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5년 5월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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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을 뚫고 솟아오른 부활의 빛

숭아꽃이 만발한 이 그림은 고난과 역경의 사람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입니다. 봄의 색채와 힘찬 생장의 기운이 느껴지고, 삶을 새롭게 시작하고고 싶은 봄의 기운 속으로 들어가게 해줍니다. 그런데 이 터져나오는 생명의 힘, 기쁨, 환한 색채를 드러낸 그의 이 그림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이전의 그의 독특한 삶을 좀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목사로 삶을 살고 싶어 신학교에 갑니다만, 라틴어 등 고전어에 막혀 1년을 고투한 후 목사의 길을 포기하고 맙니다. 그런 그를 목사였던 그의 아버지가 선교학교로 보냈고, 그는 보리나주라는 탄광촌에서 선교활동을 하게 됩니다. 19세기의 탄광촌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초월하는 열악한 조건이었습니다. 매일 직면해야 하는 지하갱도의 폭발위험, 지하의 숨막힌 공기 속의 살인적인 노동에 비해 턱없이 적어 입에 풀칠도 겨우 할 정도의 임금 등으로 인해 탄광촌삶은 피폐할 대로 피폐하였습니다. 그는 그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자신의 돈과 옷가지들을 전부 나누어주고, 자신은 포장지 천으로 옷을 만들어 입고, 적은 양의 빵과 몇 가지 음식으로만 생계를 유지하며, 거주지조차 빌렸던 세집을 떠나 아무것도 없는 오두막으로 옮겨 갔습니다. 그뿐 아니라, 이 짓눌려 살아가는 가난한 이들에게 회개를 강요하거나 복음을 의무지우는 위압적인 선교사가 아니라, 성서 속의 고난이 서린 인물을 광부들 안에서 보고 그들에게 그러한 자부심을 가지도록 이야기하였습니다. 이 독특한 젊은이를 경계하던 마을 사람들도 티푸스가 퍼지자 의사도 포기한 중환자를 고흐가 돌보고 그들의 목숨을 살리는 그의 헌신을 보고는 그에게 흔들림 없는 신뢰를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파업이 일어나자 턱없는 임금으로 비참한 밑바닥의 삶을 살아가던 광부들의 편에 서자, 광산 관리자들은 물론 선교위원회 지도층과 돌이킬 수 없는 긴장관계가 생겨나고, 결국 부르조아적인 감성을 지닌 그들로부터 선교자로서의 자격을 박탈당하고 맙니다. 이 상황이 고흐에게 얼마만한 고통을 주었는지는 오직 하느님만이 아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 상황은 그로 하여금 삶의 또 다른 결정을 하게 만드는데, 늦은 나이에 그는 그림 그리기를 시작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가 보리나주에서 확신하고 체험했던 예수와 복음의 철저함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그림을 통해 이 확신을 표현하게 됩니다. 초기에 그가 그린 그림은 감자먹는 사람들, 직조공 등 당시의 가장 밑바닥 사람들의 있는 그대로의 삶의 모습이었습니다. 그 당시 그림의 색채는 그의 경험과 닮은 거의 무채색에 가까운 검은 색조였습니다. 그런 그가 프랑스로 가서 인상주의 그림과 만나고 그들의 색채에 경이를 느낍니다. 그는 인상주의의 가벼움은 따르지 않지만 색채의 신비와 대면하면서 그의 삶도 바뀝니다. 뿐만 아니라 프랑스 남부 아를로 이사하며, 그곳의 밝고 상쾌한 날씨, 소박한 시골 사람들에 푹 빠져, 검은 늪에서 빠져나오듯 빛과 생명, 색채, 생기로 가득 찬 그림들을 그려냅니다. 그의 모진 인생 한복판 선사받은 부활의 체험이라고나 할까요! 하지만 이 밝음은 어둠과의 대면, 삶의 바닥에 내팽개쳐진 고립감, 세상의 냉혹함과의 힘겨운 투쟁을 뚫고 솟아오른 빛입니다. 아를에서 그는 고갱과 시도했던 화가공동체 삶이 실패로 끝나고, 귀를 자르는 충격적인 사건과 함께 정신병원생활, 자살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만, 그가 체험한 이 생명, 부활은 결코 단절되지 않고 죽음 너머 그가 그토록 바라던 영원 안에서의 진정한 부활을 만발한 복숭아꽃 그림에서 감지하게 됩니다. 그의 그림들은 오직 이 죽음과 부활의 빛 안에서만 올바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5년 4월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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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십자가 Ⅱ

