은 헛되이 메아리치지 않게 됩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빈자리를 만드는 일, 하느님이 기쁘게 들어오시어 당신 사랑을 옷입게 해줄 빈자리를 만드는 일입니다.

하느님은 이 헛된 사랑 안으로 기꺼이 이사 오시어 같은 주민이 되셨고, 우리는 그 하느님을 입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되신 하느님은 이 사랑의 끝에 인간의 모든 짐을 함께 지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성프란치스코의 “사랑받기보다 사랑하고” 이 말은 바로 인간이 되신 하느님의 마음인 것입니다. 사순시기, 바로 이 사랑이 절정에 달하는 때, 그분의 사랑이 이사 오도록 빈자리 만들기 우리의 기쁨 되는 때입니다.

잠자는 큐피트, 카라바죠, 1600년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3년 2월의 말씀

너희에게 강복하리라.

“내

가 나의 이름을 기억하여 예배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가서 너희에게 강복하겠다.”(탈출 20,24). 주도권을 갖고 계신 하느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기억하여 예배드리는 곳에는 지체하지 않고 우리 곁으로 오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두렵지만 이 얼마나 감동적이고 매혹적인 말씀인지요. 하늘에 계신 분께서 땅에 있는 우리에게 오신답니다. 두렵다는 것은 진노하시고 벌하시는 모습과 함께(시편 18,8-9) 시나이 산의 우렛소리와 번개, 짙은 구름이 연상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시어 우리를 만나시고 강복하겠다는 곳은 일차적으로 제사의 자리입니다(탈출 20,22-26). 시간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당신께 제물을 준비하여 바치며 당신의 자비하신 이름을 기억하는 그 찰나에 제물을 바치는 사람 곁으로 오십니다. 제단에 함께 모인 사람들을 만나시고, 마치 초대에 응하신 듯 함께 음식을 드시고(레위 3,11;민수 28,2), 복을 주십니다.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며 먹지도 못하고 냄새도 맡지 못하는(신명 4,28) 우상과는 다르게 우리가 믿는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대접하는 식사를 하시고 생명을 약속하십니다(창세 18,1-15).

온 생명의 주인이신 그분께서는 생명 자체이십니다. 당신 제단에 바치는 제물이 탐욕으로 얻은 것, 강자의 폭력으로 착취한 노획물, 나누지 않고 창고에 쌓아둔 것이면 받지 않으십니다. 단지 받지 않으시기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증오하시고, 더구나 “억울한 이의 피”가 한 방울이라도 있다면 제단을 뒤엎어 버리십니다. 예언자를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숲 속의 모든 동물, 수천 산들의 짐승이 다 내 것이다. 나 비록 배고프다 하여도 네게 말하지 않으리니 찬양 제물을 바치고 네 서원을 채워라.”(시편 50,7-14 참조). “정녕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신의다. 번제물이 아니라 하느님을 아는 예지다.”(호세 6,6). 그분을 초대하기 위하여 상을 차려 마련하는 그 모든 제물은 애초에 하느님의 것이고, 우리는 단지 돌려 드리는 것입니다. 그분께서 이미 마련해 주신 선물이고, 먼저 허락하시는 친교의 자리입니다.

미사, 주님께서 우리를 만나시기 위하여 오시는 제사의 자리입니다. 주인이시면서도 너무나 겸손하신 우리 주님께서는 손님처럼, 낯선 분처럼 조용하게 은밀하게 숨으신 듯 오십니다. 피 흘리는 짐승의 고기가 아니라 모든 이가 다 함께 같은 것을 나누어 먹을 수 있는 곡식으로 예물을 마련합니다. “저희가 땅을 일구어 얻은 이 빵을 주님께 바치오니 생명의 양식이 되게 하소서. 저희가 포도를 가꾸어 얻은 이 술을 주님께 바치오니 구원의 음료가 되게 하소서.” 우리와 함께 식사하시는 것을 기뻐하시는 분이시지만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 화해의 친교를 더 기뻐하십니다.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마태 5,23-24). 용서와 화해를 위해 달려가는 이보다 앞질러 가시어 당신 온유하신 옷자락으로 보호해 주십니다. “불행의 날에 나를 불러라.”(시편 50,15) 하시는 그분께서는 그 어떤 제물보다 “부서지고 꺾인 마음”(시편 51,19)을 소중하게 받으십니다. 사제의 목소리가 향이 되어 위로 오릅니다. “주 하느님, 진심으로 뉘우치는 저희를 굽어보시어 오늘 저희가 바치는 이 제사를 너그러이 받아들이소서.”

