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6년 9월의 말씀

13_불이_125x111cm

불 이

(不 異)

시 주변에 서로 참 달라 보이는 두 사람이 물고 뜯을 만큼 싸우는 경우가 있는지요? 결코 서로를 용납할 수 없다는 듯, 상대방은 비리의 온상인 듯 서로를 향해 날을 세우는 그런 경우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시간을 두고 두 사람을 한 번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인생의 큰 공부를 할 좋은 경우이리라 생각됩니다. 사실 이런 경우는 정치나 경제권의 유명인들 사이에는 우리가 심심할 새를 주지 않고 일어나 지속적으로 지면을 채우는 일들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쉽게 하는 말로 싸움은 일방적으로 한 쪽의 잘못만으로는 생겨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두 사람이 똑같다는 것이지요. 싸움에는 분명 공격성, 이권개입, 열등감 이 세 가지 면이 복합적으로 얽혀있습니다. 그중 한 가지만 빠져도 마지막까지 치닿는 싸움으로 가지는 않을 수 있습니다. 탐욕으로 인해 싸움에 말려들었다가도 그 어리석음을 깨닫고 자신을 되찾을 수도 있습니다. 자존심을 상하게 하고서도 뻔뻔스럽게 자기 옳음을 주장하는 사람을 만나면 자제력이 있는 사람도 싸움에 말릴 수도 있습니다.

부모의 사랑을 골고루 받으며 복스럽게 자라는 아기가 화가 나면 엄마 아빠마저 물어뜯는 일이 있는데, 우리 안에는 태생적으로 공격성이 잠재하고 있어 어떤 기회가 되면 머리를 내밀곤 합니다. 손에 쥔 것은 결코 놓치지 않으면서 더 좋은 것을 보면 얼른 낚아채는 아기의 탐심은 나이 50-60이 되어도 우리 안에 여전히 살아있습니다. 열등감 없는 사람을 찾아 지구 한 바퀴를 돌고 역사의 바닥까지 다 헤집어도 소용없는 일이란 것은 누구나 잘알고 있지만, 열등감이 건드려질 때 그것을 알아채는 것은 자기닦음을 하지 않고서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인간의 바닥이 이러하다 보니, 돈을 쌓고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것만이 목적인 세상에서 일단 싸움이 붙으면 저 그림 속 북어대가리 같은 상황이 벌어집니다. 상대의 비리나 잘못을 과장시켜 폭로시키는 것은 물론, 없는 일마저 만들어내어 상대를 사장시켜버리려 합니다. 몸이 느끼는 연민, 측은지심 이런 것은 저 먼나라 이야기일 뿐이지요.

사실 끝장나는 싸움에서 승자란 없습니다. 나의 비리는 하나도 들키지 않고 상대방만을 아주 웃기는 멍텅구리 쪼다로 만들었다 해도, 그 과정에서 험악해진 마음보는 지옥을 방불케 합니다. 자기 마음 속에 자신이 갇혀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어버리지요. 그러면 이 이야기는 나와는 상관없는 저들의 것일 뿐일까요? 사실 싸움이 일어나는 곳이면 어디든 이런 현상은 일어납니다. 내 안의 공격성을 보는 아픈 자기인식, 탐심을 내려놓는 자기수련, 열등감을 인정하는 가난함이 없다면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보편적인 현상입니다. “복되다 온유한 이들, 그들은 땅을 차지하리라.”

치켜뜬 눈

앙다문 입으로

물고뜯으며

바라보는 저놈 저놈

저 웃기는 놈

저 미친 놈

저 개떡같은 놈

바로 자신의 모습인 줄

모르는 것은

당사자들뿐

그들에게

몸이 없고

머리만 남은 것은

당연하고 당연한 일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6년 8월의 말씀

2016.08.성철스님

자기 전문가

인간 전문가

먹고 잠자고 세수하고 대화하고 일하고 화장실 가는 일상의 일들. 수도원이란 곳은 사람이 끊임없이 들고 날고 그러면서 온갖 역동이 일어나는 곳인데, 수도원을 떠나는 이들은 대체로 위의 것들에 문제들이 있는 듯합니다. 혹시 수도원이란 곳에서 가장 귀한 기도 시간에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귀한 것은 대체로 누구나 귀하게 여기는 법이라 그다지 심각한 문제가 생기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수도원에 입회할 때면 1년 정도 지나면 성인, 성녀가 되는 줄 알고 거룩한 1m짜리 얼굴을 하고 다니는 우스꽝스런 시기도 있어, 그런 시간들을 통과하며 수도 연륜이 깊어질수록 일상의 귀함에 눈을 뜨게 됩니다. 일상에 푹 젖음이 없이,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대면할 수 없고, 자신을 모르면 이웃도 하느님도 알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일상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가르쳐주는 위대한 스승입니다. 일상의 사소함, 비천함, 낮추어짐, 잊혀짐에서 처음부터 자유로운 대영혼(?)은 없습니다. 김 호석 화백은 이런 일상의 한 순간, 한 점보다 짧은 순간을 기가 막히게 포착하였습니다. 세수하는 성철스님입니다. 특별할 것도 기이할 것도 없는 매일 아침의 세수하는 장면을 독수리의 눈으로 포착하였습니다. 세숫대야에 비친 얼굴, 그것은 성철 스님의 얼굴이자 화백의 얼굴이며, 보고있는 저 자신과 이 그림과 글을 보게 될 모든 이들의 얼굴일 수도 있습니다. 일상이 비춰주는 나의 얼굴, 그 앞에서 얼굴 돌리지 않고, 세숫대야 속 들여다보듯 그렇게 자신을 볼 수 있는 사람은 복됩니다. 자기혐오나 자기도취에 빠짐이 없이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만나는 일! 그 일 하나 때문에 수도승은 일생을 바칩니다.