반적으로 샤갈을 떠올릴 때 밝고 명랑한 색채와 중력을 거스르는 사랑의 아름다움이 생각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의 유년 시절은 깊은 우울함으로 가득 차있었습니다. 그가 성장했던 게토, 유다인 분리지역이라는 곳이 우울한 분위기로 가득찬 곳입니다. 역사 속 수없는 환란과 핍박, 분리되어 살아야했던 게토마저도 안전한 곳이 될 수 없었던 유다인들의 세기에 세기를 걸친 고난은 우울이 그들의 게토 분위기를 형성하는 한 요소가 될 수밖에 없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우울함 위에 또 한 가지 더 결정적인 특징은 동유럽 게토의 경건한 신비주의 하시디즘입니다. 유대교 신비주의 하시디즘이 18세기 이 동유럽에서 바알 셈 토브라는 전설적 인물에 의해 생겨났고, 샤갈의 고향인 비텝스크는 러시아지만 지형적으로 동유럽에 가까웠기에, 그가 살았던 게토 역시 신비적인 분위기가 가득한 곳이었습니다. 생선가게에서 차가운 생선을 다듬고 무거운 짐을 져야했던 그의 아버지는 매일 아침 일하러 나가는 길에 회당에 들러 홀로 기도하곤 했다합니다. 그의 그림 중 ‘안식일’은 바로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기도하는 가족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또한 하시디즘으로 인해 유다인 역사에서 드물게 열광적으로 타올랐던 희망, 구원에 대한 메시아적 희망이 사그라드는시기이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그가 체험했던 나치의 잔인성, 아우슈비츠의 전율할 현실 속에 허무하게 스러져가는 동족을 무력하게 바라보아야 했던 그가 예수라는 인물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그림에서 드러나는 그의 통찰은 놀랍습니다. 하늘로부터의 빛은 오직 십자가만을 비추고 있습니다. 십자가 위는 이미 빛입니다. 끝까지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지 않은 채 남았지만 그는 이 십자가 위 빛을 체험한 듯 합니다. 어떤 고난, 악랄함의 희생도 십자가 위에서는 빛이 될 수 있음을 보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향해 사다리가 하나 놓여있는데, 오른쪽 구석 펼쳐진 토라에서 어떤 기운 같은 것이 이 사다리를 향해 피어오르고 있습니다. 구약의 특히 이사야서의 수난받는 종이 이 십자가 위 예수라는 인물이요, 유다백성이 그리도 기다리던 메시아가 바로 이 사람임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온갖 환난 속에 외롭게 선 십자가, 이미 오신 하느님, 엠마누엘, 수난받는 종, 메시아를 향해 사다리가 놓여있습니다. 십자가로 오르는 사람만이 이 사람, 하느님을 만납니다. 삶의 모든 고난은 이 통찰 속에서 하나의 줄기로 모여 ✝,죽음, 부활의 큰 바다로 흘러듭니다.

 

✝위는 이미 빛이다 라고 외치면

뭇시선의 돌팔매 맞게 될까

하지만

참빛이 있는 모든 곳에는

모든 곳에는

어떤 꼴이든

어떤 자취든

어떤 향기든

✝의 흔적이 있지않나요

✝를 묵상하고 또 묵상하고

✝아래, 위에 떨어도 보고

✝로부터 도망쳐보기도 하고

✝의 구원의 빛으로 해방, 자유를 맛보기도 하고

✝를 원망하기도 하고

그러다 보면

✝ 위는 늘 환한 빛임을

환히 보게 됩니다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 몸 속을 비추니까요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5년 3월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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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 여기!

“나

 

에게 그리스도는 사랑과 슬픔으로 가득 찬 인간적 그리스도이다.” 이 그림을 그린 샤갈의 말입니다. “하얀 십자가형”이라는 이 그림은 교종 프란치스코께서 좋아한다고 하여 새롭게 주목을 받은 그림이기도 합니다. 샤갈은 유다인이었으며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유다인인 그가 어찌 이런 그림을 그릴 수 있었는지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그림은 유다인 학살이라는 가슴 아픈 사건 속에 공포에 질린 사람들이 십자가를 감싸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 설명 없이 이 그림을 처음 만났을 때 첫 인상은 ‘십자가를 하얀 색으로 이렇게 고귀하게 표현할 수도 있구나.’라는 것이었습니다. 샤갈을 조금씩 배우면서 이 그림의 배경을 알고서는 첫 인상이 얼마나 틀렸는지 알게 되었고, 조금 더 시간이 흐른 후에는 첫 인상이 틀리지만은 않았다고 그림에 대한 이해가 그렇게 바뀌어 갔습니다.

우선 십자가를 감싸고 있는 그림들을 살펴봅시다. 오른쪽 위에는 회당이 불에 훨훨 타고 있고, 그 아래는 한 남자가 마지막 남은 재산보따리를 지고 필사적으로 도망치고 있으며, 한 어머니가 아이를 온몸으로 감싸 숨기고 있는 듯 합니다. 그 옆에는 한 남자가 토라를 가슴에 안고 애원하듯 십자가 위 그리스도를 바라보고있는데 거의 넋을 잃은 것 같은 한 남자가 기도용 보자기를 목에 두르고 망연자실 서있습니다. 좁은 배 위에 가득 탄 유다인들이 다른 배를 향해 살려달라는 필사적인 몸짓을 하고 있고, 그 위로는 불붙기 시작한 마을을 향해 한 무리의 사람들이 맹렬한 기세로 모든 것을 다 부수겠다는 듯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하늘에 있는 선조 유다인들 조차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방황하듯 떠있습니다.