우리와 늘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시는 주님의 현존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겠다.”(마태 18,20). 우리가 마음을 모아 부르는 그분의 이름이 바로 그분께서 현존하시는 방식입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작은 이들을 업신여기지 않으시고 먼저 용서의 손을 내미시는 분이십니다. 인간의 몸을 취하실 정도로 낮아하고 작아지신 분께서는 당신의 본래 자리인 하늘로 떠나시면서도 우리와 영원히 함께 계시면서 강복하십니다(루카 24,50-51 참조). “예수님께서는 강복하시며 이별하신다. 강복하시며 떠나가시는 그분은 강복 안에 머무신다. 그분의 손은 계속 이 세상 위로 펼쳐져 있다. 그리스도의 강복하는 손은 우리를 보호하시는 지붕과 같다.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하늘이 그 안에 들어서서 그 안에서 현재가 될 수 있게 세상을 열어 젖히는 개방의 몸짓이다. 우리는 믿음 안에서 예수님께서 강복하시며 당신의 손을 우리 위로 펼쳐 드신다는 것을 안다. 이것이 그리스도교적 기쁨이 지속되는 이유다.”(베네딕도 16세 교황, 「나자렛 예수 2」 ).

James Tissot / 두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3년 1월의 말씀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하

느님을 찾는 인간의 간절함은 결코 한 순간도 멈추지 않습니다. “내 얼굴을 보지는 못한다. 나를 본 사람은 아무도 살 수 없다.”(탈출 33,20)는 엄한 경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시편의 시인들과 예언자들은 두려움에 가득한 공경심으로 끈질기게 그분을 찾고 부르며 뵙기를 갈망합니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네, 나의 구원자께서 살아 계심을. 내 살갗이 이토록 벗겨진 뒤에라도 이 내 몸으로 나는 하느님을 보리라.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그분을 보리라.”(욥 19,25-27). “암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 제 영혼이 당신을 이토록 그리워합니다. 언제나 가서 뵈올 수 있겠습니까”(시편 42,2-3). “저의 영혼이 밤에 당신을 열망하며 저의 넋이 제 속에서 당신을 갈망합니다.”(이사 26,9). “그날과 그때에 그들은 울며 돌아와서 주 그들의 하느님을 찾으리라.”(예레 50,4). 성경은 온통 하느님을 찾는 인간의 그리운 갈증과 인간을 부르시고 찾으시는 하느님의 충만한 그리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마치 한 마리 짐승처럼 하느님을 갈망하던 인간은 마침내 고백합니다. “제 몸과 제 마음이 스러질지라도 제 마음의 반석, 제 몫은 영원히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 가까이 있음이 저에게는 좋습니다. 저는 주 하느님을 제 피신처로 삼아 당신의 모든 업적을 알리렵니다.”(시편 73,26-28).

하느님의 그리운 충만은 하늘을 찢고 우리에게 내려 오셨습니다. “나는 너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주 너의 하느님이다. 너에게는 나 말고 다른 신이 있어서는 안 된다.”(탈출 20,2-3). 시나이산에서 말씀이 내릴 때, 백성은 멀찍이 서 있었고, 모세는 하느님께서 계시는 먹구름 쪽으로 가까이 갔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아직 이르지 않았지만, 광야의 백성들은 타오르는 불과 같은 주님의 영광을 보았으며, 이렛날 주님께서 구름 가운데에서 모세를 부르실 때 구름을 뚫고 산을 오르는 그를 보았습니다. 참으로 가까이에서 하느님의 돌보심을 느꼈고, 모세를 통해 “말씀”을 들었던 그들에게 광야의 체험은 가슴 결 깊이 또렷하게 새겨진 지울 수 없는 기억이지요. “주님, 누가 당신 천막에 머물 수 있습니까? 누가 당신의 거룩한 산에서 지낼 수 있습니까? 아, 누가 당신 머무시는 산에 오를 수 있으랴?”

