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7년 3월의 말씀

3월 시선의 바깥

공동체와 카리스마,

성령

“아

아포토시스(Apoptosis), 세포 스스로 죽는다는 의미를 지닌 말입니다. 인간은 하나의 세포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100조 개에 이르는 수많은 세포로 이루어져 있고, 이 세포들이 일정한 시기가 되면 죽어 새로운 세포들에게 자리를 내줌으로써, 세포 하나에게는 죽음이지만 수많은 세포로 이루어진 생명체에는 역설적으로 생명을 유지하는 더 좋은 조건이 됩니다. 그런데 세포가 때가 다되어 제기능을 다 하지 못하면서도 계속해서 자리를 차지하여 새 세포들이 기능을 하지 못할 때 이것을 암세포라 합니다. 이렇게 세포가 스스로 죽지 않으면 인간 자신의 생명이 위태롭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의 죽음이 있어야 다른 생명이 탄생하게 된다고 바꾸어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시선의 바깥”이라는 묘한 제목이 붙은 이 그림, 죽어가는 배추의 몸에서 새로운 생명이 탄생했습니다. 호박꽃과 이미 열매까지 열리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새생명, 새 세상이 열리고 있습니다. 한 수도회의 카리스마 역시 이 역동적 흐름 속에 있습니다. 시토회라는 수도회의 카리스마를 거꾸로 짚어나가면, 시토회➡클루니(베네딕도 수도회)➡베네딕도➡초기 사막수도승으로로 이어집니다. 화살표 사이에는 물론 죽음과 새생명의 탄생이 바다 파도처럼 끊어짐이 없이 서로 겹치며 이어집니다. 화살표를 거꾸로 거슬러 초기 수도생활로 가보면, 예수 그리스도 사후 맹렬히 퍼져가던 그리스도교와 그 맹렬함을 따라잡기라도 하듯 로마의 탄압이 무섭게 내리쳤고, 수많은 이들이 순교를 하며 피로 맺은 열매인 믿음을 세대에서 세대로 전해주었습니다. 그런데 313년 그리스도교가 로마황제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인정을 받게 되고 더 나아가 국교가 되면서 박해받는 교회에서 특혜받는 교회로 바뀌게 되자, 교회는 세상의 물결이 넘실넘실 넘어와 그리스도교 정신의 핵심만을 살아가던 박해받던 시기의 맑음과 뜨거움이 혼탁함과 미지근함으로 바뀌어감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됩니다. 그러자 그 뜨거움에 목마른 이들이 사막에서 시작되고 있던 수도생활로 몰려갑니다. 그러니 수도생활의 정신에는 순교의 정신이 빼도 박도 못하게 강하게 각인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앞 세대는 순교로 죽어갔지만 그 정신은 수도생활로 이어지면서 새로운 형태의 삶이 탄생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막에서의 은수생활이 활짝 꽃을 피워 절정에 이를 무렵, 공동체 생활을 하는 수도회인 아우구스티노와 바실리오, 파코미오 수도생활이 생겨납니다. 이 은수생활과 공동체생활의 두 흐름은 마치 두 개의 강물처럼 서로 섞임이 없이 도도히 흐르다가 5세기 베네딕도 성인에 이르러 하나의 흐름으로 합쳐져 큰강을 이루게 됩니다. 즉 성인은 자신이 쓴 수도규칙 속에서 전해받은 은수와 공동생활이라는 양립할 수 없을 것 같은 이 두 전통을 받아들입니다. 침묵과 공동생활, 순명과 자유, 절제와 나눔, 노동과 기도생활 등이 하나의 생활 형태 안에 공존함으로써 예수의 정신과 가치를 한 울타리 안에 형제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균형잡힌 수도생활을 세웠고, 이 생활과 수도규칙은 이후 서방 수도생활의 근간이 되고 베네딕도는 수도승, 서양의 아버지라고 불립니다. 역사의 복잡함 안에서 베네딕도회는 사라지고, 부침을 거듭하던 수도생활은 10세기 클루니에 이르러 제후, 귀족들로부터의 끈을 끊고 새로운 그리스도교적 자유를 토대로 힘차게 발전합니다. 고대로마에서 중세유럽에로의 이전에서 피할 수 없었던 봉건제도의 틀 안에서 그리스도교는 봉건의 옷을 입고 있을 수밖에 없었는데, 11세기 시토회는 수도회로부터 이 옷을 벗겨내고 베네딕도성인이 세운 원래 모습의 수도생활을 다시 회복합니다. 母공동체가 세운 子수도원으로부터 세금을 받고, 법제정은 오직 모공동체에만 귀속된 당시의 틀을 과감히 깨고 오직 사랑의 법으로만 통치하는 새로운 카리스마가 탄생하고, 가난과 사랑이라는 그 시대의 언어를 앞 세대의 성취 위에 세워갑니다. 클루니 개혁이 없는 시토가 있을 수 없고, 베네딕도 없이 클루니는 존재할 수도 없으며, 베네딕도는 거의 온전히 사막 은수생활과 공동체생활의 전통으로부터 시작합니다. 하나의 죽음, 하나의 탄생 그 신비의 연속!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7년 2월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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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의 배아-영원을 향하여

수정창립 30주년을 향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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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어떤 예술, 문학, 기술, 심지어 종교도 저 혼자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은 없습니다. 한 인간 개인도 그러합니다. 한 사람이 이 세상에 첫 울음을 터트릴 때 그 엄마, 아빠 그리고 그 엄마 아빠의 엄마 아빠 그리고…그리고 수도 없이 올라간 그 세대들의 흐름 속에 그 아기가 태어난 것입니다. 한 아이의 성격과 인간됨에는 그 수많은 세대의 면면한 흐름이 녹아들어있습니다. 그러나 또한 그 흐름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바로 그 아이만의 독특함이 있습니다. 세세대대로 이어진 흐름과 그 사람만의 독특함이 잘 어우러져 빚어진 한 사람의 삶은 자신과 주위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 시대 더 나아가 시대를 넘어서까지 한 흐름을 다시 형성할 수도 있습니다. 수많은 작은 흐름들을 형성하는 풍요롭고 큰 흐름을….