사방 어디를 둘러보아도 도움의 손길은 찾아볼 길 없습니다. 한 군데도 없습니다.

이 묵시록적인 비극의 한복판에 그리스도께서 달린 십자가가 고요히 서있습니다. 예수님은 유다인 기도용 숄 탈리트를 허리에 두르고 있으며, 발치에는 기도할 때 밝히는 ‘메노라’라는 촛대에 불이 환히 타오르고 있습니다. 이런 파국의 상황에서도 기도의 불은 꺼지지 않고 있습니다. 비극이 비극인 것은 사람이 같은 사람에게 동물보다 못한 참혹한 일을 저질러, 수많은 사람들이 무고하게 비참하게 목숨을 잃어도 도와줄 방법이나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선의의 사람들이 그 안타까운 상황 속으로 함께 몸을 던져 이웃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몸부림쳐도 헤어날 길을 발견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잊을 수 없는 사건 세월호를 떠올려 보십시오. 이 비극적인 상황 한복판, 그 많은 사람들이 함께 손을 잡고 몸부림을 쳤지만 아직도 그 원인조차 제대로 밝히지 못하고 있어, 생각만 해도 가슴아파 눈물이 나옵니다. 이 비극의 한복판 저 메노라처럼 세상 구석구석 기도의 불은 환히 타오르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의 마음에 평화와 정의, 생명에 대한 간절한 염원이 생겨났습니다. 저 메노라가 사건의 비극성에 가려 잘 보이지 않듯 우리의 기도 역시 세상의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도 그 불은 타오릅니다. 아니 우리 자신이 끊임없이 태워올려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비극 속에 도대체 예수님은 어디에 계시느냐고 묻습니다. 십자가 위 그리스도의 표정을 한 번 보십시오. 샤갈의 말대로 슬픔과 사랑이 가득합니다. 그 위에 미안함으로 가득합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이 모든 비극을 함께 지고 오늘도 여전히 십자가에 달려 계십니다. 이천 년이 지났으니 이제 내려오실 법도 하건만 내려오실 수가 없습니다. 샤갈처럼 비극의 한복판에서 이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만나고 있는지, 오늘 우리에게 그리스도께서 물으십니다.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5년 2월의 말씀

2월소식지

 

한 사람 여기!

런 작품을 낳을 수 있는 작가의 마음은 어떤 것인가 생각해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그득해짐을 느낍니다. 금방이라도 몸을 일렁거리며 낮은 노래 가락이 흘러나올 것 같습니다. 실제 저 자세를 취해보면 마음이 한껏 가라앉으면서 눈이 감깁니다. 이 조각상의 모습이 먼저 안으로 들어와 버렸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삶 안의 다른 것들은 뒤로 사라지고 그곳에 있는 자신마저도 잊어버리게 되는 것 같습니다.

자신마저 잊으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자신을 잊어도 되는 것일까요? 잊을 수나 있는 것일까요?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자신을 잊어야 참 자신이 될 수 있습니다. 늘 자신을 의식하는 것은 건강하지 않다는 하나의 표지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 아기를 바라볼 때, 악기나 성악을 하는 사람들이 절정에 달할 때를 생각해보십시오. 자신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도 가장 자신다운 모습으로 자신이 아닌 상대 혹은 하고 있는 일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신을 잊은 집중은 그 자체로 사람의 가장 깊은 곳을 열어줍니다.

사람들은 이 자신을 잊은 집중이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자기 잊음은 생략해버리고 값싼 집중만을 얻고자 온갖 중독에 빠집니다. 인간은 본래 이렇게 창조되었지만 스스로의 자유로 자신의 모습을 잃는 죄를 범하였지요. 그래서 가장 자신다워지는, 자신을 잊는 집중은 엄청난 노력으로도 쉽지 않게 되어버렸고, 그것이 무엇인지 감을 잡기도 어려운 것이 되었습니다. 여러 종교 종파들이 이 집중을 수행의 목표(그리스도교 수도생활은 그렇지 않음)로 삼고 있는 것을 보더라도 인간이 얼마나 여기서 멀어져 있는지 알게 해줍니다.

사실 이 작품을 처음 접했을 때 이사야의 수난받는 야훼의 종이 저절로 떠올랐습니다. 그런 수난을 겪은 사람이 아니고서는 나올 수 없는 모습이라고 할까요. 그의 모습에는 왠지 삶이 철저히 무너진 어느 한 구석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야훼의 종처럼 그는 침뱉음을 당해도 조롱과 배신 속에서도 분노와 증오로 활활 타올라 자신을 소진하지 않고, 자신을 잊고 그것을 허락하신 하느님의 뜻 속으로 깊이 깊이 내려가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엄마에게 온전히 자신을 내맡기는 아기처럼 인생이라는 품이 곧 하느님의 품이 된 사람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온전히 열린 자세, 자기망각, 온전한 집중 이 세 가지가 하나가 된 하느님의 사람이 떠오릅니다. 자신의 고난과 수난에는 초연하다는 말이 어울리는 그런 모습이면서 상한 갈대 같고 꺼져가는 등불같은 백성과 이웃에게는 온마음이 기울어지는, 자신일랑 온전히 잊은 한 사람이 떠오릅니다. 한없이 고요해보이지만 저 고요함에서 일어서면 누구보다 삶의 한복판에서 움직일 그러한 사람, 가장 분주히 움직여도 저 고요의 한 자락은 반드시 끌고 가는 사람, 우리가 그리워하는 한 사람이 떠오릅니다.