자기전문가, 인간전문가, 세상전문가! 세상의 어떤 매력적인 일도 다 포기하고 오직 이 일에만 투신하겠노라 삶을 건 이들이 있습니다. 온갖 전문가들로 가득한 지금의 세상 안에 자기자신 전문가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어떤 이는 심리학을 하는 분들을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심리는 인간존재의 한 부분일 따름입니다(심리학이 현대인들에게 끼친 공헌을 충분히 인정하더라도…)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하신 성철 스님의 말씀을 이런 의미에서 한 부분 나름으로 알아들을 수도 있지 않겠는지요.

자기 존재를 안다는 것 자체가 일생을 걸어야 할 성질의 것입니다. 적당히 다른 것과 함께 해볼 수 있는 일은 결코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어떤 직업도 가지지 말고 자신만 들여다보라는 말로 알아듣는다면 시작부터 잘못 꿰는 것입니다. 평생 농사일로 얼굴 검게 탄 시골 어르신들, 존재 전체를 남김없이 자식들에게 던져 넣으신 분들은 누구보다 자기전문가들입니다.

일상의 작음에 자신을 투신하고 일상의 지리멸렬함에 인내하고 일상의 잔혹함에 부서지고 일상의 소박함에 웃음 짓고 일상의 위대함에 엎드릴 수 있는 그런 이가 그립습니다. 기이할 정도로 개인이 부풀어 팽창해버린 현대 세계 안에서…. 이런 이에게 하늘의 문은 스스로 걸어 다가옵니다.

<그림자 놀이>

세숫대야 물

비친 그림자

참 정답기도 하네

오순도순 마주 보며

속내 환히 보일 때

물 속 푸른 하늘

언 구름 녹아

정겨운 봄비로 내리네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6년 7월의 말씀

석굴암

열림이 곧 닫힘이요

닫힘이 곧 열림이네

저 그 앞에 앉아 머물고 싶습니다. 언젠가 석굴암을 찾았을 때 느낌이 마치 오늘의 느낌처럼 생생하게 피부를 건드립니다. 손님을 모시고 가지 않았더라면 다른 곳 다 포기하고 그냥 그 앞에 앉아있고 싶었습니다. 불교라는 이웃 종교의 유명한 석불이라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습니다. 그저 끌렸습니다. 아름다웠습니다. 평화로웠습니다. 그럼에도 팽팽함이 살아있었습니다. 어느 순간 손을 슥 들어올려 좀 더 다가오라고 손짓이라도 할 것 같았습니다. 심지어 내가 불상인지 불상이 나인지 모를 정도로 그 안에 푹 빠져있는 느낌이 듭니다. 신의 모습과 인간의 모습 그 경계선을 자유로이 술렁술렁 넘나듭니다.

유럽의 수많은 조각과 그림들을 책에서 보았고, 그 앞에 서면 사람을 압도하는 엄청난 건물들 앞에 서보기도 했습니다. 건물들이 크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 균형미와 세세함에까지 이르는 정교함, 어둠과 빛의 조화, 색의 찬란함 앞에서는 감동을 넘어 주눅이 들기도 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왜 이런 것이 없을까라고 갑작스레 애국, 민족주의 같은 것이 슬며시 고개를 쳐들기도 했습니다. 미켈란젤로의 다윗상과 피에타는 표현하기 어려운 아름다움을 마음에 남기는 것도 사실입니다. 모나리자의 미소는 세기를 넘어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석굴암 본존불 같은 인물상은 어디서도 만나지를 못했습니다.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치우친 감정일 수도 있겠으나, 성모님을 표현한 어떤 인물상에서도 “아, 정말 성모님이네.”라는 감동을 받은 적이 없는 것을 보면 꼭히 치우침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 상은 이보다 더 한 것 같습니다.

인성 안에 깃든 신성, 신성 안에 깃든 인성은 어느 한쪽만을 표현하기도 쉽지는 않겠지만 양쪽 모두를 한 모습 안에 담아내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거의 불가능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조심스레 해봅니다.