이처럼 수도생활도 그러합니다. 수도생활이 가톨릭의 아주 독특한 면 중의 하나이지만, 당연히 가톨릭의 전유물은 아닙니다. 수도생활은 그리스도교가 생기기 전 이미 여러 가지 형태로 존재하고 있었고, 그리스도교의 수도생활은 유일하고 독특한 면을 지니고 있지만, 이미 있었던 여러 삶의 형태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고 받아들입니다. 즉 수도생활은 인간 존재의 심연에 어떤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인간의 보편적인 한 현상이라 볼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인간 각자는 어떤 의미에서 모두 수도자이다.”라고 했는데 이는 참으로 지당한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세상의 수도생활이라 불릴 수 있는 모든 것이 지닌 공통점을 한 번 살펴보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 아닐 것입니다. 세 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첫째는 세상으로부터의 분리로, 수도생활을 지향하는 모든 사람은 현재의 이 세상과 일시적이든 영구적이든 일종의 분리를 추구합니다. 분리됨으로써 이 세상이 지향하는 가치들을 포기하고 새로운 가치, 참으로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가치로 새롭게 거듭나기에 온몸, 온생을 바칩니다. 둘째는 금욕수행으로 독신, 가난, 단식, 절제 등 내적 깨어있음을 지향하는 요소들 또한 공통적으로 모든 수도생활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셋째는 신비적 갈망으로 절대자에 대한 깊은 의식과 이 절대자와의 통교에 대한 갈망. 이것이 수도승 생활의 가장 깊은 토대이며 이것은 위의 두 가지 요소를 움직이는 힘입니다.

여기서 1월 소식지에서 나눴던 모든 것이 나오는 사랑의 근원, 모태와 연결이 됩니다. 신비적 갈망은 바로 이곳을 향합니다. 인간 존재와 모든 수도공동체들은 여기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근원을 향한 갈망, 목마름은 어느 세대에도 끊어지는 일 없이 세상이라는 강의 밑바닥을 흘러왔습니다. 세상의 흐름과 세상의 가치에 매몰되어, 존재의 출발지와 목적지를 잊어버린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나 세상과의 분리, 금욕, 신비적 갈망이 자신 안에 불꽃으로 타오르고 있음을 적든 크든 느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 존재의 심연에는 유일한 사랑의 근원을 향한 상승의 움직임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를 잡아당겨내려 물처럼 바닥으로 스며들게 하는 힘도 작용합니다. 그 힘의 엄청남은 마치 사랑의 모태를 향한 힘을 눌러 찌그러트릴 것 같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 힘이 아무리 막강할지라도 존재의 심연에 심어진 배아만은 결코 건드리지 못합니다. 사람으로 생겨먹은 존재 안에서 이것을 없애버릴 수 있는 존재는 없습니다. 심지어 하느님조차도…. 그 배아는 역사의 흐름 안에서 적당한 토양, 수분, 햇빛을 만나면 발아하여 수많은 이들이 그 근원을 향해 갈 수 있는 그런 카리스마를 형성합니다. 한 죽음이 다른 생명을 낳는 그 흐름 안에서 앞세대가 쌓은 영양분을 먹고, 앞세대를 이어받으면서도 앞세대를 넘어 또 하나의 새로운 길을 여는 카리스마가 수많은 이를 불러모읍니다. 그림 속 터진 홍시처럼 감은 죽고 새싹이 돋아납니다.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7년 1월의 말씀