 

한 사람 여기

 

고요함 그대로

세상 온갖 것에

사랑의 품인 듯 몸 맡긴 사람

한 사람 여기

절절함 그대로

군중의 성난 고함 한복판에서도

상한 갈대 그들을 한없이 연민하는 사람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5년 1월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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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음… 영혼의 그릇

말이 없어져버리게 하는 2014년을 보내고, 새롭게 한 해를 선물받았습니다. 쉰내, 썩은 내, 곰팡이 냄새로 내 코가 아예  썩어버리지 않았는지 의심스러웠던 한 해였습니다. 우리 안에서 맑음을 길러내지 않으면 누구라도 사회 전체 가득한 그 냄새에 같이 절어버릴 수 있음을, 인간은 누구나 약함을, 새해라 해서 별 뾰족한 수가 있는 것은 아님을 마음에 새기고 싶습니다. 내 안의 맑음을 보고, 그것을 퍼올리는 작업을 하지 않으면, 돌아가는 세상, 그 평범함 속 지독한 자기중심성이 우리를 가득 채워 썩게 하고 말 것입니다.
여기에 한 아이가 있습니다. 요즘 세상 기준으로는 예쁘거나 아름답다고 할 수 없습니다만, 이 아이가 제 마음 속으로 한 걸음 들어와 앉았습니다. 사실 평범한 얼굴로 화가가 인물화의 주인공으로 잡을 만한 미인은 아닙니다. 화가는 ‘진주귀걸이를 한 소녀’를 그린 베르메르인데, 구도면에서는 두 그림이 무척 닮아있습니다만 두 소녀가 풍기는 분위기는 상당히 다릅니다. 진주 소녀의 눈에 있는 왠지 모를 흔들림 같은 것이 이 소녀의 눈에는 없습니다. 그저 맑고 순수합니다. 하지만흔들림 없이 단호한 눈빛과 다문 입술은 아이의 속이 제법 단단해보이게 만듭니다. 진주귀걸이를 한 소녀의 입술은 금방이라도 움직일 것같은 느낌을 주지만 웃을
지 울지 아니면 무슨 말을 할지 알 수가 없습니다. 신비한 느낌과 함께 무엇인가 속 깊이 흔들림이 있음이 감지됩니다. 그런데 이 아이는 까르르 웃음이라도 터트릴 것 같습니다. 이 맑음! 새해 아침을 고요히 물들일 수 있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맑을 때만이겠지요? 이 아이의 삶 역시 만만치 않을 것입니다만, 눈빛의 단단함이 그 역경들을 헤치고 그 맑음을 더 큰 성숙으로 이어갈 수 있을 것으로 믿게 만들어줍니다. 설사 한 때 이 맑음을 잃을지라도 다시 찾을 수 있는 강함도 느껴집니다. 그렇게 견뎌내고 넘어진 후 다시 일어선 맑음은 더 깊을 터이지요. 그리고 언젠가는 맑음이란 저절로 지켜지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흔들림에 ‘아니오’를 할 수 있는 밝은 눈과 힘참이 필요함도 깨달을 터이지요. 흔들리지 않고 성장하는 것이 있으리요만, 늘 흔들리기만 해서는 참 사람살이를 배워갈 수 없습니다.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 이보다 더 귀한 것이 없음을 깨닫는 날, 맑음의 고귀함도 더 크게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맑음은 나보다 남을 더 담을 수 있는 영혼의 그릇이니까요.

 

 

<희망의 소곡>

희망이 익고 익어
텅빈 알
하나 낳았네

눈에 보이지 않아
기다림인지
아픔인지 모를
더께 낀 세월의 골동품

누구도 탐내지 않는
허무의 흐름
그 육중함마저 날아가고

희망 아예
사라진
무의 가벼움

그 자리
텅빈 알 하나

 

 

 

 

시토회 수정의 성모 트라피스트 수녀원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4년 12월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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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요셉 그 너른 그늘

 