이제 하나 하나 음미해보기로 합시다. 조용히 닫혀진 입이 어느 순간에는 영원히 닫혀진 듯 하다가도 또 어느 순간에는 조용히 열려 음악같은 한 소리가 흘러나올 것 같습니다. 꽉 닫혀진 입은 대체로 어떤 확고함 내지는 고집스럽움을 느끼게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닫힘이 곧 열림이요 열림이 곧 닫힘이라고나 할까요. 날아갈 듯한 눈썹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최고의 초상화가 김 호석 화백은 초상화에서 눈썹이 그 사람의 인상을 결정짓는다고까지 표현하였는데, 눈썹을 가리고 바라보면 화백의 말에 금방 동의하게 됩니다. 날아갈 듯한 눈썹에서부터 과도하게 크지 않으면서 쭉 뻗은 콧날로 연결되는 선에서 어쩌면 신성이 은근히 드러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눈을 보면 반쯤 닫혀있는데 왠지 모든 것을 다보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묵상할 때 눈을 이렇게 반만 감기 시작한 것이 석굴암을 방문한 뒤부터였습니다. 이 자세를 계속 유지하면 졸음이 끼어들 수가 없다는 것을 어느 순간 발견했습니다. 눈을 감으면 잠이 오기도 쉽지만 쉽게 자신의 생각과 분심 속을 헤엄치고 다닐 수 있고, 눈을 뜨면 보이는 세계 속의 번잡스러움이 집중을 방해하기 쉽습니다. 그리고 이 자세는 끊임없는 깨어있음을 동반합니다. 마지막으로 본존불의 자세입니다. 바늘 끝 하나조차 더 들어갈 자리가 없을 듯한 완벽함과 한없는 편안함이 동시에 흘러나옵니다. 편안하기만 해서는 의로움에서 벗어나기 쉽고, 완벽하기만 해서는 온갖 사람들을 담아낼 수가 없습니다. 옳고 바르고 좋은 것을 지향하는 것은 나의 완벽함을 위해서가 아니라, 타자와 바깥 세상을 위한 것임은 수도자는 한 시도 잊어서는 안될 사실이요, 인간 생명의 지향점입니다.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6년 6월의 말씀

호시노 토미히로

사랑, 생명,아름다움

혼반지는 필요 없다고 했다

아침에 얼굴을 씻길 때

내 얼굴에 상처를 내지 않으려면

내 몸을 들어올릴 때

내가 아프지 않게 하려면

결혼반지는 필요 없다고 했다

지금, 레이스 커튼 사이로 스며든

아침 햇살 속에서

내게로 온 당신이

대야에서 차가운 물을 뜨고 있다

그 열 손가락 끝에서

금보다도 은보다도

아름다운 물방울이 떨어지고 있다

호시노 토미히로. 대학을 졸업하던 바로 그 해 6월, 체육교사였던 건강한 젊은이는 체육관에서 학생들 앞에서 공중제비를 돌다 순간적인 실수로 목 아래 몸 전체가 마비되고 맙니다. 삶의 모든 것들, 가장 기본적인 의식주조차 남에게 의지하고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처지가 되어버린 것이지요. 전신마비! 움직일 수 있는 것은 목뿐이었습니다. 친구가 인사하길래 자기도 팔을흔들려 했으나 팔을 움직일 수 없기에 혀를 흔들었다는 사람. 그리고 이런 그를 입원 후부터 줄곧, 그야말로 한시도 떠나지 않고 옆을 지킨 어머니. 그런 그가 입에 붓을 물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그림을 완성했을 때 그 그림을 보며, “부상을 당한 건 내게 결코 나쁜 일만은 아니었다. … 입원한 뒤 줄곧 내 곁을 지켜온 어머니도 아마 똑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는 “죽고 싶었던 기억보다는 ‘살아야 해’라고 깨우쳐 주신 어머니와 성경의 말씀이 더 강하게 남아있습니다.”라는 글을 썼습니다. 진심이 느껴지는 글입니다. 어머니의 한 마디 “살아야 해!” 라는 한 마디. 죽고 싶은 생각이 없지 않았을 그의 마음을 쪼개고 흔들어 다시 삶에로 아니 더 힘차고 맑은 삶에로 끌어당겨주는 불씨였나봅니다. 그는 어머니에 대한 고마움을

“하나님께서 딱 한 번만

이 팔을 움직이게 해주신다면

어머니 어깨를 두드려 드리리라 …”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의 삶은 개신교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면서 새롭게 채워지고, 건강할 때 없던 생명을 얻게 되며, 자신의 입에서 평생장애조차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는 고백이 터져 나오게 합니다.

그런 그에게 와타나베라는 여성이 나타나, 그의 평생 동반자가 되기를 자처합니다. 위의 시는 수국 그림과 함께 자신의 아내에 대한 마음을 표현한 시입니다. 그러고 보면 생명, 사랑, 아름다움, 진리 이런 것들은 모두 하나로 엮여있음을 알게 됩니다. 얼굴에 상처를 낼까봐 결혼반지가 필요없다는 사람. 이런 사랑에는 생명이 흘러넘칠 수밖에 없고, 이런 생명 앞에 사람은 절로 아름다움을 느끼게 됩니다. 이런 아름다움에 압도된 사람은 거짓이 아닌 진리, 헛된 것이 아닌 참된 것을 향해 움직여가게 되나봅니다.