공동체의 근원 - 사랑의 품

공동체의 근원 – 사랑의 품

공동체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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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배고픈데 누군가 내 손에 쥐어준 따뜻한 밥 한 그릇 같은 그림입니다. 자꾸 보고 싶고, 한 명 한 명의 절묘한 표정을 읽고 있노라면 나도 저 장면 속에 들어가고 싶어집니다. 명절에 오랜만에 만난 사촌, 육촌들이 키재기를 하는데, 어른들이 더 신이 났습니다. 아이의 관심, 꿈이 어른의 관심이 되는 사랑과 꿈이 가득한 그림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사람, 모든 가정, 모든 공동체는 사랑이라는 모태, 근원에서 나왔습니다. 불행의 바닥을 치는, 사랑이라는 말 따위 사치라고 외칠 그런 아픈 출생도 사랑에서 비롯되었음을 믿는 이들이 많을수록 세상은 넉넉하고 사람 살만한 곳이 될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모태, 근원에서 나오지 않은 것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이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이, 한 사람도 남김이 없이 모든 이 안에서 사랑이 식어버린다면 아마 우주의 모든 별들은 열과 빛을 잃고 우주 전체가 싸늘한 암흑으로 변해버릴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여전히 신비요, 베일에 싸인 우주도 태어난 곳이 있음을 현대 과학은 미약하게나마 감지하고 있습니다. 우주가 태어난 곳이 있다면 그 우주의 꽃, 정점인 인간이 태어난 곳이 있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 아니겠는지요. 한 명 한 명의 인간은 그저 우연히 어쩌다 태어난 목숨이 아니라, 사랑의 근원에서 영원으로부터 작정하신 그런 열렬함에서 세상에 존재합니다. 엄마, 아빠가 자신의 아기를 열렬히 원하는 그런 마음과 조금은 닮은 구석이 있지 않을까요. 우리가 존재하기를 원하는 그런 사랑의 근원이 있어 우리는 그곳으로부터 엄마 아빠를 통해 이 세상으로 오게 된 것이지요. 한 공동체 역시 인간 개인과 마찬가지로 어떤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영원한 하느님 사랑의 계획안에서 태어납니다. 역사를 통해 공동체의 탄생과 성장, 그 역할을 공부해보면 이 사실을 손에 잡힐 듯 분명히 느낄 수 있습니다.

올해 10월19일에 수정 공동체 탄생 30주년을 맞게 됩니다. 10월까지 열 달 동안 공동체의 탄생과 성장이라는 흐름을 여러 주제 아래 함께 나누어 볼까 합니다. 공동체와 가정 그리고 사회 단체들의 삶은 여러 면에서 닮은 점이 많습니다. 봉쇄공동체 생활은 세상 어떤 곳보다 더 밀도 깊은 인간관계가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면이 있으므로 저희 삶의 여정이 다른 많은 분들과도 공감할 수 있는 교집합이 있으리라 믿습니다. 이혼에 직면한 분들과 대화를 나누어 보면, “결혼도 안한 수녀님이 저희 생활을 어떻게 그렇게 잘 아세요?”라는 질문들을 하시는데, 그만큼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곳에는 각 생활형태에 따라 다른 면도 많지만 공통점이 더 많기 때문일 것입니다.

각 지역, 각 나라에 퍼져있는 여러 공동체들을 품고 있는 하나의 카리스마를 살아가는 수도회 역시 이 사랑의 품에서 나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수도회들은 오히려 사랑의 품 안의 어떤 요소를 더 선명하게 드러낼 줄 수 있고 그것이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매력이 됩니다. 한 수도회, 한 공동체, 한 가정, 한 개인이 자신이 태어난 곳에 대한 분명한 인식과 따뜻한 기억, 태어남에 대한 분명한 사명의식이 있을 때 그 삶은 하나의 빛이 될 수 있습니다. 그 사랑의 품을 닮아 사람을 품는 품이 넓습니다.

그리고 태어난 곳을 안다는 것은 돌아가야 할 곳, 최종 목적지를 안다는 것으로 연결됩니다. 그 사랑의 품, 삼위일체 하느님, 하느님의 친교, 하느님의 비움, 하느님의 가족이심 안으로 우리 삶이 향하고 있음을 알 때 우리가 돌아가야 할 곳에 어울리는 맑음과 단순함을 지향하며, 세상 고귀한 것들을 포기하더라도 그 모습을 얻으려 할 것입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 한 개인, 공동체들은 바로 자신의 근원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사랑의 품에서 나와 사랑의 품으로 돌아감을 아는 사람, 공동체 세상의 빛입니다.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6년 12월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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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구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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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 김이 오르는 양푼이 한복판에 있고 그 주위로 일곱 사람이 그려져 있는 그림입니다만, 시장 전체의 시끌벅적한 느낌이 화면 가득 배어나옵니다. 1980년대만 하더라도 굳이 시골까지 가지 않더라도 큰 시장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었습니다. 왼쪽에서 두 번째 할머니는 가져온 물건을 다 팔았는지 커다란 바구니 속이 텅 비었고, 국수 한 그릇을 다 먹어 손에 들고있는 그릇은 이미 비어있습니다. 가져온 물건을 다 팔아 맘이 넉넉한지 통 자리를 뜰 생각이 없고, 국수 말아주는 할머니와 두런두런 이야기가 한참입니다. 국수 마는 할머니는 “그려 그려 인생 그런 것이여”라는 표정으로 십년지기라도 되는 양 이야기 삼매경에 빠져있습니다. 입고 있는 옷들이 비슷하듯 서로 나누는 인생살이도 아마 비슷할 것이고, 이야기 구절구절마다 자신의 이야기인 듯 고개가 끄덕여질 것 같은 분위기가 전해져옵니다. 오른쪽에 두 사람은 국수 그릇까지 삼킬 듯 먹는 데만 열중하는 것 같지만 후루룩 국물까지 다 마시고 나면 슬쩍 이야기 속으로 끼어들 것 같습니다. 뒤편에 쪼그리고 앉아 담배를 태우는 할아버지와 등에는 짐을 진 채로 걱정이라도 있는 듯 저 먼곳을 바라보는 할머니는 부부사이인 듯한데, 할아버지가 담배 한 대를 다 태우기를 기다려 곧 일어설 것 같은 자세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사소한 것들이 어울려 그려내는 시장의 한 모퉁이 풍경, 가난하고 힘겨운 노동으로 매일을 보내는 고단한 백성들의 모습 안에 볼 수 있는 사람다움과 인간에 대한 자연스런 관심이 한복판 양푼이 속 김처럼 따뜻함을 피워내는 그림입니다. 가진 것 많고 자랑할 것 많고 빼앗길 것 많아 지키기에 급급한 이들 사이에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는 풍경입니다. 가난함이 곧 인간답지 못하고 추하고 저속한 것이라 사기를 치고 사람을 다치게 하더라도 내려가고 싶지 않은 곳으로만 보는 이들의 마음 속에는 결코 깃들 수 없는 정경입니다.