브란트다운 통찰이 빛나는 그림 중 하나입니다. 얼핏 보면 그저 성탄을 그린 것 같지만 조용히 그림 앞에 머물면 렘브란트의 마음이 보여옵니다. 그 비밀을  한 번 엿봅시다. 우선 배경이 되는 상황부터 살펴보면 아마도 허겁지겁 달려온 목자들이 다녀가고, 이제 조용히 숨을 고르나 싶을 때 동방박사들이 경외감으로 가득 차 들어왔습니다. 그들의 말, 그들의 태도 속에 마리아와 요셉은 같이 압도되었겠지요. 일말의 의심이 남아있었을 요셉조차 그들의 태도에 함께 전이 되어 하느님을 찬미했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렇게 예상조차 못했던 상황도 다 지나가고 먼길, 묵을 집을 찾느라 애태움, 마굿간에서의 아기 탄생 등 그리고 이어진 갑작스런 방문들 뒤에 두 사람은 녹초가 되어 잠들어있습니다.
이 그림의 비밀은 천사입니다. 천사는 마리아가 아니라 요셉의 어깨 위에 다정하게 손을 올리고 무엇인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까요? 요셉은 처음 마리아의 임신을 알았을 때 마리아가 곤란하지 않도록 아무도 몰래 파혼을 하기로 마음먹습니다. 이스라엘 남성으로서 취할 수 있는 가장 관대하고 고귀한 행위라 할 수 있지 않겠는지요?  보통 남성이라면처녀의 집에 찾아가 난동을 부렸을 것이고, 아무도 그를 탓하지 않았을 것입 니다. 그리고 그 처녀는 돌에 맞아 죽었겠지요.  이것은  이스라엘의  건강한  청년이 할 수 있는 정당한 처사였습니다. 요셉은 이 보통의 처사를 훨씬 넘어서는 인품을  지녔기에,  그  와중에  마리아가  곤란하지  않도록  배려하기까지  합니다.
그런 그에게 꿈에 천사가 나타나 성령으로 잉태한 하느님의 아들임을 밝히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단순히 이 말을 받아들여 마리아를 아내로 맞이하고 이제 그 아기가 세상에 태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의 마음이 일사천리 꽝 도장 찍듯 모든 고뇌와 의심, 두려움이 한
번에 다 사라져버리지는 않았나봅니다. 여기에 오히려 요셉의 인물됨이 더 드러납니다. 그는 늘 마리아와 아기 예수 뒤에 머무는데, 건강한 남성으로서 이것이 쉬웠을 리 없을 것입니다. 이 아기가 하느님의 아들임을 진정으로 감지하고, 이스라엘이 그리도 고대하던 분이 자신의 품에 있음에 감사와 경외가득 찬 순간들도 맛보았을 것입니다. 높고 부유한 이가 아니라 작고 가난한 이를 찾아오신 하느님, 그 신비 앞에 압도당하는 체험도 했을  것입니다.  그래도, 그렇다 해도 한 인간으로서 자기성취의 욕구를 끊임없이 포기하며, 젊디 젊은 한 남성이 그림자처럼 오직 뒷바라지만 하는 것을 누가 감히 쉽다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요셉에게 천사는 늘 길동무가 되어주지 않았겠는지요? 마리아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남성으로서의 비참함마저도 그에게 예외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누구나  그러하듯  참힘은  인간에게서  오지 않습니다. 그런 그에게 천사는 참된 생명의 기쁨을, 자신의 아들의 부활로부터 샘솟는 기쁨을 미리 맛보게 해주지 않았겠는지요? 죽음으로부터 부활한 생명만이 모든 고뇌의 유일하고 참된 답이니까요.

요셉은 자면서도 지팡이를 자신에게서 떼어놓지 않습니다. 지팡이는 당시 길가는 순례자들의 무기였지요. 만일의 사태를 생각하는 그의 사려깊음이 다시 드러나는  장면입니다.  마리아는  아기를  감히  품에  안지도  못하고  두  손으로 둥그렇게 감싸고 있습니다. 마음 가장 깊은 곳을 움직이는 분, 그분이 자신의 아들, 이 둘 사이에 마리아의 신비가 있습니다.

 

 

 

 