이 그림과 시 속에는 호시노 토미히로, 어머니, 아내 와타나베 세 사람이 함께 보입니다. 사랑은 그런 것이니까요. 사랑은 서로 사이에 흐르는 것이니까요. 사랑은 상대의 고통 앞에 작아지기는커녕 더 커지고 더 깊어지는 것이니까요. 이런 사랑이 깃든 그림, 글은 다른 이에게도 사랑과 생명이 솟아나게 해줍니다. 사랑과 생명은 흐르니까요. 그리고 이런 사랑과 생명이 흘러드는 곳에는 아름다움이 빛납니다.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6년 5월의 말씀

rmfla

 

성령의 바람

상적인 사고의 틀 안에서 천사는 선한 존재로 인간 편이고, 악마는 인간을 유혹하거나 해를 끼치는 나쁜 존재로 자리잡고 있다고 해도 딴지를 걸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네덜란드 출신인 모리스 코리넬리스 에셔라는 화가는 이런 기본적으로 통하는 사고에 제동을 걸어옵니다. 선과 악, 현실과 가상의 세계, 3차원을 넘어서는 세계, 무한반복 되는 고리인 뫼비우스의 띠 등 일단 “어! 이게 뭐지?”라는 의문을 가지게 만드는 그림을 그립니다. 사실 현실에 대해 숙고하는 사람이라면, 선한 사람이라 여겨오던 사람에게서 이해할 수 없는 나쁜 면에 접해 자신의 삶의 한 순간이 무너질 수도 있는 면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아우슈비츠의 잔인한 군인들이 가정에서는 한없이 좋은 아버지였다는 사실은 이런 면에서 인간존재, 인간현실의 깊은 심연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구도의 길을 걷는 수도승들에게도 자기기만이라는 문제는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우리 시대의 큰 스승 성철 스님의 임종게(스님들이 죽음 직전에 남기는 깨달음의 시)로 “평생 남녀의 무리를 속여 죄업이 하늘을 넘는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 글에서 성철 스님이 남모르는 큰죄를 지은 것을 임종 직전에 양심고백이라도 한 것인 양 떠들었다고 하는데 이는 스스로 자신과 인간의 심연을 모른다는 사실을 폭로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즉 에셔의 그림이나 성철 스님의 임종게는 선과 악, 내 편 네 편으로 갈린 이원론의 세계 안을 휘저어놓습니다. 선과 악, 죽음과 생명 등 서로 대립하는 짝들이 서로 파괴적이 아닌 공존하는 관계라는 사실입니다. 그림을 보면 박쥐 얼굴을 한 악마와 하얀 천사가 한 치의 틈도 없이 서로 맞물려 돌아갑니다. 원 밖으로 갈수록 천사와 악마 사이는 점점 줄어들어 원의 테두리에 닿으면 천사와 악마는 하나를 이룹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은 선인에게나 악인에게나 골고루 비와 햇살을 내린다.”고 하셨고, 자신 안의 검은 것을 보지 못하고 외면적인 선을 자랑하는 위선을 꾸짖으셨지, 선함이나 악함 자체를 칭찬하거나 야단치는 것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심지어 예수를 향해 ‘선하신 선생님’이라는 사람에게 “하느님 한 분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다.”라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욥기에서 하느님은 욥을 시험하겠다는 사탄의 제안을 받아들이십니다. 즉 사탄 역시 하느님 손 안에 있는 것이지 하느님 바깥의 어떤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선과 악이 마치 제각각의 힘인 양 이원론적으로 쪼개놓고 있는 이들을 보면, 내 편은 선하고 너희는 악하다는 지독하게 자기중심적인 이론에 바탕하고 있음을 쉽게 관찰할 수 있습니다. 세상을 파괴하는 모든 전쟁의 바탕에는 상대방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는 이원론이 깔려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인간을 그렇게 집단으로 죽일 수 있겠습니까? 사회정의는 정말로 필요하고 현대 사회의 일그러진 모습 안에는 더욱 그렇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상대방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고 잔인하게 몰아낸다면, 우리가 절실히 경험하듯 악순환이 반복 또 반복될 뿐입니다.

이렇게 선과 악으로 쪼개진 우리네 세상에 성령은 바람으로 오십니다. 어떤 좁은 틈도 스륵 불어갈 수 있는 바람, 흑과 백, 선과 악의 명백한 세계 안으로 불어들어와 이쪽은 저쪽으로 저쪽은 이쪽으로 왔다갔다하게 됩니다. 선과 악이라는 우리가 만든 틀에 스스로 갇힌 인간을 해방시킵니다. 성령은 사랑이시고, 사랑은 해방하는 힘입니다. 자신으로부터 해방시켜 타인 안에 머물게 하고, 욕심으로 가득 찬 마음을 비워, 여리고 작은 것들이 들어갈 수 있도록 바람이 불어옵니다. 이 바람이 심연에 닿으면 자신 안에 있는 심연, 악, 죽음, 검음을 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성철 스님만이 아니라 많은 성인들은 “저는 죄인입니다.”라고 가슴을 쳤다는 것도 결코 과장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성령의 바람 속에서 복된 죄인! 죄인들이 모인 세상에 선인, 악인의 구별이 생겨날 리 없지요.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6년 4월의 말씀