심지어 가난함의 특권이라고까지 표현한다면 가난한 이들에 대한 모독이 될까요? 지금의 시대에선 그럴 것입니다. 하지만 이천 년 전 예수님은 아예 공개적으로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니”라고 선포하셨습니다. 그 하느님 나라는 분명 이 지상의 나라는 아니지만, 이미 이 지상에서도 그 맛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 눈앞에 있는 그림처럼….

이 그림을 처음으로 만났을 때 아기 예수님이 누워있는 구유의 영상이 떠올랐습니다. 이만큼 아름다운 구유도 찾기 어렵지 않을까요! 이천 년 전에는 목동들이 마굿간으로 찾아갔지만, 이제는 아기예수님이 먼저 이들을 찾아와 이분들의 품에 안기는 상상을 해봅니다. 서로 얼마나 어울리는지! 얼마나 닮았는지! 얼마나 잘 통하는지! 가난한 마음, 가난한 옷, 가난한 음식, 가난한 자리. 이런 곳에서 가장 큰 관심은 사람입니다. 너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 되고, 작은 것에도 서로 관심을 가지니 이렇게 따뜻한 풍경이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저 풍경 속에 나 잘난 사람 한 명만 있어도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져버리겠지요. 저 구유 속에 함께 들어가고 싶다면 우리도 작고 가난하고 낮아짐을 싫어하지 않고, 그렇게 되기를 진정으로 바라는 마음, 살같은 마음으로 변모되어야 합니다. 저이들처럼 타인에게 어떤 울타리도 없이 처음 만나도 가족들의 온갖 근심거리까지 툭 털어놓을 수 있는 열린 마음이어야 합니다. 우리 마음도 아기 예수님 담는 구유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도 아기예수님을 닮은 가난한 사람으로 다시 태어날 것입니다.

작고 여리게 작고 여려서

밤하늘 별빛보다 여리게 작고작은 이들만

오신 아기 알아채는 아기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6년 11월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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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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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아, 하느님을 찬미하여라.”라고 노래 부르고 싶게 만드는 그림입니다. 너어-허어허 너어-허어-허 너화 넘자 너어-허 만가 소리가 구불구불 배어나옵니다. 삭막한 겨울풍경, 푸른빛을 낼만한 것이라곤 소나무밖에 없는데 그 소나무마저 거의 검푸른 색입니다. 가을걷이 끝난 비탈 밭에는 마른 줄기 하나 남지 않았고, 바싹 마른 풀잎과 대지, 삭막한 바람마저도 멎어버린 초겨울의 풍경이 이상하게도 스산하질 않습니다.

구불거리는 밭길, 활처럼 휜 바닷가, 맨 앞 엄마 젖무덤 같은 무덤 두 개, 작디 작아도 동영상처럼 움직일 것 같은 상여행렬. 굽이굽이 돌아가 떠나가는 마지막 길을 이 모든 것들이 함께 배웅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니 모든 것이 더불어 마지막 길 위에 있는 것 같습니다. 마지막 길도 함께라면 덜 적막하겠지요. 마지막 길이 철두철미 고립무원, 소외, 절대적 분리가 아님을 아는 이는 죽음도 새롭게 볼 수 있습니다. 이 그림 속에도 역시 죽음으로 인한 애잔한 슬픔이 저 밭길처럼 구불구불 흐릅니다. 하지만 슬픔과 설움, 고통이 이 그림을 짓누르고 있지는 않습니다. 마지막 길인 줄 알면서도 저 길따라 함께 가보고 싶은 생각마저 들게 합니다. 봄여름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되면 산천초목이 저렇게 삭아버리듯 우리 몸도 사그라드는 것이 자연의 한 부분임을 그 단순한 진리가 맹렬한 두려움으로 휘감기는 일없이 자연처럼 단순하게 당연하게 다가옵니다.

묘하게도 이 그림 속에는 죽음의 허무가 아니라 그리움이 출렁거립니다. 고요함과 움직임이 서로 부딪치는 일 없이 함께 너울거립니다. 옅은 황금빛으로 조용히 일렁거리는 바다는 마치 이 세상을 넘어 다른 세상을 비춰주고 있는 듯합니다. 번쩍이거나 짙지 않되 다른 빛이 함부로 넘어갈 수 없으면서도 차츰 차츰 갈색 대지를 물들일 것 같습니다. 하늘나라, 천국, 저 세상, 저승 등으로 묘사하는 죽음 너머 세상은 결코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무시하고 잊고 영원히 살기라도 할 것 같이 맹렬하게 이 지상의 부와 명예를 쌓으며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 우리 앞에 저 고요히 빛나는 바다는 말을 걸어옵니다. 이곳이 세상의 끝은 아니라고….