시토회 수정의 성모 트라피스트 수녀원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4년 11월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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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평범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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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 얀 프로스트의 “구두쇠와 죽음”이라는 그림입니다. 왼쪽 고리대금업자가 손으로 장부를 가리키며 돈이 모자란다고 따지나 봅니다. 오른 쪽 사람은 젊은 가장일 듯 한데 얼굴에 근심이 가득합니다. 돈을 갚지 못할 때 일어날 온갖 일들이 그의 속을 마구 긁어놓는 듯 양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습니다. 굶주림, 추위, 집에서 쫓겨남, 어린 아이들의 배고파 보채는 소리가 벌써 귀에 쟁쟁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그는 손가락을 높이 치켜들고 우선 이 정도로 봐달라고 사정을 해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고리대금업자에게 그의 말이 도무지 먹혀들어 갈 것 같지는 않습니다. 고리대금업자 뒤 선반에는 저당 잡힌 물건들이 자리를 잡고 있고, 그의 팔 밑에는 이자를 두둑이 보탠 돈자루들이 채권증서와 함께 깔려있습니다. 아마도 돈자루 하나마다 이 젊은이와 같은, 아니면 더 비참한 사연들이 담겨있겠지요. 그에게는 이 젊은 사람도 돈자루 뒤에 가려 보이지 않는 듯합니다. 이상하게도 이 구두쇠의 눈길은 젊은이를 비켜 엉뚱한 곳을 바라보고 있는데, 어찌 보면 무심한 듯,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 태평스런 표정입니다. 이 구두쇠의 얼굴을 사악하게 묘사하지 않은 것이 처음에는 조금 이상했는데, 그림을 자꾸 보다보니 15세기 화가가 보고 있는 것이 어쩌면 20세기 현대와 그리도 같은지 새삼 놀라게 됩니다. 사람의 생명마저 앗을 수 있는 부조리가 있는 곳에 진을 친 사람들은 자신들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결코 하지않는다는 것입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부자와 라자로에 대해 이야기할 때도 상황은 이와 똑같습니다. 부자는 나쁜 짓을 한 것이 아니라, 그저 눈과 귀를 막고 있었을 뿐입니다. 날마다 잔치를 열고 맛있는 음식과 좋은 옷들이 넘쳐나도, 문 앞에서 매일 보는 거지의 처량함이 전혀 그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지요. 이 구두쇠처럼전혀 엉뚱한 곳을 바라봅니다. 나와는 아무 상관도 없다는 듯이…. 이 구두쇠의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외모는 현대의 악의 구조 속에 있는 이들을 절로 생각게 합니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체계적, 조직적으로 노동자나 하청업자들에게 불리한 일을 저지르는 기업주들의 평범한 얼굴이 절로 떠오를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구두쇠와 젊은이 사이에 어떤 존재, 죽음의 사신이 서있습니다. 물론 이 두 사람의 눈에는 그 존재가 보이지 않습니다. 이것으로는 당신이 갚아야 할 것에 비하면 어림 반 푼어치도 안된다고 무심한 듯 응답하는 그에게 죽음의 사신은 증서를 가리키며“너의 생명에 대한 계산은 어찌 될 것 같으냐?”고 묻는 듯합니다. 모든 것이 명백해지는 날, 그 날이 오기 전 이미 어떤 빛이 구두쇠와 죽음의 사신을 환히 너무도 환히 비추고 있습니다. 이 빛은 창문을 통해 들어온 빛일 수는 없으니, 빛은 앞에서 오는데 창문은 그들 뒤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 빛은 생명을 주는 생명자체이지만 이를 거절하는 이에게는 심판이 될 수밖에 없는 빛이기도 합니다. 그는 자신의 생명이 거두어지는 죽음의 순간 앞에서도 돈 계산에만 몰두해있습니다. 알몸으로 와서 알몸으로 돌아가야 하건만 그는 알몸이 될 수가 없습니다. 아마 죽음이 왔음을 알아채는 순간에도 그는 자신의 손에서 보물들을 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 악이 평범하듯, 죽음도 평범하게 옵니다. 두 평범 사이, 줄다리기 포기하고 한쪽만을 잡은 그는, 잘 달려온 인생의 마지막 순간, 자신이 잡은 것의 끝자락에서 추락할 수밖에 없을지 모릅니다.

마지막 순간에라도 그가 다른 한 쪽을 잡을 수 있기를 ….

 

 

 

 

 

시토회 수정의 성모 트라피스트 수녀원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4년 10월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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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남은 몫

