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5년 2월의 말씀

2월소식지

 

한 사람 여기!

런 작품을 낳을 수 있는 작가의 마음은 어떤 것인가 생각해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그득해짐을 느낍니다. 금방이라도 몸을 일렁거리며 낮은 노래 가락이 흘러나올 것 같습니다. 실제 저 자세를 취해보면 마음이 한껏 가라앉으면서 눈이 감깁니다. 이 조각상의 모습이 먼저 안으로 들어와 버렸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삶 안의 다른 것들은 뒤로 사라지고 그곳에 있는 자신마저도 잊어버리게 되는 것 같습니다.

자신마저 잊으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자신을 잊어도 되는 것일까요? 잊을 수나 있는 것일까요?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자신을 잊어야 참 자신이 될 수 있습니다. 늘 자신을 의식하는 것은 건강하지 않다는 하나의 표지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 아기를 바라볼 때, 악기나 성악을 하는 사람들이 절정에 달할 때를 생각해보십시오. 자신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도 가장 자신다운 모습으로 자신이 아닌 상대 혹은 하고 있는 일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신을 잊은 집중은 그 자체로 사람의 가장 깊은 곳을 열어줍니다.

사람들은 이 자신을 잊은 집중이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자기 잊음은 생략해버리고 값싼 집중만을 얻고자 온갖 중독에 빠집니다. 인간은 본래 이렇게 창조되었지만 스스로의 자유로 자신의 모습을 잃는 죄를 범하였지요. 그래서 가장 자신다워지는, 자신을 잊는 집중은 엄청난 노력으로도 쉽지 않게 되어버렸고, 그것이 무엇인지 감을 잡기도 어려운 것이 되었습니다. 여러 종교 종파들이 이 집중을 수행의 목표(그리스도교 수도생활은 그렇지 않음)로 삼고 있는 것을 보더라도 인간이 얼마나 여기서 멀어져 있는지 알게 해줍니다.

사실 이 작품을 처음 접했을 때 이사야의 수난받는 야훼의 종이 저절로 떠올랐습니다. 그런 수난을 겪은 사람이 아니고서는 나올 수 없는 모습이라고 할까요. 그의 모습에는 왠지 삶이 철저히 무너진 어느 한 구석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야훼의 종처럼 그는 침뱉음을 당해도 조롱과 배신 속에서도 분노와 증오로 활활 타올라 자신을 소진하지 않고, 자신을 잊고 그것을 허락하신 하느님의 뜻 속으로 깊이 깊이 내려가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엄마에게 온전히 자신을 내맡기는 아기처럼 인생이라는 품이 곧 하느님의 품이 된 사람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온전히 열린 자세, 자기망각, 온전한 집중 이 세 가지가 하나가 된 하느님의 사람이 떠오릅니다. 자신의 고난과 수난에는 초연하다는 말이 어울리는 그런 모습이면서 상한 갈대 같고 꺼져가는 등불같은 백성과 이웃에게는 온마음이 기울어지는, 자신일랑 온전히 잊은 한 사람이 떠오릅니다. 한없이 고요해보이지만 저 고요함에서 일어서면 누구보다 삶의 한복판에서 움직일 그러한 사람, 가장 분주히 움직여도 저 고요의 한 자락은 반드시 끌고 가는 사람, 우리가 그리워하는 한 사람이 떠오릅니다.

 

한 사람 여기

 

고요함 그대로

세상 온갖 것에

사랑의 품인 듯 몸 맡긴 사람

한 사람 여기

절절함 그대로

군중의 성난 고함 한복판에서도

상한 갈대 그들을 한없이 연민하는 사람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5년 1월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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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음… 영혼의 그릇