그림 맨앞에 있는 엄마젖 같은 무덤은 죽음이 곧 생명으로 이어짐을 말없이 한구석에서 이야기해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죽음이, 죽음의 문화가, 죽음의 정신이 승리하고 있는 세상, 젊다기보다 어린 가수들의 비디오에는 폭력, 살인, 퇴폐적인 성이 찬양되고 어린 학생들은 그것을 보고 정신이 나가도록 매료됩니다.

공공연히 죽음의 정신을 숭상하는 이 시대에 참된 죽음의 의미가 새롭게 인식될 필요성이 절박하게 느껴집니다. 죽음과 죽음을 부르는 폭력은 결코 그 자체로 추구되어서는 안되며 그것은 인간성을 파괴합니다. 진짜 죽음은 그렇게 간단하게 찬양될 것이 아님은 조금만 눈돌리면 우리 주위에도 알아볼 표징들은 얼마든지 널려있습니다. 가족의 죽음으로 삶이 바닥에 이른 이들, 감기처럼 흔한 암의 불확실함 앞에 떠는 사람들, 사업 몰락으로 가정이 파탄나고 시설로 보내진 아이들. 한 학교에서 300명이 넘는 아이들이 한꺼번에 사라지고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어버린 세월호 부모들. 이런 가슴저리는 표징도 거짓 죽음의 문화에 젖어든 이들의 굳은 가슴에 실금조차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죽음의 문화 한복판에도 아기 예수님은 태어나십니다. 그 속에서 성장하고 기쁜 소식 전하고 수난받고 죽음을 당하시고 부활하십니다. 그분만이 인간의 참생명이니까요

 

님의 탄생 우리의 생명

님의 죽음 우리의 생명

무엇을 두려워하리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6년 10월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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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의 DNA

람의 시선을 끌어당기는 멋진 비상, 멋진 깃털! 이것만으로도 이 그림은 사람의 마음을 어느 정도 채워주는 매력을 품고 있습니다만, 이것만이라면 사진으로도 충분히 그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꿩에 대해 어느 정도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이 그림이 그저 멋진 비상만을 그린 것은 아님을 알아차릴 것입니다. 물론 예술이란 것이 일단 작가의 손을 떠나면 보는 이 각자의 주관성에 많은 것을 의존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저 작품 하나 나오기까지 작가가 거쳤을 사고의 궤적, 느낌, 심지어 삶의 행적까지를 함께 할 때 보는 이에게도 창조적 영감이 작용하여 삶의 바닥까지 영향을 미치는 어떤 것을 받을 수 있게 됩니다. 이런 것을 무시하고 자기 식대로만 본다면 주관적 왜곡을 벗어나기가 쉽지 않고 삶의 바닥에까지 영향을 받는 그런 일은 잘 일어나지 않습니다.
날개가 퇴화되고 몸집만 커져 사냥꾼들이 노리는 1호가 되어버렸음에도 깃털만은 제대로 화려해서 절로 탄성이 나오게 만듭니다. 산 바로 아래 자리잡은 수녀원에서는 가끔 꿩들이 나타나 먹이를 찾고 운이 좋으면 꺼벙이들을 데리고 산책하는 모습마저 볼 행운도 누립니다. 산행을 하다보면 꿔거꿩하는 요란한 소리를 터트리며 비상하는 멋진 모습을 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말이 비상이지 얼마 못가 머리가 땅을 향하는 모습은 화려한 깃털에 대비되어 더 짠한 마음이 들곤 했었습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물음이 생겨나곤 했습니다. 꿩이란 존재는 저 화려한 모습만으로 충분한가, 사냥꾼에게 쉽게 표적이 될 화려함은 왜 퇴화되지 않았을까, 불어난 몸집에도 비상을 향한 본능만은 사라지지 않고 남은 이유는 뭘까? 물론 어떤 것에도 정답은 없습니다.
이 물음들이 모두 생존과 관련되어 나선형으로 서로 얽히며 올라가고 내려가는 모습을 그려봅니다. 태생부터 생김생김이 화려한 이들, 자신의 선택과는 상관없는 일이지만, 자의든 타의든 뭇시선 속에 살아가는 이들. 혹은 태생부터 신체 어딘가에 흠을 지니고 세상에 나온 이들. 이들 각자에게 비상이란 어떤 것일까요? 일어서지도 못하는 사람에게는 더더욱 비상이란 무슨 의미를 지닐까요? 비상을 하지 않고서도 한 존재로 살아감이 가능할까요? 굳이 답을 얻으려하기보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물음들 앞에 가만히 머물러봅니다.
화려한 외모에, 인기절정인 연예인의 삶이 비상의 최고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이 시대에는 참으로 많을 듯 합니다. 그래서 이들은 시대의 우상이요, 말 그대로 아이돌이라고들 합니다. 하지만 마약 논란에 휩쓸리는 이들이 대부분 연예인인 것을 보면 사태가 그리 단순하지 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도시의 한복판에서 도시의 화려함 가장 바깥에 있는 버림받은 이들, 그리고 그들과 함께 버림받음을 스스로 선택한 이들, 촉망받는 의사의 길을 포기하고 아프리카인들을 위해 온생을 바치는 이들. 이들 안에는 비상의 열망이 없는 것일까요? 오히려 그 어떤 화려한 삶을 사는 이들보다 더 크게 타오르고 있지는 않을까요? 화려한 공작이든 땅위를 기는 뱀이든 아예 땅속에서만 살아가는 두더지이든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든 이 비상의 DNA가 없는 존재는 없어 모든 생명체는 무기물까지도 함께 어우러지는 생명의 잔치를 향해 비상의 얽힌 나선형을 그려가고 있는 야무진 꿈을 꾸는 10월입니다.