4월 소식지_달빛-예수

 

부활의 얼굴

활하신 예수님을 그린 그림은 이콘이든 다른 그림이든 보통 환한 빛이 동반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러나 성서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엠마오 길의 제자들처럼 지나가는 행인, 막달라 마리아에게는 정원지기, 고기를 잡으러 나간 제자들에게는 조언을 해주는 분으로, 아주 평범한 한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놀라는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물고기도 잡수시고, 의심하는 토마 앞에서는 손발과 옆구리의 상처를 보여주고 싶어하시는 분으로, 고기잡이에 지친 제자들에게는 빵과 구운 물고기를 준비하는 엄마같은 분으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베드로에게 세 번씩이나 질문하시며 그를 준비시키는 분으로 제자들에게는 인식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그 고난 그리고 부활과 성령강림을 목격했던 이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은 결코 화려하지도 찬란한 빛으로 가득 찬 것도 아니었던 것만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물론 막달라 마리아조차 알아보지 못했던 평소와는 아주 다른 모습이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만, 그 다른 모습은 하늘의 천사나 왕의 모습이 아니라, 정원지기나 지나가는 행인의 모습이었던 것도 결코 작은 일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분은 살아계실 때와 다름없이 가난한 이, 온유한 이, 슬퍼하는 이가 복되다고 말씀하시는 분이시요, 가장 가난하게, 가장 작은 목소리로 가장 가난한 이들 안에 계시는 분이십니다. 위엄과 힘과 찬란한 광채로 악을 압도하고, 엄청난 것을 세우시는 분으로 예수님이 다가오셨다는 것을 들은 사람은 없을 듯합니다. 이런 모습이 떠오른다면 그것은 제2의 그리스도라 자신을 칭하는 사이비 종교에서 그 교주의 모습일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더 작아지셔서, 지상에서 해방을 선포하시며 앓는 이 눈먼 이 다리저는 이를 고쳐 사람들을 놀라게 하던 그 모습마저 보이지 않고 사람들 안에, 바로 우리 안에 그리고 성체 안에 인간의 모습마저 감추신 채 마치 우리 자신인 듯 그렇게 숨어계십니다. 복음에서처럼 정원지기로, 지나가는 행인으로 빵을 구워놓고 기다리는 이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며, 우리도 그렇게 하기를 바라십니다.

이런 맥락에서 2월달에도 소개했던 김 호원 화백의 이 그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참 잘 표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참 독특한 그림, 화백의 사고가 선명하게 빛이 되어 보는 이에게 다가오는 그림입니다. 나무 가지 사이에는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의 얼굴들이 채워져 있고 나뭇가지 자체가 예수님의 얼굴 형상을 이루고 있으니, 가난한 이들과 자연이 예수님의 얼굴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바로 우리 자신 안에 계시어, 우리가 자신을 비우고 자신 안에 계신 그분의 모습을 드러낼 때 비로소 부활하신 분이 드러날 수 있다고 볼 수 있지 않겠는지요. 더 숨으시고 더 작아지시고 더 비천해지신 분을 만나려면 더 이상 작아질 것도 없는 우리 자신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자신 바깥, 세상의 휘황한 풍요로움, 부, 명예, 권력, 외모를 뒤좇을 때 그 어디서도 그분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본능을 끝없이 자극하는 현대 세상의 휘황한 빛이 우리를 얼마나 당기고 있을까요? 부활하신 분은 그 빛에 밀리어 어디까지 쫓겨나 계시는 것일가요? 가장 작은 것, 가장 비천한 것, 가장 가난한 이를 선택할 용기가 있을까요? 고난받는 특권이라는 말을 자신의 것으로 담을 수 있을까요? 부활하신 분이 머무는 그곳을 찾아낼 수 있을까요?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6년 3월의 말씀