말이 없어져버리게 하는 2014년을 보내고, 새롭게 한 해를 선물받았습니다. 쉰내, 썩은 내, 곰팡이 냄새로 내 코가 아예  썩어버리지 않았는지 의심스러웠던 한 해였습니다. 우리 안에서 맑음을 길러내지 않으면 누구라도 사회 전체 가득한 그 냄새에 같이 절어버릴 수 있음을, 인간은 누구나 약함을, 새해라 해서 별 뾰족한 수가 있는 것은 아님을 마음에 새기고 싶습니다. 내 안의 맑음을 보고, 그것을 퍼올리는 작업을 하지 않으면, 돌아가는 세상, 그 평범함 속 지독한 자기중심성이 우리를 가득 채워 썩게 하고 말 것입니다.
여기에 한 아이가 있습니다. 요즘 세상 기준으로는 예쁘거나 아름답다고 할 수 없습니다만, 이 아이가 제 마음 속으로 한 걸음 들어와 앉았습니다. 사실 평범한 얼굴로 화가가 인물화의 주인공으로 잡을 만한 미인은 아닙니다. 화가는 ‘진주귀걸이를 한 소녀’를 그린 베르메르인데, 구도면에서는 두 그림이 무척 닮아있습니다만 두 소녀가 풍기는 분위기는 상당히 다릅니다. 진주 소녀의 눈에 있는 왠지 모를 흔들림 같은 것이 이 소녀의 눈에는 없습니다. 그저 맑고 순수합니다. 하지만흔들림 없이 단호한 눈빛과 다문 입술은 아이의 속이 제법 단단해보이게 만듭니다. 진주귀걸이를 한 소녀의 입술은 금방이라도 움직일 것같은 느낌을 주지만 웃을
지 울지 아니면 무슨 말을 할지 알 수가 없습니다. 신비한 느낌과 함께 무엇인가 속 깊이 흔들림이 있음이 감지됩니다. 그런데 이 아이는 까르르 웃음이라도 터트릴 것 같습니다. 이 맑음! 새해 아침을 고요히 물들일 수 있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맑을 때만이겠지요? 이 아이의 삶 역시 만만치 않을 것입니다만, 눈빛의 단단함이 그 역경들을 헤치고 그 맑음을 더 큰 성숙으로 이어갈 수 있을 것으로 믿게 만들어줍니다. 설사 한 때 이 맑음을 잃을지라도 다시 찾을 수 있는 강함도 느껴집니다. 그렇게 견뎌내고 넘어진 후 다시 일어선 맑음은 더 깊을 터이지요. 그리고 언젠가는 맑음이란 저절로 지켜지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흔들림에 ‘아니오’를 할 수 있는 밝은 눈과 힘참이 필요함도 깨달을 터이지요. 흔들리지 않고 성장하는 것이 있으리요만, 늘 흔들리기만 해서는 참 사람살이를 배워갈 수 없습니다.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 이보다 더 귀한 것이 없음을 깨닫는 날, 맑음의 고귀함도 더 크게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맑음은 나보다 남을 더 담을 수 있는 영혼의 그릇이니까요.

 

 

<희망의 소곡>

희망이 익고 익어
텅빈 알
하나 낳았네

눈에 보이지 않아
기다림인지
아픔인지 모를
더께 낀 세월의 골동품

누구도 탐내지 않는
허무의 흐름
그 육중함마저 날아가고

희망 아예
사라진
무의 가벼움

그 자리
텅빈 알 하나

 

 

 

 

시토회 수정의 성모 트라피스트 수녀원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4년 12월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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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요셉 그 너른 그늘

 

브란트다운 통찰이 빛나는 그림 중 하나입니다. 얼핏 보면 그저 성탄을 그린 것 같지만 조용히 그림 앞에 머물면 렘브란트의 마음이 보여옵니다. 그 비밀을  한 번 엿봅시다. 우선 배경이 되는 상황부터 살펴보면 아마도 허겁지겁 달려온 목자들이 다녀가고, 이제 조용히 숨을 고르나 싶을 때 동방박사들이 경외감으로 가득 차 들어왔습니다. 그들의 말, 그들의 태도 속에 마리아와 요셉은 같이 압도되었겠지요. 일말의 의심이 남아있었을 요셉조차 그들의 태도에 함께 전이 되어 하느님을 찬미했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렇게 예상조차 못했던 상황도 다 지나가고 먼길, 묵을 집을 찾느라 애태움, 마굿간에서의 아기 탄생 등 그리고 이어진 갑작스런 방문들 뒤에 두 사람은 녹초가 되어 잠들어있습니다.
이 그림의 비밀은 천사입니다. 천사는 마리아가 아니라 요셉의 어깨 위에 다정하게 손을 올리고 무엇인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까요? 요셉은 처음 마리아의 임신을 알았을 때 마리아가 곤란하지 않도록 아무도 몰래 파혼을 하기로 마음먹습니다. 이스라엘 남성으로서 취할 수 있는 가장 관대하고 고귀한 행위라 할 수 있지 않겠는지요?  보통 남성이라면처녀의 집에 찾아가 난동을 부렸을 것이고, 아무도 그를 탓하지 않았을 것입 니다. 그리고 그 처녀는 돌에 맞아 죽었겠지요.  이것은  이스라엘의  건강한  청년이 할 수 있는 정당한 처사였습니다. 요셉은 이 보통의 처사를 훨씬 넘어서는 인품을  지녔기에,  그  와중에  마리아가  곤란하지  않도록  배려하기까지  합니다.
그런 그에게 꿈에 천사가 나타나 성령으로 잉태한 하느님의 아들임을 밝히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단순히 이 말을 받아들여 마리아를 아내로 맞이하고 이제 그 아기가 세상에 태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의 마음이 일사천리 꽝 도장 찍듯 모든 고뇌와 의심, 두려움이 한
번에 다 사라져버리지는 않았나봅니다. 여기에 오히려 요셉의 인물됨이 더 드러납니다. 그는 늘 마리아와 아기 예수 뒤에 머무는데, 건강한 남성으로서 이것이 쉬웠을 리 없을 것입니다. 이 아기가 하느님의 아들임을 진정으로 감지하고, 이스라엘이 그리도 고대하던 분이 자신의 품에 있음에 감사와 경외가득 찬 순간들도 맛보았을 것입니다. 높고 부유한 이가 아니라 작고 가난한 이를 찾아오신 하느님, 그 신비 앞에 압도당하는 체험도 했을  것입니다.  그래도, 그렇다 해도 한 인간으로서 자기성취의 욕구를 끊임없이 포기하며, 젊디 젊은 한 남성이 그림자처럼 오직 뒷바라지만 하는 것을 누가 감히 쉽다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요셉에게 천사는 늘 길동무가 되어주지 않았겠는지요? 마리아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남성으로서의 비참함마저도 그에게 예외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누구나  그러하듯  참힘은  인간에게서  오지 않습니다. 그런 그에게 천사는 참된 생명의 기쁨을, 자신의 아들의 부활로부터 샘솟는 기쁨을 미리 맛보게 해주지 않았겠는지요? 죽음으로부터 부활한 생명만이 모든 고뇌의 유일하고 참된 답이니까요.