날자 곧 하강의
밭은 상승

무거운 몸
화려한 깃털보다
더 짙은
비상의 DNA

꿔겅 꿔겅 꿔거꿩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6년 9월의 말씀

13_불이_125x111cm

불 이

(不 異)

시 주변에 서로 참 달라 보이는 두 사람이 물고 뜯을 만큼 싸우는 경우가 있는지요? 결코 서로를 용납할 수 없다는 듯, 상대방은 비리의 온상인 듯 서로를 향해 날을 세우는 그런 경우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시간을 두고 두 사람을 한 번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인생의 큰 공부를 할 좋은 경우이리라 생각됩니다. 사실 이런 경우는 정치나 경제권의 유명인들 사이에는 우리가 심심할 새를 주지 않고 일어나 지속적으로 지면을 채우는 일들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쉽게 하는 말로 싸움은 일방적으로 한 쪽의 잘못만으로는 생겨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두 사람이 똑같다는 것이지요. 싸움에는 분명 공격성, 이권개입, 열등감 이 세 가지 면이 복합적으로 얽혀있습니다. 그중 한 가지만 빠져도 마지막까지 치닿는 싸움으로 가지는 않을 수 있습니다. 탐욕으로 인해 싸움에 말려들었다가도 그 어리석음을 깨닫고 자신을 되찾을 수도 있습니다. 자존심을 상하게 하고서도 뻔뻔스럽게 자기 옳음을 주장하는 사람을 만나면 자제력이 있는 사람도 싸움에 말릴 수도 있습니다.

부모의 사랑을 골고루 받으며 복스럽게 자라는 아기가 화가 나면 엄마 아빠마저 물어뜯는 일이 있는데, 우리 안에는 태생적으로 공격성이 잠재하고 있어 어떤 기회가 되면 머리를 내밀곤 합니다. 손에 쥔 것은 결코 놓치지 않으면서 더 좋은 것을 보면 얼른 낚아채는 아기의 탐심은 나이 50-60이 되어도 우리 안에 여전히 살아있습니다. 열등감 없는 사람을 찾아 지구 한 바퀴를 돌고 역사의 바닥까지 다 헤집어도 소용없는 일이란 것은 누구나 잘알고 있지만, 열등감이 건드려질 때 그것을 알아채는 것은 자기닦음을 하지 않고서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인간의 바닥이 이러하다 보니, 돈을 쌓고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것만이 목적인 세상에서 일단 싸움이 붙으면 저 그림 속 북어대가리 같은 상황이 벌어집니다. 상대의 비리나 잘못을 과장시켜 폭로시키는 것은 물론, 없는 일마저 만들어내어 상대를 사장시켜버리려 합니다. 몸이 느끼는 연민, 측은지심 이런 것은 저 먼나라 이야기일 뿐이지요.

사실 끝장나는 싸움에서 승자란 없습니다. 나의 비리는 하나도 들키지 않고 상대방만을 아주 웃기는 멍텅구리 쪼다로 만들었다 해도, 그 과정에서 험악해진 마음보는 지옥을 방불케 합니다. 자기 마음 속에 자신이 갇혀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어버리지요. 그러면 이 이야기는 나와는 상관없는 저들의 것일 뿐일까요? 사실 싸움이 일어나는 곳이면 어디든 이런 현상은 일어납니다. 내 안의 공격성을 보는 아픈 자기인식, 탐심을 내려놓는 자기수련, 열등감을 인정하는 가난함이 없다면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보편적인 현상입니다. “복되다 온유한 이들, 그들은 땅을 차지하리라.”

치켜뜬 눈

앙다문 입으로

물고뜯으며

바라보는 저놈 저놈

저 웃기는 놈

저 미친 놈

저 개떡같은 놈

바로 자신의 모습인 줄

모르는 것은

당사자들뿐

그들에게

몸이 없고

머리만 남은 것은

당연하고 당연한 일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6년 8월의 말씀

2016.08.성철스님

자기 전문가

인간 전문가

먹고 잠자고 세수하고 대화하고 일하고 화장실 가는 일상의 일들. 수도원이란 곳은 사람이 끊임없이 들고 날고 그러면서 온갖 역동이 일어나는 곳인데, 수도원을 떠나는 이들은 대체로 위의 것들에 문제들이 있는 듯합니다. 혹시 수도원이란 곳에서 가장 귀한 기도 시간에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귀한 것은 대체로 누구나 귀하게 여기는 법이라 그다지 심각한 문제가 생기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수도원에 입회할 때면 1년 정도 지나면 성인, 성녀가 되는 줄 알고 거룩한 1m짜리 얼굴을 하고 다니는 우스꽝스런 시기도 있어, 그런 시간들을 통과하며 수도 연륜이 깊어질수록 일상의 귀함에 눈을 뜨게 됩니다. 일상에 푹 젖음이 없이,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대면할 수 없고, 자신을 모르면 이웃도 하느님도 알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일상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가르쳐주는 위대한 스승입니다. 일상의 사소함, 비천함, 낮추어짐, 잊혀짐에서 처음부터 자유로운 대영혼(?)은 없습니다. 김 호석 화백은 이런 일상의 한 순간, 한 점보다 짧은 순간을 기가 막히게 포착하였습니다. 세수하는 성철스님입니다. 특별할 것도 기이할 것도 없는 매일 아침의 세수하는 장면을 독수리의 눈으로 포착하였습니다. 세숫대야에 비친 얼굴, 그것은 성철 스님의 얼굴이자 화백의 얼굴이며, 보고있는 저 자신과 이 그림과 글을 보게 될 모든 이들의 얼굴일 수도 있습니다. 일상이 비춰주는 나의 얼굴, 그 앞에서 얼굴 돌리지 않고, 세숫대야 속 들여다보듯 그렇게 자신을 볼 수 있는 사람은 복됩니다. 자기혐오나 자기도취에 빠짐이 없이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만나는 일! 그 일 하나 때문에 수도승은 일생을 바칩니다.