3월 소식지

어머니를 그리다 그 너머

상을 깡그리 뒤엎어주는 어떤 것을 만나는 것은 만나기 힘든 은총의 기회입니다. “어머니를 그리다”라는 책의 첫 장을 넘길 때 제 안에는 화가들이 그린 엄마와 아기의 따뜻하고 포근하며 밝은 화면이 깔려있었던가 봅니다. 궁금함을 참지 못해 우선 그림들만 대충 대충 넘겨보았는데, 삼분의 일도 채 넘기기 전에 저의 예상은 마치 얇은 유리처럼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습니다. 15C부터 20C에 걸쳐 40명의 화가들이 그린 어머니를 담고 있는데, 그중 35명이 회색, 검정색의 무채색의 옷을 입은 어머니를 그리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상당수는 당시의 상복차림입니다. 정신이 잠시 멍해지는 느낌마저 들었습니다. 며칠을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가 어느 순간, 내가 엄마를 그린다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엄마가 밝은 색 옷을 입지 않았던 것도 아닌데, 도저히 밝은 색 옷을 입은 엄마를 그릴수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엄마의 살아낸 삶, 그 고난, 인내, 눈물들이 단지 따뜻함으로 그려질 수는 없는 것이지요. 엄마의 사랑은 따뜻함 그보다 훨씬 더 폭넓은 것이니까요. 무채색을 쓴 화가들의 마음이 조금씩 아프게, 고맙게, 뭉클하게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화가들에게 엄마의 일생 중 그 사랑이 가장 크게 와닿았던 순간은 아마도 형제나 자매 혹은 아버지의 죽음 앞에 선 엄마의 모습에서였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화가들과 엄마의 관계는 깊은 신뢰로 이어져있었고, 화가들이 주위의 인정을 받지 못할 때조차 자신의 아이가 성공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격려해주는 모습들이 자주 눈에 뜨였습니다. 화가라는 쉽지 않은 길, 일생 자신을 투신하고서도 인정조차 받지 못할 수도 있는 길에서 엄마라는 존재의 신뢰와 믿음은 화가들에게 배의 닻과도 같은 것이 아니었겠는지요. 40명이나 되는 화가를 다루다보니 아쉽게도 깊이 있는 조사를 바탕으로 한 글은 아니지만 자세히 볼수록 그림 자체가 말해주는 것들이 참 많았습니다. 색채의 화가인 샤갈은 거의 무채색 톤의 화면에 검은 앞치마를 두르고 화덕에서 일하는 엄마의 모습을 아주 단순한 필치로 그립니다. 15C 화가 뒤러는 목에 불거진 핏줄, 뼈가 드러날 정도로 앙상한 얼굴을 그대로 그리며, 제임스 앙소르라는 화가는 임종한 직후의 모습을 그려냅니다. 놀라우리만치 솔직하고 적나라합니다. 그림들을 하나 하나 보고 있자면 그 엄마의 성격까지도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결코 만만치 않은 성향들을 지녔을 화가 못지않게 엄마들의 눈빛이나 입매 또한 다부져보입니다. 엄마와 아들, 엄마와 딸 사이라 할지라도 없을 수 없는 생의 한 편 드라마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사랑으로도 결코 메꿀 수 없는 인간 존재의 심연, 그 바닥이 서로 만나며 일으켰을 물보라, 밀물, 쓰나미 속에서 부모와 자식을 넘어 한 인간으로 느꼈을 동료애 같은 것이 슬쩍 얼굴을 내밀기도 합니다. 부모의 약함과 잘못을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것을 그대로 물려받음을 익히 알고 있지요.

우리가 나온 모태, 그 약함과 죄를 그대로 물려받는 아담 이래 누구도 면제받을 수 없는 원죄마저 이 그림들은 이야기해주고 있습니다. 엄마를 잇고 아이를 잇고 또 그의 아이를 있는 이 원죄의 줄기, 그 앞에 한 번 서보는 것, 인생의 어떤 순간에는 반드시 마주서야 할 일입니다. 이것 없이 삶을 참으로 진실되게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진리의 삶, 참된 가치의 삶, 우리 엄마들조차 살아내지 못한 삶에로 초대하기 위해 우리를 위해 목숨을 내놓으신 예수 그리스도, 참생명의 주인, 그분의 모습 또한 그림들 속에 얼비칩니다.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6년 2월의 말씀

영산강_2016.02

찬 미 하 라 교종 프란치스코

년 6월 프리드리히의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라는 그림을 기억하시는지요? 거칠고 험한 산을 안개가 가득 덮어 신비와 두려움이 느껴지는 산 정상에 한 남자가 한 쪽 발을 올린 채 그 산보다 더 장엄한 자세로 서있는 모습의 그림이었습니다. 그에 비하면 이 그림의 자연은 아주 평범한 한국 농촌의 풍경입니다. 가을걷이마저 끝나 황량한 들판과 겨울강을 이렇듯 따뜻하게 김 호원 화백은 그려내고 있습니다. 나도 저 들판에 서고 싶게 만듭니다.

이미 땅과 가까워진 억새 그늘 아래 쪼그리고 앉은 작은 여자아이와 새소리에 귀를 세우는 강아지 한 마리. 특별한 것, 멋있는 것 하나 없이도 멋진 그림이 완성되었습니다. 자연과 인간 동물이 서로 품고, 서로에게 기대고, 그러면서도 각자는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쳐내고 파헤치고 밀어낼 것이라곤 하나도 보이지 않습니다. 쓸 데 없으니 쓸어버리고 다른 좋은 것이 들어와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생긴 그대로 자신의 자리가 있습니다. 오직 인간의 탐욕만을 목표로 모든 것들의 질서를 매겨, 자르고 파헤치고 없애버린 곳에는 찾아볼 수 없는 아름다움이 이 그림에는 담겨있습니다. 사람이 자연 위에 우뚝 서있지도 않습니다. 자연과 사람은 이 푸른 지구별 위의 동료니까요. 만약 저 그림 한복판에 멋진 시멘트 건물 한 채가 있다면 어떨까요? 그 안에 사는 사람이야 고요히 흐르는 강과 넉넉한 들녘 가운데 청정한 공기를 마시며 멋진 전원생활을 영위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 들녘의 숨소리는 더 이상 들을 수가 없을 뿐더러, 귀 밝은 이에게는 아파 우는 들녘의 울음소리마저 들릴 것입니다. 더구나 저 들녘을 깨끗이 밀어내고 아파트와 집들, 상가가 들어선다면 지금 우리를 감싸주는 그 평화의 고즈넉함은 결코 얻을 수 없게 되고 맙니다. 저 아름다움을 발달이라는 목표를 위해 얼마나 많이 넘겨주었나요?