요셉은 자면서도 지팡이를 자신에게서 떼어놓지 않습니다. 지팡이는 당시 길가는 순례자들의 무기였지요. 만일의 사태를 생각하는 그의 사려깊음이 다시 드러나는  장면입니다.  마리아는  아기를  감히  품에  안지도  못하고  두  손으로 둥그렇게 감싸고 있습니다. 마음 가장 깊은 곳을 움직이는 분, 그분이 자신의 아들, 이 둘 사이에 마리아의 신비가 있습니다.

 

 

 

 

시토회 수정의 성모 트라피스트 수녀원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4년 11월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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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평범 사이

 

15

세기 얀 프로스트의 “구두쇠와 죽음”이라는 그림입니다. 왼쪽 고리대금업자가 손으로 장부를 가리키며 돈이 모자란다고 따지나 봅니다. 오른 쪽 사람은 젊은 가장일 듯 한데 얼굴에 근심이 가득합니다. 돈을 갚지 못할 때 일어날 온갖 일들이 그의 속을 마구 긁어놓는 듯 양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습니다. 굶주림, 추위, 집에서 쫓겨남, 어린 아이들의 배고파 보채는 소리가 벌써 귀에 쟁쟁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그는 손가락을 높이 치켜들고 우선 이 정도로 봐달라고 사정을 해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고리대금업자에게 그의 말이 도무지 먹혀들어 갈 것 같지는 않습니다. 고리대금업자 뒤 선반에는 저당 잡힌 물건들이 자리를 잡고 있고, 그의 팔 밑에는 이자를 두둑이 보탠 돈자루들이 채권증서와 함께 깔려있습니다. 아마도 돈자루 하나마다 이 젊은이와 같은, 아니면 더 비참한 사연들이 담겨있겠지요. 그에게는 이 젊은 사람도 돈자루 뒤에 가려 보이지 않는 듯합니다. 이상하게도 이 구두쇠의 눈길은 젊은이를 비켜 엉뚱한 곳을 바라보고 있는데, 어찌 보면 무심한 듯,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 태평스런 표정입니다. 이 구두쇠의 얼굴을 사악하게 묘사하지 않은 것이 처음에는 조금 이상했는데, 그림을 자꾸 보다보니 15세기 화가가 보고 있는 것이 어쩌면 20세기 현대와 그리도 같은지 새삼 놀라게 됩니다. 사람의 생명마저 앗을 수 있는 부조리가 있는 곳에 진을 친 사람들은 자신들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결코 하지않는다는 것입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부자와 라자로에 대해 이야기할 때도 상황은 이와 똑같습니다. 부자는 나쁜 짓을 한 것이 아니라, 그저 눈과 귀를 막고 있었을 뿐입니다. 날마다 잔치를 열고 맛있는 음식과 좋은 옷들이 넘쳐나도, 문 앞에서 매일 보는 거지의 처량함이 전혀 그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지요. 이 구두쇠처럼전혀 엉뚱한 곳을 바라봅니다. 나와는 아무 상관도 없다는 듯이…. 이 구두쇠의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외모는 현대의 악의 구조 속에 있는 이들을 절로 생각게 합니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체계적, 조직적으로 노동자나 하청업자들에게 불리한 일을 저지르는 기업주들의 평범한 얼굴이 절로 떠오를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구두쇠와 젊은이 사이에 어떤 존재, 죽음의 사신이 서있습니다. 물론 이 두 사람의 눈에는 그 존재가 보이지 않습니다. 이것으로는 당신이 갚아야 할 것에 비하면 어림 반 푼어치도 안된다고 무심한 듯 응답하는 그에게 죽음의 사신은 증서를 가리키며“너의 생명에 대한 계산은 어찌 될 것 같으냐?”고 묻는 듯합니다. 모든 것이 명백해지는 날, 그 날이 오기 전 이미 어떤 빛이 구두쇠와 죽음의 사신을 환히 너무도 환히 비추고 있습니다. 이 빛은 창문을 통해 들어온 빛일 수는 없으니, 빛은 앞에서 오는데 창문은 그들 뒤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 빛은 생명을 주는 생명자체이지만 이를 거절하는 이에게는 심판이 될 수밖에 없는 빛이기도 합니다. 그는 자신의 생명이 거두어지는 죽음의 순간 앞에서도 돈 계산에만 몰두해있습니다. 알몸으로 와서 알몸으로 돌아가야 하건만 그는 알몸이 될 수가 없습니다. 아마 죽음이 왔음을 알아채는 순간에도 그는 자신의 손에서 보물들을 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 악이 평범하듯, 죽음도 평범하게 옵니다. 두 평범 사이, 줄다리기 포기하고 한쪽만을 잡은 그는, 잘 달려온 인생의 마지막 순간, 자신이 잡은 것의 끝자락에서 추락할 수밖에 없을지 모릅니다.