자기전문가, 인간전문가, 세상전문가! 세상의 어떤 매력적인 일도 다 포기하고 오직 이 일에만 투신하겠노라 삶을 건 이들이 있습니다. 온갖 전문가들로 가득한 지금의 세상 안에 자기자신 전문가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어떤 이는 심리학을 하는 분들을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심리는 인간존재의 한 부분일 따름입니다(심리학이 현대인들에게 끼친 공헌을 충분히 인정하더라도…)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하신 성철 스님의 말씀을 이런 의미에서 한 부분 나름으로 알아들을 수도 있지 않겠는지요.

자기 존재를 안다는 것 자체가 일생을 걸어야 할 성질의 것입니다. 적당히 다른 것과 함께 해볼 수 있는 일은 결코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어떤 직업도 가지지 말고 자신만 들여다보라는 말로 알아듣는다면 시작부터 잘못 꿰는 것입니다. 평생 농사일로 얼굴 검게 탄 시골 어르신들, 존재 전체를 남김없이 자식들에게 던져 넣으신 분들은 누구보다 자기전문가들입니다.

일상의 작음에 자신을 투신하고 일상의 지리멸렬함에 인내하고 일상의 잔혹함에 부서지고 일상의 소박함에 웃음 짓고 일상의 위대함에 엎드릴 수 있는 그런 이가 그립습니다. 기이할 정도로 개인이 부풀어 팽창해버린 현대 세계 안에서…. 이런 이에게 하늘의 문은 스스로 걸어 다가옵니다.

<그림자 놀이>

세숫대야 물

비친 그림자

참 정답기도 하네

오순도순 마주 보며

속내 환히 보일 때

물 속 푸른 하늘

언 구름 녹아

정겨운 봄비로 내리네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6년 7월의 말씀

석굴암

열림이 곧 닫힘이요

닫힘이 곧 열림이네

저 그 앞에 앉아 머물고 싶습니다. 언젠가 석굴암을 찾았을 때 느낌이 마치 오늘의 느낌처럼 생생하게 피부를 건드립니다. 손님을 모시고 가지 않았더라면 다른 곳 다 포기하고 그냥 그 앞에 앉아있고 싶었습니다. 불교라는 이웃 종교의 유명한 석불이라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습니다. 그저 끌렸습니다. 아름다웠습니다. 평화로웠습니다. 그럼에도 팽팽함이 살아있었습니다. 어느 순간 손을 슥 들어올려 좀 더 다가오라고 손짓이라도 할 것 같았습니다. 심지어 내가 불상인지 불상이 나인지 모를 정도로 그 안에 푹 빠져있는 느낌이 듭니다. 신의 모습과 인간의 모습 그 경계선을 자유로이 술렁술렁 넘나듭니다.

유럽의 수많은 조각과 그림들을 책에서 보았고, 그 앞에 서면 사람을 압도하는 엄청난 건물들 앞에 서보기도 했습니다. 건물들이 크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 균형미와 세세함에까지 이르는 정교함, 어둠과 빛의 조화, 색의 찬란함 앞에서는 감동을 넘어 주눅이 들기도 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왜 이런 것이 없을까라고 갑작스레 애국, 민족주의 같은 것이 슬며시 고개를 쳐들기도 했습니다. 미켈란젤로의 다윗상과 피에타는 표현하기 어려운 아름다움을 마음에 남기는 것도 사실입니다. 모나리자의 미소는 세기를 넘어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석굴암 본존불 같은 인물상은 어디서도 만나지를 못했습니다.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치우친 감정일 수도 있겠으나, 성모님을 표현한 어떤 인물상에서도 “아, 정말 성모님이네.”라는 감동을 받은 적이 없는 것을 보면 꼭히 치우침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 상은 이보다 더 한 것 같습니다.

인성 안에 깃든 신성, 신성 안에 깃든 인성은 어느 한쪽만을 표현하기도 쉽지는 않겠지만 양쪽 모두를 한 모습 안에 담아내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거의 불가능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조심스레 해봅니다.