결핍을 초래하는 넘치는 탐욕 때문에 목마르고, 배고프고, 질병과 고통에 시달리는 군중들이 우리 주님께로 모여듭니다. 빛이 거부된 절망의 감옥에 매몰되지 않고 일어나 예수님을 따릅니다. 그 군중을 보시고 예수님은 아버지 하느님께서 계신 산으로 오르십니다. 그 산에서 홀로 아버지와 함께, 새벽이어도 한밤중이어도 기도하셨지요. 아버지의 법이 늘 마음에 있어 걸음이 흔들리지 않습니다(시편 37,31 참조). 제자들이 다가오자 산으로 오르신 그분께서는 그들에게 당신 자신을 펼쳐 보이십니다(마태 5,1 이하 참조). 시나이산 위에서 모세에게 당신을 드러내실 때 백성들은 멀찍이 떨어져 있었지요. 그러나 오늘 이 산에는 주님께서 군중과 제자들과 가까이 계십니다. 얼굴을 보여 주십니다.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 하느님”이십니다. 자리에 앉으시어 말씀하십니다. “나는 가난하다. 나는 슬프다. 내 마음이 가난하고 온유하다. 나는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르다. 나는 ……” 하늘이 열리는 듯, 군중은 경탄하고 놀랍니다. 이 거부할 수 없는 떨림, 기쁨, 평화, 부요는 어디서 오는 것인가요? 말씀은 계속됩니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 그래서 나는 행복하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너희는 하느님을 볼 것이다.”

물이 얼굴을 비추듯 사람의 깨끗한 마음은 그 사람을 비추고, 그 마음이 품고 있는 얼굴도 드러냅니다.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요한 14,9). 그러나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요한 12,8). 그러면 “아버지의 얼굴”을 보여 주시는 당신께서는 어디에, 누구와 함께 계시나요. 오직 돌봄만을 필요로 하는 아기로 누워 계십니다. “그는 우리의 병고를 떠맡고 우리의 질병을 짊어졌다.”(이사 53,4). 이 말씀이 이루어지는 고통의 현장에 계십니다. 모든 기회를 박탈당하고, 삶의 여정을 계속할 수 없는 황량한 곳에 이미 먼저 빛으로 와 계십니다. 마음이 깨끗해진다는 것은 밖에서 들려오는 사람과 세상의 신음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위를 보며 응답하는 것입니다. 기도의 시작이겠지요. 주님께로, 주님께서 계시는 곳으로 마음을 열고 움직이는 것입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 마음에 온유한 주님의 법이 새겨지리니, 이제 큰 사랑을 드러내리라.”

Gherarducci, Don Silvestro dei / 천주의 모친(14c)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2년 12월의 말씀

구원의 샘에서 물을 길으리라.

“하

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시어”(룻 1,6 참조 ; 루카7,16) 손을 내밀어 붙들어 주시고, 세우시고, 일으키시고, 돌보시고, 살리십니다. 인간이 하느님을 뵙기 위해 찾고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만나시기 위해 참으로 놀랍고도 경탄스러운 방식으로 내려오십니다. 더 낮추어질 수 없는 죄인의 자리, 죽음의 자리에까지 이르시어 인간을 올려다보시며 이름을 부르십니다(루카 19,1-10 참조). “내가 오늘 너와 함께 묵으며 너의 묶인 사슬들을 풀어 주리라.” 멸망의 구렁으로부터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낮아지심은 과연 어디까지일까요?