마지막 순간에라도 그가 다른 한 쪽을 잡을 수 있기를 ….

 

 

 

 

 

시토회 수정의 성모 트라피스트 수녀원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4년 10월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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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남은 몫

“묶

여있는 노예”라는 제목으로 미켈란젤로의 중반기에 속하는 작품입니다. 많은 이들이 이것을, 솜씨 좋은 미켈란젤로가 미완성으로 남긴 작품이라고 보는 경향이 있는 모양입니다. 사실 그는 젊은 석수 3명이 3시간에 걸쳐 해낼 양을 혼자서 단 15분 만에 그 단단한 돌을 자신이 원하는 형상대로 쪼아낼 수 있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사방으로 돌조각이 튀고 정을 한 번 댈 때마다 어떤 형상이 이루어지는 모습을 실제로 보는 것 자체가 경이로움이었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 이 작품이 미완성이라 여겨지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만, 그는 의도적으로 이렇듯 덜 떨어진 모습 그대로의 작품을 우리에게 남겨주었습니다. 그가 묶여있는 노예의 모습을 여러 차례 조각한 것에서 그렇게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이 조각은 ‘최후 심판’의 벗겨진 얼굴가죽과 함께 일종의 그의 자화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엄청난 재능과 주위 사람들과 도저히 어울릴 수 없는 독특한 성격을 동시에 소유한 사람, 일생 자신과의 싸움에서 물러날 수 없는 끈질긴 투지를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여러 차례 묶인 노예를 조각한 것, 그것도 어설픈 모습, 형태만 새긴 후 도중에 그만둔 듯 한 모습으로 남긴 것에는 그의 강렬한 의도가 작용하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이제 그의 마음 속 오솔길을 한 번 따라 걸어보기로 합시다. 이 노예는 형태나 윤곽만 흐릿한 것이 아니라, 왼발과 왼손은 아직 돌 속에 그대로 박혀있어 마치 이제 막 돌 속에서 태어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돌 속에서 빠져나온 오른발은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왼발과 함께 묶여있고, 그나마 자유로운 오른손을 높이 치켜들고 온힘을 다해 벗어나고자 몸부림을 칩니다. 돌 속에 갇히고, 나온 부분마저 묶인 처지! 이것이 재능 가득한 미켈란젤로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입니다. 세기를 뛰어넘는 재능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고뇌! 그 탓일까요? 그는 결혼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술에 온생을 바친 사람이기도 하지만, 자신을 저 깊은 바닥에서부터 옭매고 있는 것으로부터의 탈출에 온생을 바친 이이기도 합니다. 그의 초기 작품 바쿠스나 다윗상은 젊고 힘있고, 육체적 아름다움이 사람의 눈을 끄는 작품들입니다. 그런데 말년의 그의 삐에타상(성모님이 숨을 거둔 예수님을 안고 있는 모습)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그 삐에타와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과연 그의 작품이 맞는지 의심이 갈 정도로 성모님과 예수님의 얼굴 형상마저 뭉개지거나 혹은 서툰 조각가의 작품 같습니다. 그는 마치 아름다운 작품 같은 것은 이제 필요없다는 듯 미완성으로 이 작품을 남겼습니다. 어쩌면 이 작품 역시 의도적 미완성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놀라운 재능과 자신의 몸 구석구석 놓치않는 노예상태의 긴장은 아마도 이 시점에 풀리지 않았나 짐작해봅니다. 노예임을 자각하는 정도가 아니라, 진짜 노예인 듯 거기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쳤던 한 구도자는 묶인 끈을 풀어줄 분을, 자신이 미완성으로 남길 수밖에 없는 삶의 짐을 대신 져줄 분을 알아보았습니다. 아무리 손을 쳐들고 반항해도 스스로는 끊을 수 없는 쇠사슬의 무게가 어떤지를, 그 무게를 벗으려 할수록 더 옥죄는 인간 비극의 드라마를 자신의 온생애를 통해 체험했던 사람 같습니다. 세기를 초월하는 재능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인간의 부자유를 자신이 짊어진 한 개인의 문제로 그치지 않고, 인류 공통의 짐임을 알아보고, 거기서부터의 해방을 추구한 이들이 역사상 있어왔습니다. 그는 한 예술가로서의 삶, 감탄할 그 삶 이상으로 인간 구원의 물음에 매달렸습니다. 그리스도 십자가의 남은 몫은 그와 마찬가지로 지금 이 시대에 사는 우리에게도 예외없이 다가옵니다. 이 몫을 자신의 것으로 알아들을 수 있는 이들에게 미켈란젤로의 작품은 많은 것을 이야기해줍니다. 그 목소리가 들리는지요?