이제 하나 하나 음미해보기로 합시다. 조용히 닫혀진 입이 어느 순간에는 영원히 닫혀진 듯 하다가도 또 어느 순간에는 조용히 열려 음악같은 한 소리가 흘러나올 것 같습니다. 꽉 닫혀진 입은 대체로 어떤 확고함 내지는 고집스럽움을 느끼게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닫힘이 곧 열림이요 열림이 곧 닫힘이라고나 할까요. 날아갈 듯한 눈썹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최고의 초상화가 김 호석 화백은 초상화에서 눈썹이 그 사람의 인상을 결정짓는다고까지 표현하였는데, 눈썹을 가리고 바라보면 화백의 말에 금방 동의하게 됩니다. 날아갈 듯한 눈썹에서부터 과도하게 크지 않으면서 쭉 뻗은 콧날로 연결되는 선에서 어쩌면 신성이 은근히 드러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눈을 보면 반쯤 닫혀있는데 왠지 모든 것을 다보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묵상할 때 눈을 이렇게 반만 감기 시작한 것이 석굴암을 방문한 뒤부터였습니다. 이 자세를 계속 유지하면 졸음이 끼어들 수가 없다는 것을 어느 순간 발견했습니다. 눈을 감으면 잠이 오기도 쉽지만 쉽게 자신의 생각과 분심 속을 헤엄치고 다닐 수 있고, 눈을 뜨면 보이는 세계 속의 번잡스러움이 집중을 방해하기 쉽습니다. 그리고 이 자세는 끊임없는 깨어있음을 동반합니다. 마지막으로 본존불의 자세입니다. 바늘 끝 하나조차 더 들어갈 자리가 없을 듯한 완벽함과 한없는 편안함이 동시에 흘러나옵니다. 편안하기만 해서는 의로움에서 벗어나기 쉽고, 완벽하기만 해서는 온갖 사람들을 담아낼 수가 없습니다. 옳고 바르고 좋은 것을 지향하는 것은 나의 완벽함을 위해서가 아니라, 타자와 바깥 세상을 위한 것임은 수도자는 한 시도 잊어서는 안될 사실이요, 인간 생명의 지향점입니다.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6년 6월의 말씀

호시노 토미히로

사랑, 생명,아름다움

혼반지는 필요 없다고 했다

아침에 얼굴을 씻길 때

내 얼굴에 상처를 내지 않으려면

내 몸을 들어올릴 때

내가 아프지 않게 하려면

결혼반지는 필요 없다고 했다

지금, 레이스 커튼 사이로 스며든

아침 햇살 속에서

내게로 온 당신이

대야에서 차가운 물을 뜨고 있다

그 열 손가락 끝에서

금보다도 은보다도

아름다운 물방울이 떨어지고 있다

호시노 토미히로. 대학을 졸업하던 바로 그 해 6월, 체육교사였던 건강한 젊은이는 체육관에서 학생들 앞에서 공중제비를 돌다 순간적인 실수로 목 아래 몸 전체가 마비되고 맙니다. 삶의 모든 것들, 가장 기본적인 의식주조차 남에게 의지하고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처지가 되어버린 것이지요. 전신마비! 움직일 수 있는 것은 목뿐이었습니다. 친구가 인사하길래 자기도 팔을흔들려 했으나 팔을 움직일 수 없기에 혀를 흔들었다는 사람. 그리고 이런 그를 입원 후부터 줄곧, 그야말로 한시도 떠나지 않고 옆을 지킨 어머니. 그런 그가 입에 붓을 물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그림을 완성했을 때 그 그림을 보며, “부상을 당한 건 내게 결코 나쁜 일만은 아니었다. … 입원한 뒤 줄곧 내 곁을 지켜온 어머니도 아마 똑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는 “죽고 싶었던 기억보다는 ‘살아야 해’라고 깨우쳐 주신 어머니와 성경의 말씀이 더 강하게 남아있습니다.”라는 글을 썼습니다. 진심이 느껴지는 글입니다. 어머니의 한 마디 “살아야 해!” 라는 한 마디. 죽고 싶은 생각이 없지 않았을 그의 마음을 쪼개고 흔들어 다시 삶에로 아니 더 힘차고 맑은 삶에로 끌어당겨주는 불씨였나봅니다. 그는 어머니에 대한 고마움을

“하나님께서 딱 한 번만

이 팔을 움직이게 해주신다면

어머니 어깨를 두드려 드리리라 …”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의 삶은 개신교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면서 새롭게 채워지고, 건강할 때 없던 생명을 얻게 되며, 자신의 입에서 평생장애조차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는 고백이 터져 나오게 합니다.

그런 그에게 와타나베라는 여성이 나타나, 그의 평생 동반자가 되기를 자처합니다. 위의 시는 수국 그림과 함께 자신의 아내에 대한 마음을 표현한 시입니다. 그러고 보면 생명, 사랑, 아름다움, 진리 이런 것들은 모두 하나로 엮여있음을 알게 됩니다. 얼굴에 상처를 낼까봐 결혼반지가 필요없다는 사람. 이런 사랑에는 생명이 흘러넘칠 수밖에 없고, 이런 생명 앞에 사람은 절로 아름다움을 느끼게 됩니다. 이런 아름다움에 압도된 사람은 거짓이 아닌 진리, 헛된 것이 아닌 참된 것을 향해 움직여가게 되나봅니다.

이 그림과 시 속에는 호시노 토미히로, 어머니, 아내 와타나베 세 사람이 함께 보입니다. 사랑은 그런 것이니까요. 사랑은 서로 사이에 흐르는 것이니까요. 사랑은 상대의 고통 앞에 작아지기는커녕 더 커지고 더 깊어지는 것이니까요. 이런 사랑이 깃든 그림, 글은 다른 이에게도 사랑과 생명이 솟아나게 해줍니다. 사랑과 생명은 흐르니까요. 그리고 이런 사랑과 생명이 흘러드는 곳에는 아름다움이 빛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