이제는 저 들녘의 숨소리, 우리 가슴 속에 짓눌린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할 때가 온 것 같습니다. 어디 들녘뿐이겠습니까? 곳곳에서 울부짖는 소리가 들립니다. 자식을 잃고 일자리를 잃고 집단으로 내몰린 이들이 여기 저기 있건만 힘있는 언론과 정치인, 기업인들은 들은 체도 하지 않습니다. 약한 이들만이 서로 힘을 모아 어떻게든 이 소리를 세상에 내보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힘있는 이들의 눈에는 불순 세력으로밖에 보이지 않나봅니다. 이 소리마저 외면한다면 길가 돌멩이들마저 소리를 칠 것이고 하느님께서 당신의 사자를 보내시지 않을 리 없을 것입니다. 우리도 마음 깊은 곳 저 들녘처럼 따뜻한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다. 저 따뜻함이 없는 사람이란 아무도 없음을 믿기에 우리는 기도합니다. 저 부드러움과 넉넉함이 흐르는 곳에는 옆 사람도 약한 사람도 함께 살 수 있습니다. 부드러움과 넉넉함을 잃고 시멘트 건물처럼 일자, 직선의 선만이 서로 높이 솟겠다고 경쟁하는 곳에서는 약한 이들과 더 약한 자연 속 동물, 식물들은 그 서슬 아래서 발디딜 곳조차 찾지를 못하게 됨을 우리는 지난 50년 동안 분명하게 보아왔습니다.

저 억새처럼 한여름 태양 아래 그 강건함도 초겨울 바람 앞에 내려놓을 수 있는 여유가 이제 정말 필요한 때입니다. 부드럽게 물결치는 저 곡선의 음악이 우리 마음에 물결치는 날, 이웃집 담 너머 먹을거리 서로 나눠먹던 그 정겨움이 샛강의 졸졸거림처럼 흐르는 날, 이웃의 아픔에 내 마음을 보태 저 강물처럼 도도히 흐르는 날을 꿈꾸어봅니다. 교종 프란치스코의 “찬미하라”가 온세상의 교향곡으로 울려퍼지는 날을 꿈꿉니다.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6년 1월의 말씀

2016.1월소식지

 

사랑의 그물망

해 아침, 노란색이 묻어나는 그림 한 편 보냅니다. 추계대사도(雛鷄待飼圖). 병아리가 먹이를 기다린다는 의미의 그림으로 12-3세기 송나라 화가 이적이라는 남자가 그린 것입니다. 남자를 강조하는 이유는 이 포근포근 폭닥폭닥 따뜻함이 묻어나는 그림을 먼 시절, 남자란 근엄한 존재이던 시절에, 남자가 그렸다는 것입니다. 어떤 전경 속 한 부분이 아니라 오늘날 데생처럼 달랑 병아리만 그린 동양화를 잘 보지 못했습니다. 문득 이적이란 화가 자신이 궁금해져 인터넷 검색을 해보았지만 송대 무명 화가라는 사실 외에 별다른 수확이 없었습니다. 어쩌면 큰 수확이지요. 무명화가라는 사실, 아마도 궁핍했을 가능성이 크지요. 일생 노력해도 명예도 부도 따라오지 않은 가난한 마음이 아니고선 잡아내기 어려운 분위기라는 생각이 듭니다.

달랑 병아리 두 마리 그림이지만 보는 이의 마음에 슬그머니 따뜻함이 스며듭니다. 두 마리가 한 방향을 향하고 있기는 하지만 한 마리는 앉아있고 다른 한 마리는 반대쪽을 향해 가다가 머리를 돌린 듯합니다. 어미 닭 혹은 주인이 먹이를 주려하는데, 그쪽을 향해 달려가지 않고 제자리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조금 별난 착상이지요. 보통 종종 걸음으로 달음질하는 병아리들의 모습을 보았던가 봅

니다. 그렇다고 먹이를 보고도 그저 밍숭맹숭 혹은 이미 배가 부른 그런 상태는 아닌 것 같은데, 그 이유는 한쪽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두 마리의 눈에는 먹이를 향한 간절함이 묻어나오니까요. 먹이를 보고도 달려가 낚아채지 않고, 느긋이 기다리는 어미에 대한 신뢰라고나 할까. 어미가 넉넉히 주리라는 앞선 경험이 포동포동 노란 몸을 봄의 생명력으로 가득 차게 만드나봅니다.