 

 

 

 

 

시토회 수정의 성모 트라피스트 수녀원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4년 9월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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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핍된 단 한 가지

 

쪽으로 싹 갈라놓은 듯 서로 다른 두 그림, 흑백이기는 하지만 색깔도 흰색과 검은 색으로 대비되어 있습니다. 오른 쪽은 나이 많은 어른, 왼쪽은 아직 어린 아이입니다. 한 사람은 손에 무기를, 다른 사람은 고운 음을 내는 수금을 들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표정은 두려움, 불안, 시기, 공격성으로 일그러져있고, 다른 쪽은 평화, 풍요로움, 잔잔한 기쁨이 흐르고 있습니다. 한 사람은 손을 꽉 움켜쥐고있고, 다른 이는 활짝 펼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눈은 다른 이를 훔쳐보거나 혹은 흘겨보고 있고, 다른 이는 자신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을 향해 깊이 침잠해있습니다. 한 쪽은 부러질 듯 이를 꽉 다물고 있고 다른 쪽은 부드러운 미소가 감돌고 있습니다.

이미 아시겠지만 다윗과 사울왕입니다. 한 시대 한 공간을 살아가지만 각자가 차지하고 있는 공간은 참으로 다릅니다. 이 드넓은 우주 공간, 내가 차지한 이 좁은 곳마저 폭력과 두려움으로 꽉 차게 할 수 있고, 한없이 좁은 이 나만의 자리를 기쁨과 평화, 사랑이 넘쳐나는 작은 샘이 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사울왕은적을 물리치고 백성이 평화로워진 데 대한 감사보다는 자신보다 공적을 더 쌓은 다윗이 임금으로 추대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한 나라의 왕이지만 백성을 아끼는 왕이 아니라, 자신의 왕위와 안녕이 더 중심인 왕입니다. 백성을 염려한다면 적을 물리칠 용기와 지혜를 지닌 다윗같은 신하가 생긴 것에 든든함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쉽사리 다윗에게 왕위가 넘어갈 수 있다는 쪽으로 움직였고 그럴 때면 마음이 너무도 산란하여 견딜 수가 없어 평화 가득한 다윗의 수금 소리를 들어야만 진정이 되곤 하였습니다. 평화가 가득한 이의 음악, 글, 말, 표정은 다른 사람을 치유해줄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마지막에는 그마저 효과가 없고 오히려 그의 질투심을 더 부추길 뿐이었습니다. 다윗은 참으로 약점이 많은 이였지요. 아내 바쎄바를 얻는 과정만 해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는 또한 하느님의 힘과 하느님의 자비를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약함이 죄로 이어질 때마다 그는 타인의 충고를 받아들이고 “제가 하느님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 그분의 손에 맡깁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그의 중심에는 자신이 아니라 왕과 백성 그리고 무엇보다 하느님이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사울이 자신을 죽이려함에 그의 손길을 피해 도망다닐 때 그를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와도 하느님이 정한 사람을 내 손으로 없앨 수 없다고 하며 그를 놓아주고는 정처없이 떠도는 삶을 택합니다. 평탄하지 않은 자신의 삶 굽이굽이 다윗은 끝없이 자신의 중심을 비워내고 하느님으로 채웠습니다. 그의 평화, 고요, 기쁨이 흘러나오는 곳은 바로 이 자리입니다. 이것이 사울에게 결핍된 단 한가지입니다.