“어둠 속을 걷던 백성이 큰 빛을 봅니다. 암흑의 땅에 사는 이들에게 빛이 비칩니다.”(이사 9,1).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빛이 세상에 왔습니다. 아무도 하느님을 뵌 적이 없지만, 아버지 하느님과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 하느님이신 그분께서 알려 주십니다.”(요한 1,9.18). “하룻밤 묵고자 들어선 나그네”(예레 14,8)가 아니라 우리와 똑같이 먹고 입고 자라고 사랑하면서 함께 살고자 이 땅에 당신의 장막을 치셨습니다. “아기로 오신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경배드리며 무릎을 꿇은 목자들을 올려다보십니다. 목자들의 얼굴에는 그분 얼굴의 빛이 새겨지고 목자들의 마음은 그분께로 스며듭니다. 하느님을 찬양, 찬미하고 돌아간(루카 2,20) 그들 일상의 시공간은 여전합니다. 그러나, 밤낮 들에서 양 떼를 지키며 돌보는 그들 삶의 자리는 새로워졌습니다. 그들을 보는 이들은 묻습니다. “도대체 당신들의 평화와 기쁨과 생기는 어디서 나오는 것이오?” 천사들이 다가오고 주님의 영광이 그들 둘레를 비춘 이야기와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에 관하여 보고 들은 것을 전해 주었습니다. 무방비, 무장해제된 “아기의 얼굴”로 우리의 구원자가 탄생하셨습니다. 이 영광의 빛에 노출된 목자들은 한 마리 잃은 양을 끝까지 찾아 나설 것이며, 길에 쓰러진 낯선 이를 그냥 지나치지 않을 것이며, 사람에게 심판의 돌을 던지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도 일어나 서둘러 베들레헴으로 달려갑시다. 작고 낮고 가난한 곳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그분께 엎드려 경배드립시다. 사람 안에서 사람이 되신 하느님, 바로 그 하느님 앞에서 어린아이처럼 가장 놀라운 마음으로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읍니다. 엄마가 아가의 숨소리에 온통 주의를 기울이듯 그분께 가까이 다가갑시다.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 그분의 숨결, 그분의 미소, 그분의 현존하심에 우리의 존재가 조율되도록 온전히 맡깁니다. 아가와 엄마가 서로를 어루만지듯, “아기로 오신 하느님”께서 딱딱하게 굳은 우리의 돌심장을 새롭게 만져 주시기를 청합시다. 전쟁, 폭력, 죽음에 대항하는 당신의 평화, 당신의 침묵을 가르쳐 주시고 당신의 새 생명을 주시어 우리도 당신과 함께 새로 태어나게 하여 주십니다. 우리에게로 움직이시는 그분께서 요구하십니다. “타자”를 향하여 움직이고 사랑으로 행동하기!

이제 막 해산하려는 여인을 상대로 그 옛날의 뱀, 뿔이 열 개 있는 큰 용이 싸움을 겁니다(묵시 12,1-6 참조). 대등하지 못하네요. 인간 역사의 모든 싸움이 그러하겠지요. 생명은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태어납니다. 생명은 죽음 앞에서 스러지는 듯하나 주님께서는 위협받는 생명을 구하십니다. 여인은 아들을 낳고 광야로 달아납니다. 광야에는 생명의 샘이 있고 하느님의 보살핌, 하느님의 다정함(호세 2,16)이 있습니다.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지 말고 칼을 칼집에 넣고 휘황찬란한 인공의 빛을 떠나 광야로 탈출해야 합니다. 이기심과 애착의 언덕은 무너지고 불안의 골짜기는 메워집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슬픔과 고통 앞에서 침묵하고 노래하고 기도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는 먼 곳에서 어김없이 우리를 찾아오십니다(예레 31,2-6 참조). 좋은 것은 도무지 나올 것 같지 않는(요한 1,46 참조) 나자렛의 땅에서 고요한 신비의 함성이 터져 나왔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성모님의 응답은 메마른 기다림의 광야와 충만한 자비의 하늘을 잇는 사다리입니다. “정녕 그루터기에서 햇순이 돋아나고, 그 뿌리에서는 새싹이 움트고, 우리 모두는 기뻐하며 구원의 샘에서 물을 길으리라.” 매일 아침 드높이 찬미의 기도를 올립니다.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우리의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끄소서.” 바로 오늘입니다. “당신 땅을 어여삐 여기는 주님, 찬미받으소서. 당신의 영광이 이 땅을 가득 채우니, 이제 자애와 진실이 서로 만나고 정의와 평화가 함께 있으리라.”

렘브란트 / 목동들의 경배(16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