동물의 세계든 사람의 세계든 이런 경험은 다를 바가 없는 것 같습니다. 사랑의 경험이 서로 왔다갔다 하는 곳, 그곳에는 참생명이 약동합니다. 참생명은 다시 더 큰 사랑을 낳아 자신들이 속한 사회, 공동체, 가정 안이 생명력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결코 자신 안에 갇혀있을 수 없으니까요. 타인을 먹이고 살리고 자신을 내어주고 남의 것에 감사하고 있는 것은 나누고 부족한 것은 받고 멈춤이 없이 왔다 갔다 하면서도 불안에 빠지거나 정처없이 흘러다니지 않습니다.

사랑은 작고 작은 것에 마음이 가고, 작고 작기에 서로 몸 기댈 줄 알고, 작은 것 안에나 큰 것 안에나 그 속 깃든 신비에 눈 뜰 줄 알기에 세상 안에 사랑의 흐름을 만들어냅니다. 나에게서 너에게로 너에게서 그에게로 너에게 나에게 누구도 배제하지 않고, 이렇게 엮인 그물망은 누구든 안전하게 살아갈 생명의 터전, 생명을 낳는 터전이 됩니다. 새해에 야무진 꿈 하나 꾼들 탓할 이 없겠지요.

 

 

<손수레>

섬김의 분주함은 영의 평온을 부르고

섬김의 고단함은 육을 부드럽게 단련하고

섬김의 내어놓음이야말로 존재의 충만이니

자신을 내어놓고

타인의 유익을 위해 움직이는 손과 발은

하느님 사랑 실어 나르는 손수레라네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5년 12월의 말씀

15.12월소식지

 

인간이라는 그릇

그림에서 누가 보입니까? 사실 조르주 드 투라라는 이 그림을 그린 화가의 그림 분위기가 개인적으로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습니다. 특히 막달라 마리아의 회개를 그린 그림은 일반적으로 평하기를 저절로 고요함을 느끼게 해준다고 하는데, 저로서는 지나치게 멜랑꼬리(?)한 분위기가 퍽 마음에 들지는 않았었습니다. 그런데 아기예수님을 진짜 아기, 그것도 갓 태어난 아기의 모습으로 그린 그림을 찾으려 하니 이 그림밖에 손에 넣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기 그림을 자꾸 보다보니 원래 지녔던 선입관은 사라지고 실핏줄 가득한 아기의 모습, 그 말랑말랑 연약한 모습에서 말할 수 없는 신비로움이 스며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이 화가의 생애는 우리를 감동시킬 그런 점들은 찾기 어려운 듯 합니다. 자료가 명확하지는 않다 치더라도 어쨌든 평민 출신에서 결혼을 통해 작지만 귀족 칭호도 지니고 상당한 농지도 지녔다합니다. 그리고 농민에 대한 사려깊지 못한 대우로 가족 모두가 농민반란 때 맞아죽었다 합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인문주의가 발달하고 인간의식의 새로운 면이 강조되는 바로크 시기에 유별나게 종교화를 많이 그렸습니다. 인간의 이해하기 어려운 심연이라 할까요. 이중성이라 할까요. 그 깊은 심연을 엿보는 것 같아 아찔함을 느끼게 합니다.

그런 인간, 날 것의 인간, 그것도 갓 태어난 아기가 동시에 하느님이시라는 이 깊은 신비 앞에 설 때는 더 아찔하겠지요! 이 사실이 신비로 자신의 몸과 정신과 영을 뚫고 다가오는 이는 복됩니다. 저 실핏줄 투명한 아기, 태어나 곧바로 천으로 감싸인 아기 안에서 생명의 신비가, 하느님의 신비가 펄펄 살아 움직이고 있습니다. 저 아기가 하느님이시라면, 인간 모두는 한 명의 예외도 없이 우리의 찬미를 받아 마땅합니다. 인간을 인간으로 알아보지 못할 때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도 진실이 됩니다. 하느님께 다가가고자 한다면 저 약하디 약한 인간, 쥐면 꺼질 듯, 약한 숨은 훅 불어꺼질 듯, 그렇게 약한 인간에게로 다가가야 합니다. 우리 눈에는 끝없이 악해보이는 인간 안에도 그 하느님이 깃들어 계시다는 사실 앞에 우리는 전율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밀밭의 가라지는 아직 뽑아서는 안되는 것이지요. 뽑으려다 내가 가라지인 것이 드러날 수도 있지요.

생명의 신비, 사람의 신비, 아기의 신비, 아기예수님의 신비, 하느님의 신비, 약함의 신비, 악의 신비, 선의 신비는 인간이라는 하나의 그릇 안에 만납니다. 인간이라는 그릇 안으로 오시어 인간 조건의 모든 약함을 함께 지닌 하느님! 그 하느님 앞에 선다면 그 사람은 인간이 불행, 악, 비참, 약함 또한 한없는 신비 안에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약하디 약한 인간이라는 그릇에 하느님이 담길 때, 동료 인간이 담길 때, 동료 피조물이 담길 때 인간은 참 인간이 됩니다.

 

<타자를 담을 때>

타자가 자신을

가득 채울 때 충만

타자와 하나를 이룰 때

비로소 참 나

자신에게서 미끄러져 나가면

타자가 들어와도 만날 이 없네

우리는 그릇

타자를 담을 때 온전해지는 그릇

자신을 비워 생겨난 곳

타자의 자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