 

중심에서 나올수록 중심에 집착할수록

약함이 시기심같은 약함이

나를 물들이지 않습니다 사람을 집어삼킵니다

중심이 텅 빌수록 중심을 채우려할수록

하느님의 색깔이 탐욕이

나를 물들이지요 사람을 목매 끌고다닙니다

 

 

 

 

 

시토회 수정의 성모 트라피스트 수녀원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4년 8월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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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음에 목말라

 

즘 세상이 혼탁하고 혼탁하여 숨쉬면 더러운 공기가 폐를 가득 채워버릴 듯 합니다. 그 혼탁함이 온몸을 돌아 내 피에 섞일 수도 있을 것 같은 느낌에 몸이 오싹해질 때조차 있습니다. 나는 그들과 달라! 나는 그렇게 살지 않아! 이렇게 자부할 수 있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들의 삶을 들여다 볼 때 자신이 비난하는 이들과 별로 다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공직자로 내세울 만한 사람이 그리도 없어 지명된 이들마다 온갖 비리와 부정으로 범벅이 되어 있건만 정작 그 당사자들은 대체 뭐가 그리 문제냐는 듯한 표정들이니, 이것이 더 한심한 일이 아닌가 합니다. 나만 그런가 세상이 다 그런걸. 그렇게 못하는 것은 능력이 없는 탓인 것을 괜히 시샘을 하고 있는 것이라 여기는 듯 한 표정마저 읽힙니다.

세상에서 남의 것 탐하지 않고, 주어진 대로 살다보니 자기 앞가림조차 할 수 없는 처지로 사는 사람들은 병신, 쪼다 소리나 듣게 되는 그런 세상이 되었음에도 가진 것 많은 이들은 이런 세상이 정상이라고, 그러니 없는 사람들은 그러려니 하라고, 괜찮은 세상이라고 떠들어댑니다.

타인의 아픔을 바라볼 여유라곤 바늘 끝만큼도 없거니와 그들이 가진 것조차 어떻게든 빼앗아야 성이 찰 모양입니다.

정말로 목이 마릅니다. 맑고 바르고 깨끗한 그래서 남을 씻어주고, 목마름을 채워주고, 남의 모습을 비추어줄 수 있는 어떤 것이 그립습니다. 타는 목마름에 온갖 그림들을 다 뒤적여 보았지만 찾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고요한 자연 풍광을 그린 그림도 이미 그 안에는 작가의 의도가 들어있기에, 타인의 모습을 비추어 줄 그런 정도의 것을 채워줄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다 접한 것이 자연을 찍은 사진이었습니다. 한 방울, 두 방울 고인 맑은 이슬들, 투명하여 남의 모습을 담을 수 있는 그 청결함! 하지만 그 속엔 얼마나 많은 먼지들과 우리가 모를 세균들이 있는지요? 그러나 세상 안의 맑음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요? 세균 하나 없는 맑은 물을 찾는다면 약국에서 증류수를 사면 간단히 해결됩니다. 하지만 증류수라는 물은 우리에게 생명의 물이 되어주지는 못합니다. 생명의 물 속엔 적당히 균도 들어있지만 그 속에 미네랄이나 온갖 것들이 포함되어 있어 우리를 살려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불완전하지만 남을 살릴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힘이 맑음이 아닐까요

 

하늘은 가난한 이들 위해 타인의 고통에 마음 무너져

땅은 온유한 이들 위해 우는 이들

그들 마음의 명랑함

땅 위 온갖 것들 그들 정신의 평온함

독차지하고 있는 이들 어찌 보지 못하는가

비웃음 소리 땅을 채워도

놓칠까 빼앗길까 당할까 자신의 것을 빼앗기는 것 외에

전전긍긍 슬퍼할 일이 도대체 없는 이들

속태우는 소리 또한 그 마음의 자물쇠

땅을 채우고 있지 열 사람이 없다네

이들이 잠시, 눈깜짝 할 사이 그 속 썩는 냄새

소유하고 있는 이 땅 누구를 먼저 질식시키는가?

어떤 이들은 영원히 소유한다네

 

 

 

 

 

시토회 수정의 성모 트라피스트 수녀원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4년 7월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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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어둠 II불타는 연꽃

 

