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트리 trappkorea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6년 4월의 말씀

  활하신 예수님을 그린 그림은 이콘이든 다른 그림이든 보통 환한 빛이 동반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러나 성서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엠마오 길의 제자들처럼 지나가는 행인, 막달라 마리아에게는 정원지기, 고기를 잡으러 나간 제자들에게는 조언을 해주는 분으로, 아주 평범한 한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놀라는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물고기도 잡수시고, 의심하는 토마 앞에서는 손발과 옆구리의 상처를 보여주고 싶어하시는 분으로, 고기잡이에 […]

공동의 집 5

  유순하고 겁 많기 그지없는 아이 – 멧돼지   밭 담당을 하던 시기에 멧돼지에 대한 전의(戰意)에 불타지 않았다고 말하면 거짓말이다. 모든 농부가 나와 같은 심정일 것이다. 고구마가 한창 커가던 시절, 수확시기를 생각하며 흐뭇함에 젖어 일하러 나간 밭에 전날 밤 멧돼지가 다녀가셨다. 고구마 밭은 엉망으로 뒤집혀 있었고 무성히 자란 잎사귀로 덮인 밭에서는 아무런 수확물도 나오지 않았다. […]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6년 3월의 말씀

상을 깡그리 뒤엎어주는 어떤 것을 만나는 것은 만나기 힘든 은총의 기회입니다. “어머니를 그리다”라는 책의 첫 장을 넘길 때 제 안에는 화가들이 그린 엄마와 아기의 따뜻하고 포근하며 밝은 화면이 깔려있었던가 봅니다. 궁금함을 참지 못해 우선 그림들만 대충 대충 넘겨보았는데, 삼분의 일도 채 넘기기 전에 저의 예상은 마치 얇은 유리처럼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습니다. 15C부터 20C에 걸쳐 40명의 […]

생명 덩어리

  생명 덩어리   아가야 너 생명 덩어리 조그만 몸에 다 담기지 않아 펄펄 넘쳐 소낙비로 우리에게 퍼붓는구나 생명 잔치 하늘 잔치 우리를 씻기는구나 먹이는구나

비밀스런 방

  비밀스런 방   작아지고 낮아짐은 비밀스런 방 신발끈 풀어드리기에도 합당치 않은 그런 분을 만나는 방 작아지고 낮아짐은 비밀스런 방 작아지고 낮아져 행복하니 진짜 나와 진짜 그분이 만나는 방

한해 첫날에

  한 해 첫날에   저의 생명으로 님은 찬미받으소서 저의 죽음으로 님은 찬미받으소서 생명과 죽음 내 손에 있지 않고 님의 손 안에 있으니 찬미받으소서 님의 손길 내 생명보다 나으니 저 평안하나이다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6년 2월의 말씀

년 6월 프리드리히의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라는 그림을 기억하시는지요? 거칠고 험한 산을 안개가 가득 덮어 신비와 두려움이 느껴지는 산 정상에 한 남자가 한 쪽 발을 올린 채 그 산보다 더 장엄한 자세로 서있는 모습의 그림이었습니다. 그에 비하면 이 그림의 자연은 아주 평범한 한국 농촌의 풍경입니다. 가을걷이마저 끝나 황량한 들판과 겨울강을 이렇듯 따뜻하게 김 호원 화백은 […]

공동의 집4

공동의 집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원전보유와 핵무기가 국가의 가장 큰 방위(防衛)와 에너지원이라고 믿는 우리 시대에 일본 후쿠시마 원전사고는 원전을 기반으로 한 경제성장이 되돌이킬 수 없는 환경파괴와 국민의 생명위협, 그것도 한 세대에 끝나지 않는 지속적인 고통을 유발한다는 핵폭탄 선언과도 같은 경종을 울렸다. 역사상 가장 큰 원전사고로 불리는 체르노빌 원전사고의 11배 규모요, 세계에서 기술력이 가장 탁월하다고 […]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6년 1월의 말씀

  해 아침, 노란색이 묻어나는 그림 한 편 보냅니다. 추계대사도(雛鷄待飼圖). 병아리가 먹이를 기다린다는 의미의 그림으로 12-3세기 송나라 화가 이적이라는 남자가 그린 것입니다. 남자를 강조하는 이유는 이 포근포근 폭닥폭닥 따뜻함이 묻어나는 그림을 먼 시절, 남자란 근엄한 존재이던 시절에, 남자가 그렸다는 것입니다. 어떤 전경 속 한 부분이 아니라 오늘날 데생처럼 달랑 병아리만 그린 동양화를 잘 보지 못했습니다. […]

빈자리 5

  빈자리 5   서로서로 함께 손잡아 모두 함께 손잡아 생긴 둥근 빈자리 우리들 중 누구를 위한 자리 아니네 우리 사이에 하느님 머무는 자리 서로 중심이 되겠노라 툭툭 불거져 나오는 곳에는 생겨날 수 없는 자리