“묶

여있는 노예”라는 제목으로 미켈란젤로의 중반기에 속하는 작품입니다. 많은 이들이 이것을, 솜씨 좋은 미켈란젤로가 미완성으로 남긴 작품이라고 보는 경향이 있는 모양입니다. 사실 그는 젊은 석수 3명이 3시간에 걸쳐 해낼 양을 혼자서 단 15분 만에 그 단단한 돌을 자신이 원하는 형상대로 쪼아낼 수 있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사방으로 돌조각이 튀고 정을 한 번 댈 때마다 어떤 형상이 이루어지는 모습을 실제로 보는 것 자체가 경이로움이었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 이 작품이 미완성이라 여겨지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만, 그는 의도적으로 이렇듯 덜 떨어진 모습 그대로의 작품을 우리에게 남겨주었습니다. 그가 묶여있는 노예의 모습을 여러 차례 조각한 것에서 그렇게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이 조각은 ‘최후 심판’의 벗겨진 얼굴가죽과 함께 일종의 그의 자화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엄청난 재능과 주위 사람들과 도저히 어울릴 수 없는 독특한 성격을 동시에 소유한 사람, 일생 자신과의 싸움에서 물러날 수 없는 끈질긴 투지를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여러 차례 묶인 노예를 조각한 것, 그것도 어설픈 모습, 형태만 새긴 후 도중에 그만둔 듯 한 모습으로 남긴 것에는 그의 강렬한 의도가 작용하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이제 그의 마음 속 오솔길을 한 번 따라 걸어보기로 합시다. 이 노예는 형태나 윤곽만 흐릿한 것이 아니라, 왼발과 왼손은 아직 돌 속에 그대로 박혀있어 마치 이제 막 돌 속에서 태어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돌 속에서 빠져나온 오른발은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왼발과 함께 묶여있고, 그나마 자유로운 오른손을 높이 치켜들고 온힘을 다해 벗어나고자 몸부림을 칩니다. 돌 속에 갇히고, 나온 부분마저 묶인 처지! 이것이 재능 가득한 미켈란젤로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입니다. 세기를 뛰어넘는 재능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고뇌! 그 탓일까요? 그는 결혼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술에 온생을 바친 사람이기도 하지만, 자신을 저 깊은 바닥에서부터 옭매고 있는 것으로부터의 탈출에 온생을 바친 이이기도 합니다. 그의 초기 작품 바쿠스나 다윗상은 젊고 힘있고, 육체적 아름다움이 사람의 눈을 끄는 작품들입니다. 그런데 말년의 그의 삐에타상(성모님이 숨을 거둔 예수님을 안고 있는 모습)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그 삐에타와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과연 그의 작품이 맞는지 의심이 갈 정도로 성모님과 예수님의 얼굴 형상마저 뭉개지거나 혹은 서툰 조각가의 작품 같습니다. 그는 마치 아름다운 작품 같은 것은 이제 필요없다는 듯 미완성으로 이 작품을 남겼습니다. 어쩌면 이 작품 역시 의도적 미완성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놀라운 재능과 자신의 몸 구석구석 놓치않는 노예상태의 긴장은 아마도 이 시점에 풀리지 않았나 짐작해봅니다. 노예임을 자각하는 정도가 아니라, 진짜 노예인 듯 거기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쳤던 한 구도자는 묶인 끈을 풀어줄 분을, 자신이 미완성으로 남길 수밖에 없는 삶의 짐을 대신 져줄 분을 알아보았습니다. 아무리 손을 쳐들고 반항해도 스스로는 끊을 수 없는 쇠사슬의 무게가 어떤지를, 그 무게를 벗으려 할수록 더 옥죄는 인간 비극의 드라마를 자신의 온생애를 통해 체험했던 사람 같습니다. 세기를 초월하는 재능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인간의 부자유를 자신이 짊어진 한 개인의 문제로 그치지 않고, 인류 공통의 짐임을 알아보고, 거기서부터의 해방을 추구한 이들이 역사상 있어왔습니다. 그는 한 예술가로서의 삶, 감탄할 그 삶 이상으로 인간 구원의 물음에 매달렸습니다. 그리스도 십자가의 남은 몫은 그와 마찬가지로 지금 이 시대에 사는 우리에게도 예외없이 다가옵니다. 이 몫을 자신의 것으로 알아들을 수 있는 이들에게 미켈란젤로의 작품은 많은 것을 이야기해줍니다. 그 목소리가 들리는지요?

 

 

 

 

 

시토회 수정의 성모 트라피스트 수녀원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4년 9월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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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핍된 단 한 가지

 

쪽으로 싹 갈라놓은 듯 서로 다른 두 그림, 흑백이기는 하지만 색깔도 흰색과 검은 색으로 대비되어 있습니다. 오른 쪽은 나이 많은 어른, 왼쪽은 아직 어린 아이입니다. 한 사람은 손에 무기를, 다른 사람은 고운 음을 내는 수금을 들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표정은 두려움, 불안, 시기, 공격성으로 일그러져있고, 다른 쪽은 평화, 풍요로움, 잔잔한 기쁨이 흐르고 있습니다. 한 사람은 손을 꽉 움켜쥐고있고, 다른 이는 활짝 펼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눈은 다른 이를 훔쳐보거나 혹은 흘겨보고 있고, 다른 이는 자신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을 향해 깊이 침잠해있습니다. 한 쪽은 부러질 듯 이를 꽉 다물고 있고 다른 쪽은 부드러운 미소가 감돌고 있습니다.

이미 아시겠지만 다윗과 사울왕입니다. 한 시대 한 공간을 살아가지만 각자가 차지하고 있는 공간은 참으로 다릅니다. 이 드넓은 우주 공간, 내가 차지한 이 좁은 곳마저 폭력과 두려움으로 꽉 차게 할 수 있고, 한없이 좁은 이 나만의 자리를 기쁨과 평화, 사랑이 넘쳐나는 작은 샘이 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사울왕은적을 물리치고 백성이 평화로워진 데 대한 감사보다는 자신보다 공적을 더 쌓은 다윗이 임금으로 추대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한 나라의 왕이지만 백성을 아끼는 왕이 아니라, 자신의 왕위와 안녕이 더 중심인 왕입니다. 백성을 염려한다면 적을 물리칠 용기와 지혜를 지닌 다윗같은 신하가 생긴 것에 든든함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쉽사리 다윗에게 왕위가 넘어갈 수 있다는 쪽으로 움직였고 그럴 때면 마음이 너무도 산란하여 견딜 수가 없어 평화 가득한 다윗의 수금 소리를 들어야만 진정이 되곤 하였습니다. 평화가 가득한 이의 음악, 글, 말, 표정은 다른 사람을 치유해줄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마지막에는 그마저 효과가 없고 오히려 그의 질투심을 더 부추길 뿐이었습니다. 다윗은 참으로 약점이 많은 이였지요. 아내 바쎄바를 얻는 과정만 해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는 또한 하느님의 힘과 하느님의 자비를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약함이 죄로 이어질 때마다 그는 타인의 충고를 받아들이고 “제가 하느님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 그분의 손에 맡깁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그의 중심에는 자신이 아니라 왕과 백성 그리고 무엇보다 하느님이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사울이 자신을 죽이려함에 그의 손길을 피해 도망다닐 때 그를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와도 하느님이 정한 사람을 내 손으로 없앨 수 없다고 하며 그를 놓아주고는 정처없이 떠도는 삶을 택합니다. 평탄하지 않은 자신의 삶 굽이굽이 다윗은 끝없이 자신의 중심을 비워내고 하느님으로 채웠습니다. 그의 평화, 고요, 기쁨이 흘러나오는 곳은 바로 이 자리입니다. 이것이 사울에게 결핍된 단 한가지입니다.