가운 바다 위

뒤집혀 가는 배

선장도 항해사도

제일 먼저 탈출했건만

가만히 있으라 방송하고선

제일 먼저 꽁무니 뺐건만

경찰들 멀거니 지켜보고

목숨보다 귀한 그 추한 것 챙기느라

다급히 달려온 무수한 이들마저

모두들 쫓아보냈건만

세상의 한다한 이들

그 속 알 수 없는 이들

지켜보는 가운데

300명 여린 목숨 스러져 갔건만

구명조끼조차 챙기지 않고

여린 목숨 구명에

목숨 건 이들 있었네

어서 내 손 잡아라

구명조끼 너부터 입으렴, 너부터 올라가렴

그들의 마음

얼마나 뜨겁게 불타 올랐을까

얼마나 뜨겁게

그대들의 말 한 마디 행동 하나

찬 바다 위 연꽃으로 피어오르네

빙하보다 얼어붙은 한국호에

불타는 연꽃송이들 피어오르네

얼음을 뚫고

작고 여린 몽우리들 남김없이 이끌고

얼어붙은 가슴에

불타는 연꽃잎 날아내리네

이곳 저곳 남김없이

태우고 또 태워

온세상 불꽃바다

그대들 목숨으로 지핀 불꽃

이제 우리 지켜내야하리

이제 우리 스스로

불꽃이 되어야 하리

싯푸르게 일렁이는 죽음의 물결

목까지 차올라도

그 두려움조차 넘게 할

그대들 불타오르는 연꽃

우리 심장 속에 타오르네

 

 

 

 

 

시토회 수정의 성모 트라피스트 수녀원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4년 6월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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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빛과 어둠 I

 

죄어 드는 두려움이 화면 가득 넘실거립니다. 크리스티안 롤프스가 그린 “포로”라는 그림입니다. 세상의 온갖 위기 중 아마 첫째 부류에 전쟁포로가 들어있을 것입니다. 어떤 취급을 당해도 호소할 곳 없는 불안한 처지, 죽음을 당한다 해도 저쪽 세상에서는 그 누구도 알지 못한 채 끝나 버릴 수 있는 상황에 처한 인간의 모습이 너무도 리얼하게 묘사되어있습니다. 저 큰 눈 속으로 두려움의 시커먼 터널이 수십 킬로미터, 끝모르게 달리고 있을 것 같지 않습니까? 바짝 말라 뼈만 남은 몸과 광대뼈 불거진 얼굴은 굶주림으로 시달렸을 고통의 순간들이 절로 떠오르게 만듭니다. 그의 큰 눈 속 담긴 그리움은 그대로 넘쳐 흘러 홍수로 밀려올 듯 하지만 그 누구도 그의 눈을 바라보는 이는 없습니다.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살고싶지 않은 처절함을 견뎌내게 해주는 유일한 보루인 듯 합니다. 응답없는 상황, 나의 미래가 누구의 손에 달렸는지 알 수 없는 그 두려움은 그 자체로 인간을 옥죄는 괴물입니다. 쇠창살을 꽉 그러쥔 그의 손은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상대할 수 없는 그 괴물에 대한 분노를 어디에도 터트릴 길 없는 절박함으로 떨고 있는 듯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전쟁과 고문으로 이런 절박한 상황에 처해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요.

그런데 그림을 한참 보고 있자니 두 가지 점이 이상하게 다가왔습니다. 한 가지는 쇠창살의 틀이 굉장히 넓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사람의 몸과 쇠창살에 흰색이 빛처럼 느껴진다는 사실입니다. 검은 배경과 짙은 고동색의 포로의 몸 색깔로 인해 이 그림은 전체적으로 어둡고 옥죄는 느낌입니다. 그 느낌이 너무 강해 상당히 강렬한 테두리 흰색이 아예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이 흰색은 화가가 검은 배경 속에 이 포로가 묻히지 않게 하고 싶어 택했던 수단일까요? 아니면 좀 더 다른 의도가 있었을까요? 화가에게 물어보지 않고서는 정답을 내릴 수 없는 질문이지만, 작품은 보고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 재창조의 해석을 할 수는 있지요. 저에게 이 흰빛은 희망의 빛으로 보입니다. 캄캄한 어둠과 쇠창살 속에서도 결코 스러지지 않는 빛 오히려 어둠 속이기에 더욱 선명한 빛 그러나 이 빛은 아직 그의 두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빛이 그의 몸을 감싸고 있지만 아직 그의 속은 캄캄함 뿐입니다. 심지어 쇠창살도 그가 빠져나가기에 충분한 크기입니다. 여기서 이 감옥은 포로의 감옥이 아니라 이제 우리의 감옥, 이 시대의 감옥이 될 수 있습니다. 세월호 사건으로 아직 충격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침몰한 우리나라, 그 자체가 감옥이 아닐까요.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탄식해마지 않는 돈과 발전에 대한 맹신은 이제 우리를 꽁꽁 묶는 쇠창살이 되고있습니다. 인간이 유한하기에 인간이 이룰 수 있는 발전도 돈도 유한한 법. 그런데 마치 발전 위에 발전을 쌓으면 어디까지라도 발전할 수 있는 듯 믿고 있는 우리 현대인들의 어리석음이 세월호사건의 처음부터 끝까지 배어들어 있습니다. 이 어둠의 검은 면 위를 감싸고 있는 이 빛을 볼 수 있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요? 이 그림의 포로처럼 자신이 충분히 빠져나갈 수 있는 쇠창살 속에서 망연자실 저 먼 곳만 바라보고 있지는 않는지요? 이 엄청난 희생을 헛되게 한다면 우리는 다시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될까요? 악은 창조를 부르지 않고 파괴를 부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어느 누구도 나는 그렇지 않다고 가슴 펼 수는 없습니다. 누구나 이 사회를 만드는데 한몫을 했기에 누구나 책임감을 느끼고 함께 손잡고 나설 때만 이 사회의 어둠 위에 떠오른 참빛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이 빛이 떠오릅니다. 외면하지 말고 직시할 수 있는 용기를 기도하고 또 기도합니다.

 

 

 

 

 

시토회 수정의 성모 트라피스트 수녀원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4년 5월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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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생명 죽음의 공포

 

라 초상화입니다. 이 그림을 처음 대했을 때 숨이 턱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고 하면 아마도 이해되지 않을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한 십년 전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서 이집트 미라들만 전시된 방을 구경한 적이 있었습니다. 한 방 가득 미라들만! 그런 방이 몇 개나 되었던지? 이어진 여러 개의 방들 속 그 수많은 미라들, 으스스 썰렁했던 것은 죽은 몸들로 꽉 차 있는 느낌도 물론 있었겠지만, 영원히 살겠노라 온갖 처리 다해서 뉘여 놓았건만 바다 건너 이국까지 끌려와서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 앞에 노출될 줄 죽은 이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으리라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곳 루브르만이 아니라 영국 국립박물관에는 여기 못지않게 더 많은 이들을 고이 모셔 놓았다(?)고 하네요. 이집트 박물관은 물론, 이 그림을 소장하고 있는 덴마크 국립박물관 그리고 스웨덴 국립 박물관에도 미라들이 있다니 대체 얼마나 많은 미라들이 있을지? 아마 조사해보면 이보다 더 많이 있을 것 같습니다. 루브르에 누워있는 혹은 가끔 세워놓은 수많은 미라들은 거의 해골에 가까운 모습이라 키 외에는 차이점을 찾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 선명하게 떠오릅니다. 좀 망측한 표현이긴 하지만 이것 저것 구별하기 어려운 바짝 마른 명태, 더도 덜도 아닌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처음 이 미라 여인의 초상을 보았을 때(보통 미라와 함께 초상화도 넣었다고 한다.) 그 바짝 마른 모습과는 도무지 연결시킬 수가 없었습니다. 만화 속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저 큰 눈에서 금방이라도 눈물이 뚝뚝 흘러내릴 것 같습니다. 꼭 다문 입 때문에 눈에서 말하는 것이 더 강하게 전달되어 오는 것 같습니다. 그녀가 갈망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아니 그녀를 그린 화가는 무엇을 표현하고 싶었을까요? 영원히 살기를 갈망하고 죽은 몸마저 보존했던 이들의 가슴에 타올랐던 불꽃, 영원한 삶에 대한 열망은 세대를 불문하고 누구의 가슴에나 타오르는 불일 것입니다. 누구나 알고있는 불로초 찾는 임금, 진시황은 기원 전 259년경에 태어난 한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묘하게도 이 그림 또한 기원 전2-3세기 경 그려졌다고 하니 비슷한 시기 이집트와 중국에서 함께 타올랐던 그 불은 지금 우리 각자 안에도 타오르고 있을 것입니다. 과학이 발달하여 신도 별 것 아니라 큰소리치는 지금까지도 진시황의 불로초가 어떤 것이냐에 대해 연구하는 이들이 있지 않습니까. 미라와 불로초는 어쩌면 영원한 삶에 대한 갈망보다 죽음에 대한 극도의 공포를 표현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죽음에 대한 극도의 공포와 삶에 대한 집착만큼 영원한 생명과 거리가 먼 것도 없을 것입니다. 방부제로 썩어 없어지는 것을 영원히 막고, 불로장생하게 해줄 약초를 구한다 한들, 지금 이대로 영원히 사는 것이 축복일까요?
이 여인의 눈빛에는 표현하기 힘든 두려움이 깃들어 있습니다. 이것은 여인의 눈빛일 수도, 화가의 마음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 둘 모두의 것, 우리 모두의 것일 수도 있습니다. 죽음이 두렵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긴낫을 휘두르고, 검은 두건 속에 자신을 감추면서도 교묘히 자신을 슬쩍 보여주는 검은 죽음의 사신 앞에 오싹함으로 떨고 있는 우리에게 한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생명을 얻고자 하는 이는 그것을 잃고, 나를 위해 생명을 버리는 이는 그것을 얻게 될 것이다.” 영원한 생명은 이대로 나만 복되게, 온갖 것 소유하며 길게길게 사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분의 생명, 자신을 온전히 내놓는 생명에 참여하는 것임을 믿는 이의 행복, 배짱이 여러분 모두와 함께 하기를!

 

 

 

 

시토회 수정의 성모 트라피스트 수녀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