 

중심에서 나올수록 중심에 집착할수록

약함이 시기심같은 약함이

나를 물들이지 않습니다 사람을 집어삼킵니다

중심이 텅 빌수록 중심을 채우려할수록

하느님의 색깔이 탐욕이

나를 물들이지요 사람을 목매 끌고다닙니다

 

 

 

 

 

시토회 수정의 성모 트라피스트 수녀원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4년 8월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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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음에 목말라

 

즘 세상이 혼탁하고 혼탁하여 숨쉬면 더러운 공기가 폐를 가득 채워버릴 듯 합니다. 그 혼탁함이 온몸을 돌아 내 피에 섞일 수도 있을 것 같은 느낌에 몸이 오싹해질 때조차 있습니다. 나는 그들과 달라! 나는 그렇게 살지 않아! 이렇게 자부할 수 있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들의 삶을 들여다 볼 때 자신이 비난하는 이들과 별로 다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공직자로 내세울 만한 사람이 그리도 없어 지명된 이들마다 온갖 비리와 부정으로 범벅이 되어 있건만 정작 그 당사자들은 대체 뭐가 그리 문제냐는 듯한 표정들이니, 이것이 더 한심한 일이 아닌가 합니다. 나만 그런가 세상이 다 그런걸. 그렇게 못하는 것은 능력이 없는 탓인 것을 괜히 시샘을 하고 있는 것이라 여기는 듯 한 표정마저 읽힙니다.

세상에서 남의 것 탐하지 않고, 주어진 대로 살다보니 자기 앞가림조차 할 수 없는 처지로 사는 사람들은 병신, 쪼다 소리나 듣게 되는 그런 세상이 되었음에도 가진 것 많은 이들은 이런 세상이 정상이라고, 그러니 없는 사람들은 그러려니 하라고, 괜찮은 세상이라고 떠들어댑니다.

타인의 아픔을 바라볼 여유라곤 바늘 끝만큼도 없거니와 그들이 가진 것조차 어떻게든 빼앗아야 성이 찰 모양입니다.

정말로 목이 마릅니다. 맑고 바르고 깨끗한 그래서 남을 씻어주고, 목마름을 채워주고, 남의 모습을 비추어줄 수 있는 어떤 것이 그립습니다. 타는 목마름에 온갖 그림들을 다 뒤적여 보았지만 찾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고요한 자연 풍광을 그린 그림도 이미 그 안에는 작가의 의도가 들어있기에, 타인의 모습을 비추어 줄 그런 정도의 것을 채워줄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다 접한 것이 자연을 찍은 사진이었습니다. 한 방울, 두 방울 고인 맑은 이슬들, 투명하여 남의 모습을 담을 수 있는 그 청결함! 하지만 그 속엔 얼마나 많은 먼지들과 우리가 모를 세균들이 있는지요? 그러나 세상 안의 맑음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요? 세균 하나 없는 맑은 물을 찾는다면 약국에서 증류수를 사면 간단히 해결됩니다. 하지만 증류수라는 물은 우리에게 생명의 물이 되어주지는 못합니다. 생명의 물 속엔 적당히 균도 들어있지만 그 속에 미네랄이나 온갖 것들이 포함되어 있어 우리를 살려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불완전하지만 남을 살릴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힘이 맑음이 아닐까요

 

하늘은 가난한 이들 위해 타인의 고통에 마음 무너져

땅은 온유한 이들 위해 우는 이들

그들 마음의 명랑함

땅 위 온갖 것들 그들 정신의 평온함

독차지하고 있는 이들 어찌 보지 못하는가

비웃음 소리 땅을 채워도

놓칠까 빼앗길까 당할까 자신의 것을 빼앗기는 것 외에

전전긍긍 슬퍼할 일이 도대체 없는 이들

속태우는 소리 또한 그 마음의 자물쇠

땅을 채우고 있지 열 사람이 없다네

이들이 잠시, 눈깜짝 할 사이 그 속 썩는 냄새

소유하고 있는 이 땅 누구를 먼저 질식시키는가?

어떤 이들은 영원히 소유한다네

 

 

 

 

 

시토회 수정의 성모 트라피스트 수녀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